[역사로 보는 정치] 맥아더 자만심이 빚은 비극과 개혁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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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맥아더 자만심이 빚은 비극과 개혁론자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0.12.27 1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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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능력 과신으로 역사의 무대서 내려 왔다는 역사의 교훈 깨달아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기자)

미국의 전설 맥아더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역사의 마지막 무대에서 쓸쓸히 내려 왔다는 역사의 교훈을 깨달아야 할 개혁론자들이 있다는 진실이 씁쓸하다. 사진제공=뉴시스
미국의 전설 맥아더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역사의 마지막 무대에서 쓸쓸히 내려 왔다는 역사의 교훈을 깨달아야 할 개혁론자들이 있다는 진실이 씁쓸하다. 사진제공=뉴시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이 마지막 무대였다. 미군 역사상 맥아더 장군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군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미 군부 최고 엘리트 집안의 금수저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남북전쟁 영웅, 아버지는 미·스페인 전쟁 영웅이었다. 물론 그 자신도 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다. 그의 군 인생은 거칠 것이 없었다.

특히 그의 부친이 필리핀 군정장군으로 재직할 당시 아시아와 아시아인에 대한 견문과 이해도를 높힐 수 있었다. 필리핀은 그가 아시아와의 인연을 맺는 첫 여정지였다. 그도 1922년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대를 이어 필리핀과의 인연을 맺은 것을 보면 필리핀은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맥아더는 준비된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두 차례의 군단장을 거친 후 1930년에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육군 최고 수장이 됐다. 5년 후 참모총장 직을 내려 놓았지만 조국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의 아시아에 대한 깊은 경륜을 존중했고,  퇴임 후 일년 만인 1936년 필리핀군의 군사고문이 됐다. 당시 부관이 후일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소령이었다. 그는 임무를 훌륭히 마치고 1937년 퇴역했다. 어느덧 그도 60을 바라보는 예비역 대장이 됐다.

하지만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을 본격 시작했다. 그가 참모총장일 때인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퇴역한 해인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최고의 아시아 전문가인 맥아더가 다시 필요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예비역 대장인 그를 두 단계나 낮춰 현역 소장으로 복귀시키더니 다시 중장으로 진급시켜 극동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조국의 부름에 기꺼이 따랐다.

맥아더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일본과의 일전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은 1941년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더니 그가 있는 필리핀을 기습 공격했다. 역전 노장인 맥아더도 일본의 놀라운 기세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노장은 눈물을 머금고 많은 부하들을 필리핀에 남겨두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했다.

맥아더는 필리핀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전열을 정비한 그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고, 조국은 그에게 태평양 전선을 맡겼다. 5성 장군이 된 그는 탁월한 전략괴 지휘로 필리핀을 수복했고, 과달카날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 결정적인 승전을 거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는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맥아더는 한 때 자신의 부관이었던 아이젠하워와 함께 미국의 영웅이 됐다. 그는 천황의 나라 일본을 사람의 나라로, 군국주의 일본을 민주주의 일본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사실상의 일본 총독이 됐다.

역사는 아직도 맥아더가 필요했다. 그를 역사의 무대로 다시 끌어 올린 것은 북한의 김일성과 마오쩌둥, 스탈린이었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세웠다. 노장은 신중했다. 개전 초기 서울과 한강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적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놓을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두 달 반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렸다. 미국은 한국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으나 맥아더는 치밀한 반격 작전을 세웠고, 반대하는 미 정부와 합동참모본부를 설득했다. 인천은 그가 수십년간 쌓아 놓은 군인의 명예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 사지(死地)가 될 수 있었다. 결론은 미군의 전설 맥아더의 판단이 옳았다는 점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전사(戰史)의 새로운 금자탑이 됐다.

그렇지만 이 순간부터 맥아더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무도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설의 명장의 말은 곧 신앙이 됐다. 그 누구도 그에게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심지어 트루먼 대통령도 맥아더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군의 전설은 정치를 몰랐다. 전쟁에 이기는 법만 알았다. 또한 중공군을 무시했다. 마오는 전쟁과 정치를 잘 알았다. 중공군 참전 징후가 속출하고 실제 참전했는데도 그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종전할 것이라는 희망 메시지를 남발했다,

결국 세계 최강 미군은 소총 한 자루 든 마적같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참패를 당하며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 만주 폭격과 대만의 장제스 군대를 동원하자는 맥아더의 주장을 싫어했던 워싱턴의 노련한 정치인들은 그의 해임을 전격 단행했다.

하지만 전설은 죽지 않았다. 미 국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한 맥아더는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맥아더는 아직도 이 명언과 함께 역사 속에 살아있다.

전설적인 노병 맥아더가 한국전쟁에서 무너진 것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신화에서 멈추지 못하고 자만한 탓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중공은 인도를 통해 참전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계속 보냈지만 맥아더는 이를 잡음으로 무시했다. 또한 누구도 전설 맥아더의 오판을 막지 못했다. 맥아더의 오판은 견제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됐고, 이는 비극이 됐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통일된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0년이 거의 저물어 간다. 정국은 올해가 시작된 지난 1월보다 더 시계제로다. 검찰 수사가 자신들과 다르면 검찰개혁을, 판사의 판결이 다르면 사법개혁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존재한다. 열렬 여권 지지층은 41% 선출 권력의 우월성을 과신한 나머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칙과 3권 분립이라는 헌법 가치는 고려 대상이 아닌 듯하다. 미국의 전설 맥아더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역사의 마지막 무대에서 쓸쓸히 내려 왔다는 역사의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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