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2021년 새해에는 ‘내일’이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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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2021년 새해에는 ‘내일’이 있길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1.01.01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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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황제는 어제를 원했고, 당신은 오늘을 원하지. 하지만 나는 내일을 원해."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 나오는 대사다. 극중 황제는 거짓과 욕망이 없는 사회, 모든 사람의 정신이 연결돼 선의만이 가득한 사회를 원한다. 하지만 주인공인 를르슈는 황제에게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그것은 누군가와 다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은 누구든 욕망과 소망이 있기에 거짓과 위선을 행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된 선의라는 것 자체가 악의가 될 수 있고, 소망이 없는 사회는 '어제'에 머문 죽어버린 사회라는 논리를 펼치면서 황제를 제압한다. 

황제가 죽었지만 그의 후계자는 핵무기를 내세운 공포정치로 '오늘'의 평화를 유지하려 한다. 를르슈는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쁠 수 있지 않느냐'는 후계자의 질문에 "비록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좋아진다.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한다. 이후 를르슈는 의도적으로 독재자가 되고 사람들에게 공포정치의 끝을 보여준 뒤 스스로를 희생하며 세계에 진정한 '내일'을 선사, 자신의 레퀴엠을 완성한다.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는 세계를 부수고, 세계를 창조한다"였다. 

90년대·00년대 일본 심야 애니메이션에는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됐고,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코드 기아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애니메이션이 첫 방영된 2006년은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에서 벗어나 경제 회복기에 진입한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경제 회복은 자민당 차원의 강력한 구조개혁에 따른 혹독한 구조조정의 산물이었고, 결과적으로 빈부격차 심화라는 큰 부작용을 야기했다. 특히 청년층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크게 확대됐으며, 매년 사상 최저 출산율을 경신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고이즈미 내각은 2004년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견하고, 2005년 신헌법 초안을 공개했으며, 급기야 2006년 들어선 아베 1기 내각은 '전쟁 포기'를 명시한 평화헌법 제9조 개정을 공식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에 이른다.

공교롭게도 자민당은 코드 기아스가 방영된 직후 치러진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했고, 아베 신조는 그해 9월 사의를 표명했다. 이어 코드 기아스가 종영되고 이듬해인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일본 헌정 사상 단일 정당 최고 의석을 확보하며 54년 만에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뤘다. 애니메이션에서 엿보인 시대적 요구가 선거에서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불과 3년여 만에 자민당에게 다시 정권을 내줬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몰락의 이유는 대외적으로는 지나친 반미, 중국과의 굴욕적 외교, 대내적으로는 자녀 수당 지급·공립고교 전면 무상화 등 선거 공약 포기, 무기수출 완화·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 평화 규정 삭제 등 우클릭이 꼽힌다. '어제'와 '오늘'에 매몰돼 미래지향적 정책을 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대가였다.

2020년은 '내일'을 꿈꾸기 어려운 한해였다. 지속된 경기 침체와 소득주도성장의 실패(최저임금 공약 포기로 사실상 실패다)에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며 많은 국민들이 입고 먹는 욕구를 채우는 데에 곤욕을 치렀고, 전국적인 집값·전셋값 폭등 현상으로 사는 문제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일자리와 내 집을 구하지 못해 '취포'·'결포'를 택하는 청년들이 늘었고, 출산율은 1981년 통계 집계 이후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갈 곳은 부동산과 주식 시장뿐이었다. 어떻게든 '내일'을 찾으려는 발버둥이었다.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사회 환경을 조성해야 할 정치인과 경제인들은 '어제'와 '오늘'에 집중하느라 국민을 외면했다. 국민들은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데 여야는 친미·중·일 대 반미·중·일, 검찰개혁 등 이념과 철학에 대한 낡은 설전에 집중했고, 자신들의 '정의'가 진정한 정의고 선의라며 갈라치기에 주력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더불어민주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버렸고, 국민의힘은 경제3법 저지를 포기했다. 민심 위에 표 계산이 있었다. 재벌은 오너일가 2·3·4세로의 승계 명분으로 팬데믹을 적극 활용했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직원들에게 희망퇴직과 임금 동결을 강요한 임원들은 더 많은 수당을 챙겼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국민들은 당장 '오늘'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왜 개업을 했을까', '그때 왜 이 회사에 들어왔을까', '그때 왜 집을 사지 않았을까', '그때 왜 저기에 표를 던졌을까', '그때 왜 그곳에 가서 병에 걸렸을까' 자신의 '어제'에 대한 자책과 후회를 하면서. 그렇게 '어제'를 바라보며 '오늘'만 살다 보니,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내일'이, 새해가 찾아왔다. 2021년에는 '내일'이 있을까. 아니다. '내일'을 원해야 한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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