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새해 첫날, 지리산 바래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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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새해 첫날, 지리산 바래봉에서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21.01.05 10: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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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겨울산에서 만난 아름다운 세상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바래봉 정상 표지석.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일출 행사나 단체 기념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정상데크는 폐쇄됐다 ⓒ 최기영
바래봉 정상 표지석.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일출 행사나 단체 기념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정상데크는 폐쇄됐다 ⓒ 최기영

2021년이 밝았다.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우리는 모두 너무도 고통스럽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고 1년이 그렇게 지나고 말았다. 

등산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라면 새해 첫날에는 의무감처럼 해돋이 명소를 골라 새벽 댓바람으로 산을 오르곤 한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전국의 해돋이 명소들이 모두 폐쇄됐고, 국립공원 산들도 아침 7시부터 탐방객의 입장을 허용했다. 해돋이는 볼 수 없더라도 새해 첫날에 명산의 기운을 받고 나서 한 해를 시작하고 싶었다. 특히 매서운 세밑 한파에 충청과 호남 지역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소식에 설레는 마음으로 연휴를 기다렸다. 

딸아이는 올해 고3이 된다. 며칠 전 기말시험을 끝낸 아이에게 좋은 산의 기운을 받아 대입 준비를 해보자며 새해 첫 산행을 함께 하자고 했다. 둘은 짐을 챙겨 어머니가 계시는 남원으로 향했다. 어머니에게도 우리와 함께 등산하자고 했더니 선뜻 힘들지 않은 곳이면 천천히 따라가 보겠다고 하셨다. 몇 년 전만 해도 나와 함께 소백산이며 북한산 등을 함께 오르기도 하셨지만, 최근에는 허리 병으로 고생을 하시면서 등산은 아예 포기하고 지내셨는데 어머니는 아들과 손녀와 함께 산을 오르고 싶어 하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지리산 바래봉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지난해 국립공원공단이 추천하는 우리나라 해맞이 명소는 지리산 천왕봉과 바래봉, 설악산 대청봉, 북한산 백운대, 태백산과 함백산 등 여섯 곳이었다. 그중에서 바래봉(1167m)은 남원시 운봉읍 용산마을에서 산판길(임도)을 따라 두어 시간을 오르면 초보자도 비교적 수월하게 정상에 닿을 수 있다. 비교적 쉽고 짧은 길이지만 바래봉에서 바라본 거대한 지리산의 모습은 수많은 지리산 산봉우리 중에서도 최고의 절경으로 꼽는다. 

용산마을에서 바래봉으로 오르는 길. 비교적 수월한 산판길(임도)을 따라 오르면 초보자도 두어 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 최기영
용산마을에서 바래봉으로 오르는 길. 비교적 수월한 산판길(임도)을 따라 오르면 초보자도 두어 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 최기영

용산마을에 도착하니 국립공원공단 직원들이 산길 초입을 막고 있었다. 아침 7시가 되니 입장을 허용했고 우리의 산행도 시작됐다. 길이 비교적 편안하다고는 하지만 차가운 산 공기에 눈이 수북하게 쌓인 산길을 걷기란 어머니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천천히 나를 따라 오르셨다. 

드디어 임도가 끝나며 바래봉 삼거리에 도착하니 온통 백색의 은빛 솜털 옷을 입고 있는 지리산의 자태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그야말로 설국이었고 겨울왕국이었다. 잎을 다 떨어뜨렸던 나뭇가지마다 매섭게 불어 닥쳤던 세밑 겨울바람이 새하얀 눈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놓고 있었다. 

눈 덮인 바래봉 삼거리의 모습 ⓒ 최기영
눈 덮인 바래봉 삼거리의 모습 ⓒ 최기영

바래봉 삼거리 근처에서 요기하고 정상을 향해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발우(바리때)는 절에서 승려들이 소지하는 밥그릇을 말하는데 그것을 엎어놓은 것처럼 매끈하게 생겼다고 해서 바래봉이다. 정말 바람을 막아 줄 나무 하나 없이 낮은 초목들만이 둥그스름한 정상 주위를 덮고 있다. 그래서 거침없이 부는 바래봉의 겨울바람은 산꾼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바람을 견디어내며 정상에 오르면 바래봉과 이어진 팔랑치, 부운치, 세동치, 세걸산, 정령치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과 그 뒤로는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바래봉에서 팔랑치까지 이어지는 1.5km의 능선은 봄철 우리나라 철쭉 군락지로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대한 지리산을 이렇듯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지리산 어디에도 없다. 특히 이날은 새하얀 눈이 덮인 지리산의 숱한 봉우리들을 구름이 빠르게 넘나드는 모습에 우리는 매서운 겨울바람의 고통도 잊은 채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지리산의 겨울은 참으로 화려했다. 

바래봉으로 오르며 내려다본 지리산 서북능선의 모습. 구름이 눈 덮인 능선과 봉우리들을 타고 넘는 모습이 장관이다 ⓒ 최기영
바래봉으로 오르며 내려다본 지리산 서북능선의 모습. 구름이 눈 덮인 능선과 봉우리들을 타고 넘는 모습이 장관이다 ⓒ 최기영
전망대에서 정상 부근의 풍경. 승려들이 소지하는 밥그릇인 발우를 엎어 놓은 것처럼 매끈하게 생겼다고 해서 바래봉이다 ⓒ 최기영
전망대에서 정상 부근의 풍경. 승려들이 소지하는 밥그릇인 발우를 엎어 놓은 것처럼 매끈하게 생겼다고 해서 바래봉이다 ⓒ 최기영

정상에는 바래봉 표지석과 함께 주위로 데크가 설치돼 있지만 폐쇄돼 있었다. 신년 일출 행사나 단체 기념촬영을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 했다. 우리 셋도 함께 사진을 찍지 않고 표지석을 알아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잡고 각자의 모습을 찍어주며 새해 첫 정상 인증 사진을 남겼다.

하산 길은 정겨웠다. 바래봉을 내려와 다시 용산마을로 향하는 임도에 들어서자 바람도 잦아들었다. 우리 셋은 여유롭게 지리산의 겨울 풍광을 즐기며 도란도란 산길을 걸었다. 지리산 위로 떠 오르는 새해 첫 태양의 모습을 봤다면 더욱더 좋았겠지만, 눈꽃이 만개했던 지리산세의 모습을 봤으니 올해는 운수대통일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나 역시 어머니의 건강과 딸아이의 대학 합격을 기원하며 지리산 바래봉을 내려왔다. 

정상으로 오르며 팔랑마을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 최기영
정상으로 오르며 팔랑마을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 최기영

겨울산은 생명을 키워내고 결실을 거둔 뒤 모든 것을 내주고 외롭게 그곳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글거리며 세상을 지배했던 태양은 겨울이 되자 힘을 잃었다. 산에는 차가운 바람 소리만 요란하다. 그런데 그곳에 눈이 내리자 거센 바람은 눈꽃을 피우고 태양이 눈꽃을 비추자 영롱한 보석처럼 빛이 난다. 떠났던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돼 다시 그곳을 찾는다. 소외당하고 상처받은 그들이 어우러지며 세상은 그리도 아름답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코로나19의 위세도 더욱더 드세지만, 곧 있으면 백신 접종을 시작하고 치료제도 나온다고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던 기나긴 터널을 지나 이제야 끝이 보이는 것도 같다. 모두의 바람처럼 올해는 반드시 그 고통스러운 터널을 함께 빠져나와 내년 첫날에도 어머니와 딸아이와 함께 산에 올라 지리산에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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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남 2021-01-05 11:42:33
최본부장~~
3대가 산행이라니~~~
넘부럽구 또부럽다!
잘읽었구 사랑하는 엄마와 딸의 건강과 더불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 깃들길바라네...
신축년올핸 코로나의 종료를 기대하며 동반산행이 기다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