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장산의 겨울을 만나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칼럼] 내장산의 겨울을 만나다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21.01.13 08:3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기영의 山戰酒戰〉 하얗게 비우고 내려오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내장산의 주봉인 신선봉의 모습 ⓒ 최기영
내장산의 주봉인 신선봉의 모습 ⓒ 최기영

벽두부터 북극에서 불어 닥친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호남과 제주에 많은 눈이 내렸다. 

전북 지역에 걸쳐 있는 덕유산이 겨울 산으로 유명한 이유는 겨울철 서해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능선에 부딪히며 수시로 눈 구름층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눈구름은 많은 눈을 뿌리고, 차디찬 바람을 타고 다니며 주목과 고사목, 조릿대에 환상적인 상고대를 그려놓는다. 전북 정읍에 있는 내장산에도 유독 눈이 많이 내린다. 열심히 눈구름을 실어 나르는 서해의 습한 대기가 내장산 자락을 만나 탐스러운 함박눈을 뿌려대기 때문이다. 이번 한파에도 두껍게 눈이 덮인 아름다운 내장산의 모습이 소셜미디어나 언론에 등장하며 나를 유혹했다. 

내장산은 서쪽부터 월영봉, 서래봉,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연자봉, 장군봉 등 모두 아홉 개의 봉우리가 말발굽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 있다. 나도 근 10년 전 가을, 아홉 개의 봉우리를 모두 오르는 종주 산행을 해본 적이 있는데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정말 오랜만에 내장산을 찾았다. 수북한 눈이 덮인 산길을 걷는다는 부담 때문에 종주는 포기하고 서래봉부터 신선봉까지 갔다가 내장사로 하산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서래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며 산행을 시작했다. 

서래봉에서 바라본 내장산. 서래봉에 서면 내장산의 봉우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최기영
서래봉에서 바라본 내장산. 서래봉에 서면 내장산의 봉우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최기영

그야말로 하얀 눈이 천지였다. 며칠째 내린 눈은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먼저 그 길을 지났던 사람이 흔적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아마도 산길을 구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온이 오르지 않아 눈은 녹지도 못하고 그대로 솜털처럼 곱고 부드러워 아이젠을 신었음에도 지탱하지 못하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숲속 나무들도 마치 떡살로 빚어 놓은 갖은 무늬의 거대한 눈덩이들을 힘겹게 짊어지고 있었다. 영하 16도까지 떨어진 차디찬 숲속이었지만 산길을 오르며 몸에는 서서히 열기가 차올랐다. 

서래삼거리에 도착하면 서래봉과 불출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나는 눈이 가득 덮여 계단을 구분하기조차 힘든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이날 첫 번째 봉우리였던 서래봉(624m)에 올랐다. 서래봉은 9개의 내장산의 봉우리 가운데 조망이 가장 좋다. 나머지 8개 봉우리와 내장사, 벽련암의 경내, 그리고 정읍시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봉우리 정상에 서니 매서운 칼바람이 내 몸에 흐르던 땀을 금세 얼려버리는 듯했다. 

망해봉에서 바라본 불출봉과 내장저수지의 모습 ⓒ 최기영
망해봉에서 바라본 불출봉과 내장저수지의 모습 ⓒ 최기영
망해봉에서 본 눈 덮인 내장산 자락 그리고 정읍 시내 ⓒ 최기영
망해봉에서 본 눈 덮인 내장산 자락 그리고 정읍 시내 ⓒ 최기영

다시 철계단을 내려와 서래삼거리에서 불출봉(佛出峰, 622m)으로 향했다. 불출봉에 서니 눈 덮인 내장사와 깡깡 얼어있는 내장저수지의 모습이 일품이었다. 불출봉에 안개와 구름이 끼면 그해에 가뭄이 든다는 설이 있는데 다행히도 이날 불출봉은 잡티 하나 없는 맑디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있었다. 

연지봉으로 가는 길에 불출봉과 서래봉 방면으로 바라본 내장산 ⓒ 최기영
연지봉으로 가는 길에 불출봉과 서래봉 방면으로 바라본 내장산 ⓒ 최기영
까치봉의 모습. 까치봉을 오르내리는 것이 이날 코스 중 가장 힘들었다. ⓒ 최기영
까치봉의 모습. 까치봉을 오르내리는 것이 이날 코스 중 가장 힘들었다. ⓒ 최기영

불출봉에서 망해봉(679m) 그리고 연지봉(671m)은 약 30여 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연지봉에서 내장산 제2봉인 까치봉(717m)까지 1.4km 정도 거리인데 이날 코스 중 가장 힘들었다. 몇 개의 봉우리들을 이미 오르내려 힘이 빠진데다가 눈이 잔뜩 덮인 가파른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로프와 철제난간을 있는 힘을 다해 쥐어 잡고 버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곳에 오르면 내장산의 장쾌한 능선과 주봉인 거대한 신선봉이 손에 잡힐 듯 서 있다. 

눈 속에 파묻힌 신선봉 정상 표지석 ⓒ 최기영
눈 속에 파묻힌 신선봉 정상 표지석 ⓒ 최기영
내장산과 어우러진 내장사. 고즈넉하고 호젓한 산사의 모습이다. ⓒ 최기영
내장산과 어우러진 내장사. 고즈넉하고 호젓한 산사의 모습이다. ⓒ 최기영

까치봉에서는 신선봉까지 1.6km 거리다. 좁은 오솔길, 암릉길 등 지루할 틈 없는 아기자기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가파른 언덕배기를 치고 올라가면 신선봉(763m)에 도착한다.  어찌나 눈이 많이 왔던지 정상 표지석이 눈에 잠겨있었다.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쌓인 눈을 다져놨는데도 신선봉 아래 ‘해발 763m’ 라 적힌 글구는 아직도 눈에 파묻혀 있었다. 나 역시 정상 표지석과 함께 인증사진을 찍고서 내장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급경사 길을 내려와 내장사에 닿으니 내장산과 어우러진 산사가 몹시도 고즈넉하고 호젓했다.  

내장산은 화려한 단풍으로 유명하다. 사찰에서부터 시작하는 내장산 단풍터널 그리고 단풍에 물든 호수와 그 위에 떠 있는 우화정의 풍경은 우리나라 가을 풍경의 대명사다. 하지만 단풍터널은 눈꽃 터널이 돼 있었고 맑은 호수에 화려한 그림자를 드리웠던 우화정은 모든 것을 비운 채 하얗게 얼어버린 호수 위에 홀로 서 있는 등대처럼 자태를 뽐냈다. 하얗게 비어 있는 겨울의 내장산도 가을 단풍을 입은 모습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물소리 바람소리〉 中


화려함을 모두 비우고 하얀 설원에 홀로 떠 있는 우화정의 모습 ⓒ 최기영
화려함을 모두 비우고 하얀 설원에 홀로 떠 있는 우화정의 모습 ⓒ 최기영

'산 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해서 내장산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장산의 겨울은 그 화려하고 무궁무진한 보물을 하얗게 비워버린 채 딱따구리가 나무를 때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창남 2021-01-13 11:12:04
최본부장의 용맹스럽고 아름다운품성이 마음속에 무궁무진하겠지~~~
언제나 영원한 산꾼으로 우리들곁에서 주객으로 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