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되짚기⑩] 이성헌 “YS 총선 참여, 6·10항쟁 성공의 동력”
[6월항쟁 되짚기⑩] 이성헌 “YS 총선 참여, 6·10항쟁 성공의 동력”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1.01.25 2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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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헌 전 국회의원(국민의힘)
○“국민의 힘 믿은 YS 총선 참여야말로 기폭제”
○“1천만명 개헌 서명 운동 전국적 관심 일으켜”
○“박종철 쪽지, 김덕룡 통해 YS가 먼저 받아”
○“87년, YS가 국본 참여에 소극적? 사실 달라”
○“통일민주당 활약이 6월 항쟁 성공 결정타 돼”
○“민주화 정신과 먼 文정권 태어나지 말았어야”
○“전대협 前 연합조직 만들었지만 주사파 변질”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국민의힘 이성헌 전 의원은 83년 2학기부터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했다. 이후 민추협, 1천만 개헌서명운동, 국본 활동 등을 통해 6월 항쟁이 성공하는데 일조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의힘 이성헌 전 의원은 83년 2학기부터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했다. 이후 민추협, 1천만 개헌서명운동, 국본 활동 등을 통해 6월 항쟁이 성공하는데 일조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6월항쟁 되짚기 10번째 주인공 이성헌 전 국회의원(국민의힘) = △83년 2학기 연세대 총학생회 회장 △전국대학생협의회(전대협) 전 연합조직 시초 성격인 전국학교연합 첫 대회 개최 △85년 12대 총선 신민당 지원 △3월부터 민주화추진협의회·민주산악회 활동 △86년 1천만 개헌서명 운동 △87년 ‘박종철 사건’ 폭로 논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간사

○인터뷰 : 지난달 18일 서대문구 사무실
○이성헌이 되짚은 6월 항쟁, 성공의 주역 YS

 

# 83년 연세대
학생운동을 하기까지


1980년 이듬해 이성헌(편의상 존칭은 생략)은 대학교 신입생이 됐다. 1958년 개띠,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 완풍대군 이원계(태조 이성계의 이복형) 후손이다. 어린 시절 서울로 상경해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십 년 넘게 떡 방앗간 일을 하셨어요. 정말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 봤는데 형편은 나아지지 않더라고요.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걸까. 굉장히 힘들고 어렵게 산다는 것에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느꼈지요.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명지고등학교 다닐 무렵.

시대는 유신 체제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대통령의 유고 소식이 들렸다. 79년 10·26사태였다. 이듬해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민주화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잠시였다. 전두환 신군부가 80년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했다. 김영삼(YS)은 가택연금을, 김대중(DJ)은 구속됐다. 국회도 폐쇄됐다.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그 시절 인권유린을 가장 처절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성헌 전 의원은 81년 연세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다.ⓒ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성헌)
이성헌 전 의원은 81년 연세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다. 사진 가운데 웃고 있는 얼굴이 이성헌 전 의원의 학생 때 모습이다.ⓒ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성헌)

 

학교는 연세대.

“81년은 군부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 뒤였어요. 대학가도 공포 정치로 뒤덮였지요. 총학생회 조직을 없앤 신군부는 학도호국단을 설치했어요. 학교 안에 사법 경찰들이 들어와 있었지요. 시위가 일어날 것 같으면 어디서 모르게 튀어나와 무차별 구타하고 잡아갔어요. 최루탄을 무지막지하게 쏴대면 학교 내부는 금세 연기로 범벅이 됐죠. 수업을 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신입생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와 울분이 쌓여갔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학교 내부에 경찰들이 상주해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학생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인식이 있었어요.”

이성헌은 그 뒤 반독재 운동에 뛰어들었다.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사회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죠.”

- 서클 활동은요?

“‘인간문제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일종의 이념서클이었어요.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사회 문제 인식의 깊이를 더해갔던 기억이 나요.”

83년 2학기 때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됐다.

- 엄밀히는 학도호국단 체제였는데요.

“전두환이 강제로 학도호국단을 만들었잖아요. 그렇지만 학원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자율화 싸움이 일어났어요. 민주화를 위한 학생회 부활을 준비했던 거지요.”

- 변화가 좀 있었나요.

“82년까지는 학도호국단이 존치했지만, 83년부터는 성격이 달라졌어요. 선거로 뽑게 된 거죠. 문교부에서 공식 허용한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학교 내부에서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단계까지 된 거예요.”

- 총학 선거에 출마하게 된 이유는요.

“2학년을 마쳤을 땐데, 서클 선배의 권유가 있었어요. ‘총학을 확보해나감으로써 학생 주권을 되찾자.’ 선거는 대의원 투표로 진행됐어요. 학과별로 20명당 1명꼴로 대의원을 선정했거든요. 1600여 명가량 됐는데 참여율도 높았어요. 58.6%로 당선됐지요.”
 

이성헌 전 의원은 연세대 총학생회장 시절 50여차례의 시위를 주도해 제적됐다 간신히 졸업했다고 전했다.사진은 대학생 당시 학생운동하던 이성헌 전 의원 활동 모습ⓒ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성헌)
이성헌 전 의원은 연세대 총학생회장 시절 50여차례의 시위를 주도해 제적됐다 간신히 졸업했다고 전했다.사진은 대학생 당시 학생운동하던 이성헌 전 의원 활동 모습ⓒ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성헌)

 

 

# 84년 상도동
YS와의 첫 인연


84년 5월 이성헌은 YS를 찾아갔다. 5·18 추모를 앞두고 연사로 초빙하기 위해서였다.

“주제는 ‘한국 민주주의 과제’였어요. 책임 있는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5·18이 어떻게 일어났고 과제는 무엇인지를 짚어보자는 취지였지요.”

더 들어가면 학생운동의 대중 행보와도 연관이 있었다.

“학원 자율화가 부분적으로 이뤄지면서 학내 있던 경찰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다 보니 시위가 굉장히 많이 일어났어요. 그러다 보니 학생운동이 고립되는 분위기가 된 거예요. 이에 유력 정치인들의 강연을 통해 대중 친화력을 높이려고 한 거지요. 야권에서는 YS를, 여권에서는 김상협 전 국무총리를 생각했어요. 김 전 총리는 와병 중이라며 거절해오더라고요. DJ는 미국 망명 중이라 초빙할 수가 없었고요.”

수락한 이는 YS.

- 만났을 당시 어떤 대화가 오갔나요.

“YS를 찾아가 설득했어요.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과정들을 학생들한테 정확히 설명해달라.’ 그런데 YS가 이걸 걱정하는 거예요.”

- 어떤 것을요?

“학생들의 신변안전요. ‘내가 학교에 들어가 강연을 하면 경찰들이 다시 학교에 투입될 거고 당신들은 감옥에 가고 말 거요.’ 우리들의 안위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해줬어요. ‘총재님 우리는 개의치 않습니다. 걱정은 말고 학교로 와주십시오.’ YS가 결국 수락을 해줬지요.”

5월 17일. 연세대 노천극장에는 만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했다. 그런데 YS가 나타나지 않았다.

- 놀랐겠네요.

“굉장히 당혹스러웠어요. 부랴부랴 YS를 찾아갔지요. ‘와주십시오. 오셔야 합니다.’, ‘정말 안타깝지만 내가 갈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네. 학생들한테 얘기 좀 잘 해주게나. 여러분들의 움직임이 민주주의를 회생시키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 왜 못 온 건가요.

“사실 YS는 다음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을 앞두고 있었어요. 경찰이 못 나가도록 가택연금을 한 거예요.”

 

# 85년, 신민당
역사의 획 그은 12대 총선


6월 항쟁 되짚기 10번째 주인공으로 이성헌 전 국회의원(국민의힘)을 만났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6월 항쟁 되짚기 10번째 주인공으로 이성헌 전 국회의원(국민의힘)을 만났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와의 인연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측근인 김덕룡 비서실장으로부터 가끔 연락이 왔다.

“동경에 있던 <뉴욕타임스> 기자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취재하러 오면 나도 불러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해주곤 했어요.”

85년 2월 12일은 12대 총선이 있던 날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YS는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다. 쟁점은 총선에 참여할 것이냐 여부였다.

“굉장한 논란이 있었어요. 분위기가 어땠냐면 재야에서는 총선 참여를 반대했거든요. 박형규·문익환 목사 등은 제도권 투쟁을 거부했어요. 제대로 투쟁하기 어렵다고 본 거죠.”

YS는 달랐다.

“지도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총선 참여를 주장했던 사람이 YS였어요. ‘민주주의란 것이 선거를 통해 이뤄지는 거다. ’,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선거에서 국민의 힘을 얻어 돌풍을 일으켜야 한다.’ 처음엔 저항을 받았어요. 설득 끝에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됐지요.”

이성헌이 4학년일 때다. 신민당 주축인 민추협의 상도동(YS계파) 인사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창당 과정상의 분위기도 잘 아는 듯했다.

“DJ도 동교동계의 신민당 참여를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오히려 관제 야당인 민한당을 지지했고요.”

- 어느 면에서 관제 야당이었나요.

“전두환 정권에서의 민주주의는 위장된 민주주의였거든요. 전체주의 체제를 숨기려고 어용 야당을 뒀어요. 저항하던 야당 인사들은 정치 활동 규제법으로 묶어놓고, 보여주기식으로 소수만 풀어 선거에 참여토록 했어요. 공천도 안기부에서 작업했고요. 국회 내부에서는 집권당(민정당)을 위한 거수기 역할이 주였어요.”

85년 1월 18일 신민당 창당.

- 돌풍을 일으켰어요.

“67석을 얻고 단숨에 제1야당이 됐어요. 민한당을 공중분해시킬 정도였지요.”

- 선거 때는 뭘 했나요.

“학우들과 함께 신민당의 종로 선거를 지원했어요. 이민우 후보가 출마했지요. 당시 연세가 꽤 많았는데 유세를 하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거예요. 경희궁 터 근처가 예전에는 서울고등학교였거든요. 지금의 역사박물관 자리가 옛날엔 공터였어요. 사람들이 모여서는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어요. 민주주의에 대한 범상치 않은 어마어마한 기운을 확인했달까….”

-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선거 참여에 소극적이었어요. 차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가능성을 보기 시작하면서는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 거죠. 유인물 돌리고 가두 시위도 많이 했어요. ‘전두환 독재 타도’가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었고요.”

- 실제 성공하면서 보람이 컸을 것 같아요.

“그렇죠. 신민당의 2·12 총선 참여가 어찌 보면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해요.”

- 왜 획을 그었다고 보나요.

“만약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보이콧했다면 어땠을까요. 재야단체와 군부세력 간의 싸움으로 갔다면 직선제 개헌도 쟁취하지 못했을 겁니다. YS가 국민의 힘을 믿고 선거에서 승리했기에 가능했던 거죠.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에 목말라하는 민심이 확인되면서 야당과 재야, 학생운동 등 저항세력도 자신감을 얻게 됐던 거예요. 6월항쟁이 성공하는데 실질적 동력이 돼줬다고 단언합니다. 그래서 나는 선거를 통해 정권을 찾아와야 한다고 했던 YS 결정이 현대사를 바꾼 대단한 결정이었다고 봐요”

 

# 86년 방방곡곡
1천만 개헌서명 운동


YS를 따라 민추협과 민산 활동을 하던 시절의 이성헌 전 의원ⓒ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성헌)
YS를 따라 민추협과 민산 활동을 하던 시절의 이성헌 전 의원ⓒ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성헌)

 

85년 졸업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학교에서 50여 차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이성헌은 경찰 조사에, 무기정학까지 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간신히 풀려났으니 천만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진로를 고민하던 차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는 자기 발에 흙을 묻힐 수 있는 사람이오. 이 동지, 나와 같이 민주화 일을 합시다.”

YS 제안을 받은 이성헌은 고민, 고민했다.

“그 양반 밑에서 일을 하는 게 좋겠다. 학생운동을 위해서는 기성 정치인들과 힘을 합해 외연을 확장 시켜야 할 사람도 필요하다.”

“무슨 소리를. 기성 정치판에 왜 들어가냐.”

선배들과 의논하니 찬반으로 나뉘었다.

고민 끝에 이성헌은 YS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학교 졸업 후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의식화하는 작업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성헌은 대중 간부였다. 총학생회 출신이다보니 얼굴이 알려졌다. 위장 취업하기는 어려웠다.

“85년 3월 1일부터 상도동 비서진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어요.”

-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

“김덕룡 비서실장 밑에서 재야 담당 일을 했어요.”

민추협 기관지인 <민주통신>과 민주산악회보인 <자유의 종> 편집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

- 당시 얘기 좀 해주죠.

“<민주통신>을 밤새 만들었는데 3박4일 정도는 집에도 못 들어갔어요. 인쇄하다 걸리면 잡아가니까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분들 통해 몰래 했어요. 차에 싣고 전국을 다니면서 집회 현장에 나눠주고 방방곡곡 뿌렸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숙직도 하고, 한 달 중 보름 정도는 집에도 못 들어갔어요. 그렇지만 즐거웠어요. 민주주의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자랑스러웠지요. (결혼한 터라) 집에서는 쫓겨날 뻔도 했지만요.”

이성헌이 YS가 선언한 1천만 개헌서명 운동에 뛰어들었던 때다. 86년 2월 12일은 2·12 12대 총선이 있은 지 1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YS는 1천만 개헌 서명 운동을 시작한다는 성명서를 알렸다. 재야·학생들도 결합하며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위협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86년 4월 30일 신민당 대표를 맡고 있던 이민우와의 회담을 통해 내각제로의 개헌을 시사했다. 12월 24일 이민우는 삼양동 자택에서 민주주의 내용이 담긴 7개 항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전두환 정권이 실천한다면 내각제에 합의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민우 파동’이었다.

“이민우 총재를 보좌한 홍사덕 비서실장이 낸 절충안이었어요. 사실상 집권당인 민정당과 타협을 한 셈이지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한 YS의 말을 듣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간 거예요.”

더 말할듯하다 이성헌은 생략했다.

“결국 이민우 총재는 고립됐고 YS는 DJ와 당을 깨고 나갔지요.”

 

# 87년 통일민주당
박종철 사건 폭로 내막


이성헌 전 의원이 고 박종철 열사에 대한 폭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성헌 전 의원이 고 박종철 열사에 대한 폭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는 신당을 창당했다. 87년 4월 13일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서 통일민주당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 세력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고,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날이었다.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된 YS는 전열을 가다듬었다. 본격적으로 직선제 개헌의 불을 댕겼다.

역사는 87년 6월항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故 박종철 열사에 관한 얘기였다.

“언론에는 안 나왔습니다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맨 처음 전달된 쪽은 우리였어요.”

- 네?

“옥중에서 처음 외부로 알린 인물이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인 이부영 의장(열린우리당 의장 역임)이잖아요. 김덕룡 비서실장과 두 분이 친구거든요. 이부영 의장이 편지를 써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조작 사건’을 김덕룡 비서실장한테 보낸 거예요. 이후 YS에게 전달됐고요.”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돼 있던 이부영은 수사관들이 주고받던 말을 통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졌으며 정권에서 이를 은폐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추가 취재를 통해 사건의 내막을 정리한 그는 자신에게 감화된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비밀서신을 써 외부에 전했다. 이부영의 <다시 저 들판에서>에 따르면 우촌 김정남에게 서신 3통이 전달됐다고 나와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된 데 이어 최종적으로는 광주항쟁 7주년 미사가 열린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폭로됐다.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사제단 성명을 읽어내려가며 알려진 것이다.

여기까지가 세상에 알려진 내용이었다. 그 과정 중 김덕룡을 통해 YS에게 먼저 전달됐다는 숨은 뒷이야기가 이성헌을 통해 새롭게 전해진 것이다.

- YS 쪽에서는 왜 처음 폭로하지 않은 건가요.

“정치인이 폭로하게 되면 의미가 왜곡될 수가 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발표하게 한 거고요.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요. 이부영 의장이 보낸 편지가 우리 쪽에 전달됐을 때 나 역시 가까웠던 언론사 사람들과 상의도 했었어요. ‘아무래도 종교계에서 발표하는 것이 낫겠다.’  그래야 더 신뢰성 있게 받아들여질 거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지요.”

 

# 87년 국본
“YS가 소극? 사실 아냐”


시사오늘은 앞으로 시민사회의 힘으로 군부 퇴진 및 직선제 쟁취를 이뤄낸 6월 항쟁의 주역들을 만나 당시의 의미와 평가, 과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시사오늘은 앞으로 시민사회의 힘으로 군부 퇴진 및 직선제 쟁취를 이뤄낸 6월 항쟁의 주역들을 만나 당시의 의미와 평가, 과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박종철 사건’을 접한 전국은 들끓었다. 반독재 투쟁의 기폭제가 돼 엄청난 폭발력을 일으켰다. 1987년 5월 27일에는 범대중 연합전선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만들어졌다.

- 국본에서 활동했잖아요.

“통일민주당 파견으로, 김도연 선배가 국본 위원이고, 나는 간사를 맡았어요. 국본이라는 게 정당, 재야, 시민단체, 학생운동권, 종교계 등을 아우르는 반독재 대열이었거든요. 민통련의 이재오·이해찬,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 등이 다 국본에서 실무진을 담당했어요. 종교계만해도 종로5가의 KNCC 한국기독교협회 김동완 목사부터 재야의 문익환·박형규 목사, 천주교에서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던 정의구현사제단, 천도교, 원불교 등도 함께 했고요.”

- 일각에서는 YS는 국본 참여에 소극적이었다고 하던데 맞나요?

“아니에요.”

단호하게 말했다. 국본 내부의 분위기부터 전했다.

“노선상 온건파, 강경파가 있었다면 정치적으로는 친YS, 친DJ로 나뉘어 팽팽한 기싸움이 있었어요. 소위 말해 재야는 ‘비판적 지지자들’이라고 해서 친DJ들이 많았어요. DJ는 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재판받고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탄원서를 쓴 뒤 망명했다가 귀국하면서 학생운동과 재야 쪽에 자기 사람을 보내 우군화 작업을 해왔거든요. 지금의 김한정 의원(더불어민주당)이 학생운동권 내부에서 비판적 지지를 이끌었던 이들 중 한 명이었고요.”

- YS에 대한 지지는 어땠나요.

“대중적 지지로는 YS가 많았지만, 재야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어요. 국본 내에서는 인명진 목사나 이미경 전 의원(더불어민주당) 등이 친YS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성헌은 YS야말로 6월항쟁이 성공하기까지 오랜 시간 민주화를 이뤄낸 주역이라고 강조했다.

“YS는 국내를 떠나지 않고 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어요. 6월항쟁이 성공하기까지 오랜 시간 이 나라를 지키며 싸워 이겨낸 진짜 주역이지요. 81년에는 민주산악회를 만들어 민주주의 운동의 불씨를 살려냈고, 83년  23일간의 단식 투쟁 끝에 5·18을 알리고 84년 야권 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마중물이 돼줬잖아요. 또 그 힘으로 85년 신민당 돌풍과 86년 1천만 개헌서명 운동까지…. 중요한 분기점마다 분열된 반독재 세력의 힘을 모으는 구심점 같은 역할을 해준 분이에요. 하지만 재야에서는 앞서 말한 연유로 친DJ 인사들이 많았던 것이죠.”

재야 내에서 과소평가된 것이 불합리하다고 보는 눈치였다. 암튼 이런 배경 때문에 YS가 국본 참여에 소극적이었다는 얘기들은 호도돼 잘 못 전해져온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대화 중 YS 단식도 언급돼 이 점을 물었다.

- 학생들은 잘 몰랐지 않나요.

“학생들은 기성 정치에 대해 거리를 두는 쪽이었어요. YS 단식 투쟁이 일어났을 때도 처음엔 몰랐지요. 그렇지만 서서히 알려지면서는 재야단체 사람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줬던 것으로 기억해요. YS에 대한 신뢰를 키우는 결과가 된 거죠. 결과적으로는 YS가 확실한 리더십을 확보하게 된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 6월 항쟁
통일민주당의 활약


이성헌 전 의원은 YS가 이끈 통일민주당이야말로 6월 항정 성공의 결정타가 돼줬다고 평가했다. 사진은 YS 우측이 이성헌 전 의원ⓒ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성헌)
이성헌 전 의원은 YS가 이끈 통일민주당이야말로 6월 항정 성공의 결정타가 돼줬다고 평가했다. 사진은 YS 우측이 이성헌 전 의원ⓒ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성헌)

 

이성헌이 주목한 또 하나는 통일민주당의 역할론이었다.

“YS가 이끈 통일민주당이야말로 6월항쟁 성공의 결정타가 돼줬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의 활동들이야말로 6·29선언을 받아내기까지 결정적 동력이 돼줬다고 봅니다.”

- 부연한다면요?

“통일민주당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직선제 개헌의 필요성을 알렸잖아요. 국본이 만들어지고 시민 참여를 이끈 게 통일민주당이었어요. 형식상 국본도 같이 한 걸로 돼있지만 실제 중심은 통일민주당에서 대부분 한 거예요. 필요한 비용도 댔고요.”

-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6·29 항복을 받아낸 거요. 국민이 궐기해 권력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겁니다. 대통령 직선제가 되면서 우리나라가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문민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어요.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거지요.”

- 계승해야 할 점은요.

“민주주의지요. 문재인 정권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거꾸로 가고 있잖아요. 전체주의로 가고 있는 거예요.”

- 87 정신에 어긋난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지요. 87체제라는 것이 직선제 개헌을 통해 만들어진 거잖아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고 언론의 자유가 확보되면서 성숙한 민주주의 과정을 밟게 된 거고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선거라는 합법적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지만, 민주주의 기본인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있잖아요.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인데 윤석열 검찰총장을 자기 하수인 부리려듯 하다 안 되니 일 년 넘게 추미애 법무부 장관 통해 찍어누르려 했고 말이죠. 민주주의에서 이런 게 어딨어요. 역행하는 거죠. 울산시장 부정선거 의혹에, 잘나가던 원전 가동을 중단시키지를 않나, 우리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잖아요. 자기들 권력 연장에만 신경 쓰지 나라가 어떻게 돼든 상관하지 않잖아요. ‘박원순 사건’, ‘윤미향 사건’ 등에도 나몰라라, 북한에는 저자세,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이에요.”

- 6월항쟁의 역사적 과제로 보는 것은요.

“노동 개혁요. 87 이후 노동계가 너무 일시에 확 커버렸어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이 돼버렸잖아요.”

 

# 청송대 그때 
전대협의 시초가 될 줄은….


이성헌 전 의원은 학생운동이 86년 이후부터 주사파 이념 성향의 운동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성헌 전 의원은 학생운동이 86년 이후부터 주사파 이념 성향의 운동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화제를 돌렸다. 이성헌은 YS 문민정부 때인 94년부터 3년간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냈다. 한차례 국회의원 선거 낙선 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서대문구갑에 재도전해 당선됐다. 당시 상대는 연세대학교 후배인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후보였다. 둘은 선거 때마다 희비가 교차됐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같은 선거구에서 우 후보에게 밀려 낙선을,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우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21대 총선까지 민주당 기세가 강해지면서 국회 입성을 못하고 있다.

- 학교 때 우 의원과는 어땠나요.

“내가 학생운동할 때는 우상호 의원은 활동하지 않았어요. 우 의원은 1학년 마치고 군대에 갔으니까요. 우리하고 같이 학생운동한 것이 아니에요.”

-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중 알만한 분은요.

“총학생회장 출신 중에는 85년의 송영길(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86년의 정태근(전 국회의원) 등이 있지요. 송영길 경우 내 다음이었는데 우리가 다 도와줘서 승리할 수 있었지요.”

87년 연대 총학생회장은 우상호.

“그런데 우리 때와 달리 이념에 치우치게 됐달까…. 학생운동이란 게 86년을 기점으로 나뉘거든요. 이전과 이후가 차이가 좀 있어요.”

- 어떻게요?

“86년 이전의 학생운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한 계급투쟁을 공부했지만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주였어요. 그에 반해 86년 이후는 주체사상파가 주류가 된 거예요. 이념 노선으로 치우친 거죠. 운동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 대목에서 이성헌은 아이러니한 얘기 하나를 꺼냈다.

“학생회장 하면서 여름 청송캠프를 했었거든요. 학교 뒤 명소인 청송대의 이름을 따서 만든 캠프였지요. 그때 처음으로 기획한 것이 있었어요.”

- 뭔가요?

“전국의 46개 대학들과 한데 모여 공부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거예요. 그 안에는 명사들의 특강도 있었어요. 앞서 YS 등 정치인들의 강연을 기획했던 것처럼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던 재야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고립돼있던 학생운동을 활성화시키려고 했지요.”

- 어떤 분들이 초대됐나요.

“문익환 목사부터 성래운 연세대 교수, 함석헌 선생 등요. 학생들에게는 감동의 도가니였어요.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지요. 해직 인사들을 학교로 다시 모셔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전국 학교 간 연합조직이 가능하다는 것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 계기였어요. 연합 집회가 만들어지고 연세대가 데모의 본산이 돼버렸지요.”

- 이후 전대협(전국대학생협의회)이 만들어진거네요.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46개 대학이 모인 그때가 사실상 시초적 성격이 되고 만 거예요. 당초 취지와 달리 주사파 운동의 전초가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지요.”

그는 반독재 투쟁 노선의 86년 전과 달리 그 이후부터 학생운동 성격이 주사파 이념으로 변질돼 갔다고 보는 듯했다. 6월 항쟁이 고조되면서 결성된 전대협은 성공의 주역과 운동의 변질 논란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

“독재 정권이 지배하던 굉장히 어두운 시기에 나름대로 어떤 큰 결심을 하고 뛰어든 학생운동일 텐데 그런 식으로 변질된 것에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이성헌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쳤다. 6월항쟁을 거쳐 사회의 주류로 떠올랐으나 새로운 기득권이 됐다고 비판받는 586 운동권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목소리와 표정도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체나이에서 오는 젊음보단 젊은 생각을 가졌다고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 앞으로 계획은요.

“YS처럼 국민의 힘을 믿고 정진해야지요. 당협위원장으로 있는 이 서대문구갑의 자리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할 겁니다.”

민자당이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을 거쳐 미래통합당에 이어 국민의힘으로 오기까지 이성헌은 당을 지켜온 인물이다. 한데든 찬데든 묵묵히 지켜왔음에 자긍심을 갖는 듯했다. 힘들어도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있기에 사회가 유지되고 정통이 이어지는 것일 게다. 버팀목 같은 역할. 그런 존재인 듯.

P.S.

요약하면 이번 87년 6·10항쟁 되짚기 10번째는 국민의 힘을 믿은 YS야말로 성공의 마중물이 돼줬다고 평가한 학생운동 출신 정치가의 회상기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 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이명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알린 특종기자의 투쟁기(이부영),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성공의 결정타(이재오)에 이어서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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