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국민에겐 자화자찬보다 위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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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국민에겐 자화자찬보다 위로가 필요하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1.02.02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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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률 -1% 전망…자화자찬보다 국민의 아픔 먼저 신경쓰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정세균 국무총리는 2020년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1.0%라면서 한국 경제의 저력을 보여준 성과라고 말했다. ⓒ뉴시스
정세균 국무총리는 2020년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1.0%라면서 한국 경제의 저력을 보여준 성과라고 말했다. ⓒ뉴시스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대표작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휴머니즘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18세의 나이에 애국심을 강조하는 담임교사의 권유에 이끌려 자원입대하게 되는데요.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서 온갖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며 고통 받게 됩니다. 그리고 종전을 한 달여 앞둔 1918년 10월,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독자는 레마르크의 펜 끝을 따라가면서 파울 보이머라는 개인의 비극에 주목합니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주인공이 왜 참상 속에서 자아를 잃어가야 하는지, 왜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숨을 거둬야 하는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죠. 그러나 레마르크는 단순히 반전(反戰) 메시지를 남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사령부 보고서를 통해 국가 입장에서 개인의 희생은 ‘사망자 1’이라는 숫자에 불과할 수 있음을 폭로합니다.

기자는 최근 정부에서 나오는 발언을 보면서,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저 마지막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달 27일 지난해 연간 성장률이 –1.0%였다는 점을 밝히면서 “어젯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주요 선진국의 2020년 성장률 전망치가 –3%에서 –11%까지인 점과 비교하면 세계적 팬데믹 상황에서도 위기에 강한 한국 경제의 저력을 보여준 성과”라고 자화자찬(自畵自讚)했습니다.

지난해 12월 31일에는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한 해 동안 내내 코로나19의 거센 도전에 맞서 싸워왔고 지금도 싸움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잘 대응해 왔다”면서 “개방성, 투명성, 민주성의 3대 방역원칙을 확고하게 지키면서 이동제한이나 봉쇄조치 없이 상황을 관리해 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기자는 외국과 비교해 우리나라가 성공적으로 코로나19를 방어했고, 경제적으로도 선방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서 수천만 명의 확진자가 발생한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확진자는 7만 명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성공적인 방역 덕분에 2020년 경제 성장률 전망치도 준수한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정 총리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 총리가 집중했던 부분이 ‘숫자’였다는 점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2월 2일 기준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은 1435명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자영업자와 실업자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과연 이들은 정 총리의 자화자찬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본인의 불행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입장에서 숫자 1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허탈감이 들지 않았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나라가 국민에게 해야 할 역할을 다 했는지, 지금은 다하고 있는지 우리는 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단 한 사람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민을 5000만분의 1로 바라보는 게 아닌, 저마다의 삶을 가진 인간으로 바라보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희생자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이유로, ‘성공적’이라는 말부터 앞세우고 있습니다.

국민은 현명합니다. 정부가 “최선을 다했지만 희생자를 0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을 때, 그걸 탓할 국민은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정부라고 칭찬할 겁니다. -1%라는 경제 성장률 전망치에 기뻐하기보다, 그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야 했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에 먼저 공감하는 정부의 모습을 볼 수는 없는 걸까요.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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