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 전재산 계몽사업에...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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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전재산 계몽사업에...친일파?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12.21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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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밝힌 친일인사 방응모

방응모 금맥 캐 부호대열에 합류하며 조선일보 인수
이후 춘해장학회 통해 장학사업 펼치며 전 재산 투입
1600원 일본에 헌납,135만원 전 재산은 계몽사업에
친일파와 계몽사업가 논란 속…평가는 국민판단 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 이하 편찬위)는 지난 달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열고 조선일보 제2의 창업자 계초 방응모를 친일인사에 포함시켰다.

편찬위가 밝힌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조선일보를 인수한 1933년 3월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하는 등 총독부 관변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또한 방응모는 학병권유 등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도발을 옹호했다고 편찬위는 밝혔다.
조선일보는 1일자 신문을 통해 “일제 말 강요에 의해 학병권유나 총독부 관변단체에 이름을 올렸어도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고 나라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재들을 길러낸 분”이라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방응모는 친일파일까? 아니면 조선일보의 주장처럼 문화계몽에 앞장선 인물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그가 살아온 세월들을 더듬어 봄으로써 답을 구하고자 했다.<편집자 주>


▲ 계초 방응모     © 삼천리
방응모가 대중들 앞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서곡은 1920년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금광’ 때문이었다. 금광을 개발해 ‘떼부자’가 된 사람 중의 한사람이 방응모였다.

당시 금광귀(金光鬼)로 불리며 부호대열에 합류한 인사들은 방응모 말고도 최창학, 박용운, 김대원, 이종만 등이 있었다.

하지만 방응모의 돈 씀씀이는 다른 금광귀들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금광귀들은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해 사용했지만, 방응모는 달랐다.

방응모는 1884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방응모는 1924년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신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이렇다 할 사업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을 맡은 이력은 있다.

하지만 문맹률이 높았던 1920년대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정주에서 동아일보를 판다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지국장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 같은 얘기는 1933년 12월에 발행된 ‘삼천리’에 잘 나타나 있다.
 
방응모는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맡아 경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에 일원씩 받아들이는 신문대금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 부득이 거액의 부채를 신문사 본사에 짊어진 채 신문지국을  팽개치고 말았다. <심천리 1933년 12월호>
 
결국 방응모는 나이 마흔살에 금광을 찾아 정주를 떠났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1926년 7월 방응모는 금맥을 찾아냈다.

금맥발견으로 방응모의 인생은 달라졌다. 정주에서 단 한 대뿐이었던 포드승용차의 주인이 됐고, 아흔아홉 칸의 저택도 마련했다.

이후 1932년 방응모는 자신이 운영하던 교도금광을 야마모토조타로의 일본중외광업에 135만 원을 받고 팔았다.

이로써 방응모는 백만장자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돈을 쓰는데 있어서는 다른 금광졸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때문에 그가 한국전쟁 도중 납북될 때까지는 미담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조선일보 인수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신문사가 수익을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언론사업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대국민 ‘계몽사업’이었던 것.

조선일보는 1932년 사채업자 임경래에게 발행권이 넘어갔고, 여러 경영권 다툼 속에서 직원들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굴지의 재벌이었던 김성수가 운영하고 있어 재정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지만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재정적 어려움이 고질적인 일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재력을 갖춘 부자들이 널려있었지만, 수익성이 거의 없는 신문사업에 전재산을 걸고 배팅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인물은 없었다.

때마침 금광업체 매각으로 135만 원을 갖고 있던 방응모는 이광수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 백범 김구선생 묘소에 헌정된 친일인명사전     © 뉴시스
이때부터 방응모는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조선일보와 장학사업에 배팅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 1년여 동안 50여만 원의 돈을 쏟아 부었다. 동아일보에서 일하던 이광수와 서춘이 부사장과 주필로 옮겨왔으며 조만식은 2년여 동안 조선일보에 일했다.

또한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고향인 정주에 춘해장학회를 설립하고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백석, 김기림 등은 방응모의 장학금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다. 백석은 이북작가라는 이유로 남한에서는 금기시 돼 온 시인이고 김기림은 공산화 된 이북에서 월남해 서울대 조교수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 납북된 작가였다.

조선일보 이후 그의 장학사업은 본격화되기 시작해 대략 월 60원씩 7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당시 신문기자의 월급이 40여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장학금 액수는 파격적이었다.
또한 독립운동가 스님으로 널리 알려진 한용운을 위해 성북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결국 방응모는 단순한 금광졸부가 아니었음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시켜줬다.

대다수의 금맥을 발견해 부호가 된 인사들이 자신의 쾌락과 안위를 위해 썼던 것과는 달리 방응모는 사회를 위해 돈을 썼다. 방응모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1933년 12월 발간된 ‘삼천리’의 ‘삼대금광왕 성공기: 방응모’에 잘 나타나있다.
 
최창학씨가 수백만금을 현금으로 은행에 맡겨두고 해마다 증가하는 그 이자만으로도 오히려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란 말을 듣고 뜻있는 분들이 교육기관에 보태주시오 혹은 청년회에 기부해 달라고 백 번 청하고 만 번 부탁하였지만 장래에는 몰라도 오늘날까지 아직 어느 공익 기관에 기부했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재계에 해성같이 나타나 태양같이 찬란하게 또 값지게 대금을 사회에 던진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방응모다. 부호의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인격자로 오늘날 일세가 모두 공경으로 마지하고 있다.<삼천리 1933년 12월호>
 
‘현대’라는 신화를 이룩했던 고(故) 정주영 회장은 87년 청문회에 나와 ‘왜 전두환 신군부에 천문학적인 돈을 주었냐’는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현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답했다.

만약 지금 방응모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대국민 계몽사업이었던 조선일보와 춘해장학회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방응모가 일본에 헌납한 돈은 1600원이다. 그 당시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방응모는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135만 원을 국민 계몽사업을 위해 아낌없이 던졌다. 그가 과연 친일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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