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김영춘 “YS 정신, 노무현의 꿈…내 정치의 방향타”
[時代散策] 김영춘 “YS 정신, 노무현의 꿈…내 정치의 방향타”
  • 구술 김영춘| 정리 윤진석 기자
  • 승인 2021.02.27 17:4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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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
“역설적이지만 학생운동하지 않았던 순간 가장 고통”
“총학생회 직선제 쟁취,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앞장”
“삼당합당 반대, YS 정치적 장례 치를 마음으로 도와”
“지역주의 타파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 숙명 같아”
“고통에서 희망으로… 가덕신공항·메가시티 완수!”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구술 김영춘| 정리 윤진석 기자)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시간 여행을 떠났다. 시작은 70년대 후반부터 거슬러 올라갔다.ⓒ시사오늘(사진 : 김영춘 캠프 제공)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시간 여행을 떠났다. 시작은 70년대 후반부터 거슬러 올라갔다. 사진은 부산 진구 그의 사무실에서 시사오늘과 만나 현대사를 되짚어나가는 김영춘 전 장관ⓒ시사오늘(사진 : 김영춘 보좌진 제공)

 

 

학생운동


1981년 3월 재수 끝에 고려대 문과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푸른 쪽빛의 삼월이 창문 너머로 가득했다. 강의실. 

“전두환 독재타도….”
한 여학생이 외쳤다. ‘다다닥’ 순식간에 맨 앞에 앉아있던 열 명이 튀어나왔다. 사복경찰들이었다. 단상에 올라간 여학생을 질질 끌어냈다. 

“학우 여러분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외마디 절규가 심장을 때렸다.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 달려가 몸부림치는 여학생을 구해내고 싶었다. 싸우고 저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속으로의 외침뿐이었다. 학생들이 데모하다 경찰서에 가면 강제징집되던 때였다. 사복경찰에 맞선다면 군대로 끌려갔을 터였다. 삽시간에 강단은 쥐 죽은 듯했다. 강의실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다들 겁이 나서 덤벼들지 못했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그때가 떠올랐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YH 무역농성 사건 이후 더욱 강력히 유신 체제를 비판한 YS(김영삼)는 급기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박정희 정권의 야당 탄압은 한층 거세졌다. 이에 반발해 부산과 마산 전체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나(김영춘)는 부산동고 3학년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총칼을 꽂은 군인들이 거리를 점령했다. 도로 한 쪽 위로 누워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뭘 째려봐.” 
군인의 개머리판이 중절모자를 쓴 신사를 가격했다. “탁! 탁탁! 퍽!퍼퍼퍽!!” “으윽윽….”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끌려가는 여학생과 두들겨 맞고 있던 남자가 오버랩됐다.

두 사건 모두 내겐 충격이었다. 나서지 못한 것도 똑같았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인가. 이런 채로 살아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실감과 패배감이 오갔다. 수업이 끝나면 비겁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자책하기 바빴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렇게 일 년여를 보냈던 것 같다. 
 

김영춘의 시대산책 범위는 79년 부마항쟁부터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 출마까지다.ⓒ시사오늘(그래픽 : 박지연 기자)
김영춘의 시대산책 범위는 79년 부마항쟁부터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 출마까지다.ⓒ시사오늘(그래픽 : 박지연 기자)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죠.”
학생운동 전반에 걸쳐 언제 가장 고통스러웠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내 답이었다. (인터뷰는 지난 1월 15일 부산 보궐선거 김영춘 선거사무실에서 가졌다.) 역설적이지만, 학생운동을 하지 않던 순간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고통’이란 단어는 얼마 전 내가 펴낸 책 제목과 연관이 있었다. <고통에 대하여>다. 내가 겪은 41년 동안의 시대사를 되짚었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하나씩 접하면서요.”

처음엔 교회 청년부 학생들이 주축인 사회과학 공부 모임에 들어갔다. 나는 개신교도 아니었다. 사회과학의 모순과 해결책에 대해 고민하는 게 주였다. 거기서 일 년 정도 있었다. 그 뒤 학교 안으로 들어와 조금씩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3학년부터는 조직에 들어갔다. 4학년 때는 고려대 전체 투쟁위원장이자 문과대 조직동원 책임자를 맡았다. 

“교내 투쟁의 최대 쟁점은 뭐였나요.”
“총학생회 재건.”

당시 학생회는 학도호국단 체제였다. 신군부는 강제로 총학생회 조직을 없앤 뒤 학도호국단장을 임명했다. 학생들 반발이 심해지면서 간선제는 용인했다.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듯 과대표들끼리 호국단장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한 건 직선제 부활이었다.

민주주의를 세우는 핵심은 직선제에 있다고 봤다. ‘보여줄게. 직선제 쟁취운동.’ 세 개의 대학이 의기투합했다. 고려대를 비롯해 서울대, 연세대가 나섰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총학생회 부활을 선언했다. 불법이었던 터라 우리는 비장했다.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가 볼 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진을 치고 있던 사복경찰들도 물러가고, 학생들의 자율적인 활동도 어느 정도 보장됐지만, 여전히 엄혹한 시기였다.)
 

김영춘 예비후보는 198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이 됐다. 직선제를 통해 선출된 이후 타 대학과 연대해 민정당 농성 점거 등을 주도했다. ⓒ시사오늘(자료 사진 : 김영춘 캠프 제공)
김영춘 전 장관은 198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이 됐다. 직선제를 통해 선출된 이후 타 대학과 연대해 민정당 농성 점거 등을 주도했다. ⓒ시사오늘(자료사진 : 김영춘 보좌진 제공)


1984년 9월 전국 최초의 거사가 치러졌다. 총학생회 선거였다. 고려대는 나, 서울대는 이정우, 연세대는 송영길이 선출됐다. 원래 나는 생각이 없었다. 후보감을 찾으러 다녔다. 그때마다 모두 거절했다. 누구는 불법이라 거절했다. 또 누구는 학생회장을 하면 얼굴이 알려져 노동운동 진로에 걸림돌이 된다고 손사래 쳤다. 하는 수 없이 떠맡게 됐다. 교육부에서는 나를 제적시키라며 학교에다 압력을 가했다. 그걸 막아준 분이 김준엽 고대 총장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스승은 버틸 때까지 버티다 사표를 냈다. 이듬해(1985년) 2월이었다. 

나는 민정당사 점거 배후로 지목돼 감옥 안에 있었다. 구속되기 앞서 1984년 11월 3개 대학(고대, 연대, 성균관대) 300여 명이 민정당을 점거한 사건이었다. 우리가 요구한 것은 단순명료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언론 자유 보장” “노동삼권 보장” “학원 자율화” 등. “왜 당신들이 학교를 강제하나. 직선제로 총학생회장을 뽑았다고 해서 왜 압력을 넣어 제적시키나.” 데모해도 기사 하나 보도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집권당사를 점거한 것만으로도 대서특필되기 충분했다.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완료한 이래 가장 최초의 대규모 반독재 투쟁이라 할 수 있었다. 

 

나의 YS


“고맙네. 덕분에 총선에서 이겼네.”
YS의 말이었다. 수개월 형을 살고 나왔을 때였다. 하루는 YS가 나를 비롯해 함께 구속됐다 풀려난 20여 명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처음 YS와 대면하던 순간이었다. 

“점거 농성이 신민당 총선 승리에 영향을 많이 줬던 건가요?”
기자가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개된 우리 학생들의 점거 농성은 독재 정권의 심각성과 민주화의 열망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YS 단식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출범했고 신민당이 창당됐다. 선명 야당을 기치로 총선에서 메가톤급 대승을 거뒀다. 민정당 점거 농성이 그 길목을 터줬으니 고마움과 격려를 표해온 거였다. 
 

김영춘 예비후보는 86년 말 상도동계를 찾아가 직선제 개헌 쟁취 운동에 가담했다. YS 막내 비서로로서 활동했다.ⓒ시사오늘(자료사진 : 김영춘 캠프 제공)
김영춘 전 장관은 86년 말 상도동계를 찾아가 직선제 개헌 쟁취 운동에 가담했다. YS 막내 비서로로서 활동했다.ⓒ시사오늘(자료사진 : 김영춘 보좌진 제공)


다시 YS와 만난 것은 1986년 말. 직선제 개헌 운동에 뜻을 품고 상도동을 찾아가면서였다. 당초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제적된 후에는 원래 노동운동의 길을 갈 생각이었다. 인민노련 전신인 서클에 들어가고 캐비닛 공장에 위장 취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투쟁 노선에 이견이 있었다. 

총학생회 직선제 부활을 통해 학원 민주화를 앞당겼듯 직선제 개헌 운동이야말로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져올 거라는 게 내 주장이었다. 상부조직에서는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써 올린 건의서마저 불온문서로 낙인찍었다. 토론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실망한 나는 탈퇴를 결행했다. (책 <고통에 대하여>에 따르면 상부조직 책임자가 故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였다는 것을 세월이 흘러서야 알게 됐다.) 그런 연유로 YS를 찾아갔다는 얘기였다. 김덕룡 비서실장부터 만났다. 의기투합했다. 당시 YS는 민추협 공동의장이자 야당 대표격이었다. YS의 막내 비서로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스물여섯이었다. 

“민주화 운동 시절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는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라고 여길 때요.”

몸이 고달플 때가 아니었다. 막막함이 덮쳐올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현실적으로 언제까지 계속 싸워야 할 것인지에 대한 암담함이 있었다. 
 

김영춘 예비후보를 두고 언제 싸움이 끝날지 모르는 막막함이야말로 민주화 운동 시절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사진은 YS 왼쪽 김영춘ⓒ시사오늘(자료사진: 김영춘 캠프 제공)
김영춘 전 장관을 두고 언제 싸움이 끝날지 모르는 막막함이야말로 민주화 운동 시절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사진은 YS 왼쪽 김영춘ⓒ시사오늘(자료사진: 김영춘 보좌진 제공)


“그랬지만 지났네요.”
“네 지났죠.”

1986년 12월 민정당의 내각제 개헌안을 고려해보겠다는 이민우 파동, 이에 반발해 YS와 DJ가 창당한 통일민주당(87년 5월), 87년 6월 1일 체육관에서의 노태우 대통령 선출을 규탄하며 일어난 전국 시위,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진상규명 촉구와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 요구, 6·29 선언을 받아낸 6월 항쟁의 성공, 마침내 1987년 10월 27일 대통령 직선제가 담긴 새 헌법의 탄생까지…. 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났다. 

“YS와 함께한 시절은 어땠나요.”
“자부심이 컸죠.”

순간 함께하며 얽힌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직선제 개헌 운동 현판식을 하려다 경찰이 방해하자 저항한 일, 체포될 걸 각오하고 거리 행진한 일, “길을 비켜라, 이놈들아!” 농성을 막아선 경찰들 앞에서 소변 볼 깡통까지 대동하고 다섯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항의한 일 등.

그때마다 물러서지 않던 YS 정신을 나는 사랑했다. 그에게는 정신이란 게 있었다. 독재 정권에 대항하다 대낮에 염산 테러를 당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맞설 수 있던 것 모두 꺾이지 않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와주게. 마지막 부탁이네.”
그런 그가 평소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서였다. 앞서 양김 단일화에 실패한 YS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는 말로 1990년 전격 3당 합당(노태우 민정당+YS 통일민주당+김종필 공화당)을 발표했다.

나는 YS를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고대 영문과 4학년에 복적됐다. 졸업한 후에는 동대학원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YS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사면초가 상태였다. 민자당 안에서 민주계는 20% 정도밖에 안 됐다. 80%는 민정·공화계가 좌지우지했다. 제6공화국 황태자 박철언은 공공연히 YS를 공격했다. 

YS는 막전막후의 반전을 노리고 있었다. 사즉생 각오였다. 평소 YS 셋째 아들이라는 말이 들릴 만큼 나를 아껴주던 분이었다. ‘민자당 대통령 후보도 못 되고 결국 토사구팽당하겠구나.’ 그게 솔직한 나의 생각이었다. 3당 합당의 끝이 비극일 거로 예감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정치적 장례라도 치러드리자.’ 유학을 포기하고, 그 길로 YS 대선 캠프 외곽조직에 합류했다.

영광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없었다. 정치 스승을 위한 마지막 도리를 다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 여겼다. 그만큼 YS가 이길 거라고는 단연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YS의 승리였다. 민자당 경선을 뚫고 1993년 문민정부를 개막했다. (이후 김영춘은 93년부터 22개월간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 및 정무비서관을 지냈다.)
 

김영춘 예비후보는 YS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비선관을 22개월 가량 지냈다.ⓒ시사오늘(자료사진: 김영춘 캠프 제공)
김영춘 전 장관은 YS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비선관을 22개월 가량 지냈다. 사진은 가운데 YS 오른쪽이 김영춘ⓒ시사오늘(자료사진: 김영춘 보좌진 제공)

 

아, 노무현


 
세월이 흘러, 2011년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왔다.(김영춘은 1962년 부산진구에서 태어났다.) 어디에 있든 골목골목 누비며 정다운 친구들과 뛰놀던 때가 늘 눈에 선했다. 젊은 시절부터 되돌아오고 싶었던 부산은 내게 고향 이상의 의미였다. 내 삶의 정수가 깃든 노스탤지어 같은 고향이자, YS의 정치적 고향,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상향이 담긴 꿈의 고향이었다.

힘차게 비상하는 갈매기의 날갯짓처럼 나는 이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서울 광진갑에서 두 번이나 당선됐던 내가 부산에서 새로운 정치를 결심하기까지 가장 큰 동기부여가 돼준 존재가 있었다. ‘노.무.현’ 이라는 이름 석자였다. 

처음 그의 존재를 인식하던 때가 생각난다.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치러진 13대 총선에서였다. 부산 인권운동 대부인 김광일의 추천으로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후보가 된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신군부 출신의 허삼수를 누르고 패기 있게 당선됐다. 정치신인으로서 전두환 대상의 5공 비리 청문회에서 거침없는 언변을 쏟아낸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3당 합당에 반대해 이기택·김정길 등과 꼬마민주당을 창당한 것도 노무현다운 일로 기억되고 있다. 

무엇보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숱한 도전이야말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일이었다. 민주당 몸으로 1992년 부산 재선에 도전해 낙선, 1995년 부산시장 낙선, 2000년 총선서 종로 지역구 버리고 다시 부산에 내려와 낙선. 연거푸 패배하면서도 권위주의와 지역주의에 맞서는 모습에 감동했다. 그러면서 쌓인 것이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이었다. 영남 패권주의 정당에 소속돼 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다. 

(같은 시기 김영춘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그럼에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대 당이지만 노무현 후보가 이기길 바란다’고 전했다. 비록 당에서는 공격받았지만, 누군가에겐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던 듯하다.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이호철은 훗날 김영춘을 만나 이때를 상기했다. 그 발언으로 김영춘이란 사람을 달리 봤다고 한다.)
 

김영춘 예비후보는 한나라당을 개혁하려 했지만, 당세에 밀렸다. 함께 5수리 5형제라 불린 김부겸·안영근·이부영·이우재 등과 탈당해 정치 실험의 길을 모색했다. ⓒ시사오늘(자료 사진 : 김영춘 캠프 제공)
김영춘 전 장관은 한나라당을 개혁하려 했지만, 당세에 밀렸다. 함께 5수리 5형제라 불린 김부겸·안영근·이부영·이우재 등과 탈당해 정치 실험의 길을 모색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김부겸·이부영·김영춘·이우재ⓒ시사오늘(자료 사진 : 김영춘 보좌진 제공)


“이후 탈당하잖아요?”
기자는 2003년을 가리켰다. 당시 광진갑 국회의원이던 나는 이우재·김부겸·원희룡·이부영·이성헌 등 한나라당 개혁파들과 함께 새정치실천모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내 수구 세력의 탄압은 커져갔다. 대놓고 나가라는 비아냥도 들렸다. 우리가 결론 내린 것은 하나였다.

‘이 당에서는 자생적 개혁이 불가능하다.’ 김부겸·안영근·이부영·이우재 등과 함께 탈당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연대를 결성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독수리 5형제’라 불렀다. 

열린우리당 창당도 그해 11월 이뤄졌다. 우리의 꿈은 지역 초월 정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신념이기도 했다. 지역주의 없고, 부패도 없는, 고른 지지를 받는 백 년 정당 건설이 목표였다. 하지만 ‘108 번뇌’라는 말이 말해주듯 과정은 불안했다. 그 끝은 실패였다. 

(47석 미니정당으로 시작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탄핵 역풍’에 힘입어 2004년 152석 정당으로 성장했다. 김영춘도 재선에 성공했다. 당의 초선의원만 108명이었다. 여러 파벌이 형성됐다. 항간에 ‘108 번뇌’와 같다는 비판이 들렸다. 분열을 거듭했고, 선거 때마다 연패했다. 김영춘이 총괄본부장을 맡고 강금실이 서울시장 후보였던 2006년 지방선거 때도 힘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대선을 앞두고는 집단 탈당 러시도 일어났다.)

최고위원이던 나로서는 당의 해체를 지켜보는 과정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열린우리당을 깬 이들과 함께하는 대신 정치 개혁의 가치를 선택했다. ‘문국현 지지선언’이 그 대안이었다. 2008년 총선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9년의 ‘노무현 서거’는 너무 큰 고통을 안겼다. 2010년 손학규 당시 민주당 대표의 설득 끝에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2년여간 야인 생활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고군분투할 때 그에게서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김영춘 예비후보는 소회했다. 사진은 봉하마을의 노 대통령 묘역을 찾은 김영춘©시사오늘(자료사진 : 김영춘 캠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고군분투할 때 그에게서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김영춘 전 장관은 소회했다. 사진은 봉하마을의 노 대통령 묘역을 찾은 김영춘©시사오늘(자료사진 : 김영춘 보좌진 제공)

 

 

가자! 부산으로 


“함께 전국정당을 건설하세.”

돌아올 수 있던 것은 그 말 때문이었다. 당 지명직 최고위원을 제안하며 꺼낸 손학규 대표의 말을 들으며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렸다. 지역주의 타파라는 당신의 유산이 거부할 수 없는 숙명같이 여겨졌다. 물러서지 말고 도전하라는 가르침을 새겼다. 부산에서의 첫 도전은 2012년 내가 태어난 부산 진구갑에서였다. 그러나 낙선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부산시장에 도전했다. 선거 일 년 전부터 착실히 준비했다. 시민을 향해 어디든 현장 곳곳을 누볐다. 어려운 선거였지만,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야권 후보로서의 고민이 생겼다. 오거돈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함으로써 단일화라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삼파전으로 나간다면 새누리당 후보에 패할 것이 자명했다.

개인을 생각한다면 완주가 맞았다. 지명도를 넓힐 기회였다. 그러나 나는 양보를 택했다. 당시 오 후보는 나보다 인지도가 높았다. 민주당의 공식 후보였지만 무소속 후보에 양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 희생이었다. 

(이후 김영춘은 세월호 참사의 팽목항을 찾았다. 그곳에서 죽은 영혼들의 원혼을 위해 기도했다. 시대적 고통이라고 술회한 그로서는 두고두고 마음이 미어지는 일이었다. 2015년 부산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인사들과 오륙도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시기 연구한 정책들은 훗날 그가 공들인 부산의 청사진에 밑거름이 된 듯했다. 2016년 21대 총선에서는 부산 진구갑에서 당선됐다. 김영춘·박재호·최인호·전재수·김해영 등 ‘갈매기 5형제’라 불린 민주당 후보들이 모두 승리했다. 노무현으로부터 시작된 꿈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부산의 첫 당선을 계기로 3선이 된 나는 국회 농해수위원장을 역임했다. 농업과 해양정책에 열정을 쏟았다. 해양 산업의 이해를 넓히는 계기였다. 국정농단과 촛불집회, 탄핵을 거쳐 2017년 장미 대선을 도왔다. 김덕룡·문정수·박종웅 등 상도동계 인사들이 ‘문재인 지지’로 돌아서도록 노력했다. 그해 6월에는 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했다. 해운업 현안 해결, 세월호 진상규명 등을 지시했다. 최장수 해수부장관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2019년 4월 퇴임했다. 

(이듬해 21대 총선에서 김영춘은 비록 낙선했지만, 심기일전했다. 부산을 대표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4·7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도전하기까지 그의 귀소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김영춘 전 장관은 정치란 국민의 고통을 해소해주는 것이 소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산의 운명을 바꾸겠다고 밝혔다.ⓒ시사오늘(자료사진 : 김영춘 보좌진 제공)
김영춘 전 장관은 정치란 국민의 고통을 해소해주는 것이 소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산의 운명을 바꾸겠다고 밝혔다.ⓒ시사오늘(자료사진 : 김영춘 보좌진 제공)


정치란 국민의 고통을 해소해주는 작업 같은 것. 나는 늘 정치공학이 아닌 정치철학과 가치, 소신을 좇으며 살았다. 결정적일 때마다 나를 버리고, 대의를 택해왔다. 지금도 그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고통을 딛고 나는 희망을 향해 가고 있다. 언제나 그 희망은 나의 로망 부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서의 희망 찾기가 내 숙명이 된 지 오래다. 지역발전의 초석을 다지고, 양극화 해소를 위해, 그리고 가덕도 신공항 완수, 부울경 메가시티를 향한 꿈을 이루겠다. 나는 달린다 오늘도. 부산시민을 향해. 기필코 영혼을 바쳐 승리하겠다. 부산의 운명을 바꾸겠다. 

※<시사오늘>의 ‘시대산책’은 인터뷰이의 구술을 화자의 시점으로 재구성해 정리하는 형식의 코너입니다. 기술상의 이해를 돕고자 화자의 심리적 기법을 가미, 배경상의 설명을 부연한 점 말씀드립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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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타파 2021-03-04 08:28:25
김부겸, 김영춘 파이팅!

이정희 2021-03-03 15:59:27
송영길 의원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