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YS·이인제·정몽준, 경선서 패한 이들의 선택…2021년 안철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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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신문 보기] YS·이인제·정몽준, 경선서 패한 이들의 선택…2021년 안철수는?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1.03.30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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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1997년·2002년 그날, 인물·신문의 평가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열두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71년, 1997년과 2002년 ‘대통령 경선’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다. 기록에 남아 후세에도 살아 숨 쉬는 건 승자뿐이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여야 양자구도로 남기까지 많은 예비후보들이 출마를 선언했다. 이 가운데 단일화 경선 과정을 거쳐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둘이 남았다. 그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이 제38대 서울시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승리의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던 2인자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쓰라린 패배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승자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다른 누군가는 선거 결과를 끝끝내 부정했다. 또 감정의 골을 끝내 메우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2인자의 선택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먼 훗날 2인자에게도 승자가 될 기회가 주어졌을까.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열두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71년, 1997년과 2002년 ‘대통령 경선’이다.

 

1971년, 제7대 대선…2인자 YS의 선택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맞붙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맞붙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공화당 박정희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맞붙었다. 선거의 승자는 94만여 표 차 앞선 박정희였다. 이 시기는 1969년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에 반대하는 신민당과 시민들의 투쟁이 수포로 돌아갔던 때다. 이에 야당인 신민당은 무력감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이때 가장 먼저 분위기 반전을 꾀한 인물은 김영삼(YS) 당시 원내총무였다. 그는 1969년 11월 “박정희 씨의 3선 개헌 강행을 통해 위장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바를 뚜렷이 체감한 우리 야당은 빈사상태에서 헤매는 민주주의를 기사회생 시키는 데 새로운 결의와 각오로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의 시점”이라며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41세였다.

뒤이어 출마를 선언한 인물은 김대중(DJ)이었다. 그는 1970년 1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이철승이 간접적으로 후보 출마 뜻을 내비쳤다. 이로써 세 명의 40대 후보 전당대회가 9월 열렸다. 이철승의 김영삼 당선을 위해 협조하겠다는 서약에 따라, 사실상 이파전이 펼쳐졌다.

1차 투표 결과 885표 중 YS 421표와 DJ 382표로, YS는 과반수(443표)에 22표 모자랐다. 이에 2차 투표(결선 투표)가 곧바로 진행됐다. 그러나 2차 투표 결과 총 884표 중 DJ 468표와 YS 410표로 역전극이 펼쳐졌다.

역전극은 ‘김대중-이철승 상호 합의 각서’에서 비롯됐다. YS는 “2차 투표 역전의 가장 큰 이유는 1차 투표 직후 김대중과 이철승 사이에 당권을 건 흥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1차 투표에서 나온 78표의 백지투표 중 상당수가 나를 밀기로 약속했던 이철승의 표(회고록 1권·343쪽)”라고 회고했다.

각서에 대한 김대중과 이철승의 입장은 엇갈린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각서를 요구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DJ는 “재투표가 있기 전에 이철승계의 김준섭 씨가 내게 다가오더니 각서 하나를 써 달라고 했다”며 “‘다음 총재 선출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2차 투표에서 나를 찍겠다고 했다(자서전 1권·212쪽)”고 서술했다.

이철승은 이런 DJ의 주장을 전면 반박했다. 그는 이철승계의 김준섭이 아닌, 이철승계의 표가 필요했던 김대중이 표 확보를 위해 먼저 각서를 써줬다고 밝혔다. “2차 투표에 들어가기에 앞서 김대중 씨는 황급히 나의 참모진에게 협조를 요청했다(회고록·421~423쪽)”며 김대중 명함 사진과 함께 각서 내용을 회고록에 실었다.

YS는 패배 했지만, 결과에 승복하고 DJ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 지원유세를 다녔다.ⓒ시사오늘DB
YS는 패배 했지만, 결과에 승복하고 DJ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 지원유세를 다녔다.ⓒ시사오늘DB

우여곡절 끝에 신민당 경선대회의 승자는 DJ로 결정됐다. 2인자가 된 YS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단상에 올라가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나의 승리”라며 “김대중 씨를 위해 거제도에서 무구 구천동까지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갈 것”이라고 외쳤다. 실제로 이후 YS는 전국을 누비며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는 “박정희와의 대결을 앞두고 두 사람의 40대 후보, 그것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공동전선을 형성한다면 그 파괴력은 막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회고록·348쪽)”며 DJ를 돕기로 한 선택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DJ는 그에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달라고 제안하지 않았다.

아래는 YS가 지명전에서 패배한 직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는 “정치에는 신의가 제일”이라는 신념을 밝히며, “지명대회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해서 정치인으로서의 자세가 달라 질 수 없다”며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YS가 지명전에서 패배한 직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인터뷰] 김영삼씨 패장의 변 “정권교체 위해 기꺼이 밀겠다”

작년 11월 8일 40대기수론을 선창, 때로는 비바람을 맞으면서 험한 길을 다져오다 마지막 결전에서 정치의 아픔을 맛본 패장 김영삼 씨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 지명대회의 패인을 어떻게 보는지.

“대통령 후보 지명전이 정치의 전부가 아니며, 정치에는 신의가 제일이라는 것이 내 신념인 만큼 나는 이제껏 한 번도 신의를 어겨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유 당수에게 각서로 약속한대로 결과에 흔연히 복종했고, 행동으로 지지를 천명했다. (후략)”

- 내년 대통령 선거에는 어떻게 임할 것인지.

“(중략) 나는 앞서 국민과 당원 동지들에게 40대 세 사람 중 누가 돼도 밀겠다고 약속한 이상,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 동지를 앞장세워 방방곡곡을 누비며 적극 돕겠다. (후략)”

- 앞으로의 정치 활동에 대해선.

“(중략) 내가 이번 지명대회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해서 정치인으로서의 자세가 달라질 수 없으며,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층 용기를 갖고 분발할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나는 40대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적으므로 내일에 대한 희망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 내일을 위해 계속 정진하겠다.”

그는 정치에서의 영광과 고뇌의 무상함을 되씹는 듯 “패배는 때로 최선의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 <동아일보>, 1970.09.30. 3면.

2인자였던 YS는 1971년 라이벌 DJ를 위한 ‘선거 운동’을 택했다. 물론 그의 노력에도 불구, 그 해 선거는 DJ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22년이라는 먼 길을 돌아,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선택은 2인자로 이름이 지워지거나, 1인자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게 했다. 이는 먼 훗날 승리를 위한 어제의 패배였던 셈이다. 그의 정치적 신념인 ‘신의’를 지키고, ‘내일’을 위해 계속 정진하며, 패배를 최선의 교사로 삼은 결과다.

 

1997년, 제15대 대선…2인자 이인제의 선택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김대중 전 대통령, 이인제 전 의원이 맞붙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김대중 전 대통령, 이인제 전 의원이 맞붙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한나라당 이회창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맞붙었다. 선거의 승자는 1.6%포인트 앞선 김대중이었다.

이회창의 패배 원인으로 야권 연대(DJP 연합), 아들의 병역 문제 등 다양한 이유가 제시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는 여권 분열이었다. 그리고 여권 분열은 2인자였던 이인제의 탈당 및 출마에서 시작됐다.

당시 신한국당(後한나라당)에는 9룡이라 불리는 9명의 후보가 있었다. 이회창·이홍구·이수성·최형우·김덕룡·이인제·김윤환·이한동·박찬종이 9룡상쟁(九龍相爭)의 주인공이었다. 2차 결선 투표를 통해 이회창이 2300표 차로 이인제를 꺾고 최종 후보로 7월 결정됐다.

그런데 이회창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그러면서 2위로 밀려났던 이인제가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당 내부에서 두 사람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으며, 이인제 역시 직·간접적으로 후보 교체를 주장했다. 결국 9월 기자회견을 통해 이인제는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조선일보>(좌)의 사설과 <한겨레>(우)의 칼럼이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당시 언론은 한 목소리로 그의 결정을 비판했다. 비판의 중심엔 그가 무시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있었다. <조선일보>는 “그의 대통령 출마는 한 마디로 한국 민주주의의 타락을 의미한다”며 “그는 오늘도, 어쩌면 밝을 수도 있는 5년 후도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민주주의 원리는 패배를 인정하는 데서 꽃 핀다”며 그의 태도를 비판했다.

[사설] 이인제 씨의 ‘마침내’

이인제 씨의 신한국당 탈당과 대통령 출마는 한 마디로 한국 민주주의의 타락을 의미한다. (중략) 구체적으로 말해 경선에 나선다는 것은 거기서 이기지 못하는 한, 비록 자신의 가능성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독자적으로 출마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과정은 하나의 게임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규칙이다. (중략) 그런데 이 씨는 이 규칙을 어겼다.

(중략) 우리가 지금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지도자는 믿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 비록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더라도 그 선택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 더 큰 것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도덕과 윤리와 상식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 씨는 지금 오늘도 잃고 있고, 어쩌면 밝을 수도 있는 5년 후도 잃고 있다.

- <조선일보>, 1997.09.14. 3면.

[칼럼] 패배자가 키우는 민주주의

이인제 씨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뒤 한 번도 의연한 패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승자를 도와야 할 패자의 도리를 모른 체 했다. 그는 이회창 인기 침체를 빌미로 후보 교체를 내심 꾀했지만, 그의 비협조적인 행보가 그 침체를 부채질했다는 비판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그는 줄곧 자신의 정치적 야망의 실현만을 꿈꾸고 있다.

(중략) 민주주의는 승자의 게임이 아니다. 아름다운 패배가 민주주의를 꽃피운다. (중략) 진정한 민주주의는 패배자가 게임 규칙을 지킬 때 그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공정한 게임, 정권교체의 가능성으로 대변되는 민주주의 원리는 패배를 인정하는 데서 꽃핀다.

우리나라 정치 발전과 자신의 성숙을 위해 이인제 씨는 스스로 몸을 낮추기를 권고한다.

- <한겨레>, 1997.09.13. 7면.

결국 15대 대선에서 2인자 이인제의 선택, ‘불복’은 여권 승리의 걸림돌이 됐다. 대선 직후 한 설문조사에서는 의원 170명 중 40%는 대선의 승패를 가른 요인으로, ‘이인제 탈당으로 인한 여권과 영남표의 분열’을 택했다.

그는 이후 충남 논산·금산(後 논산·계룡·금산)에서 제16대~19대 내리 4선을 했다. 그러나 6선 국회의원을 끝으로, 2016년 제20대 총선과 2018년 제7대 지선(충청남도지사)에서는 모두 2위로 낙선했다.

먼 훗날 2인자였던 그에게 승자가 될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졌을까. <조선일보>의 경고처럼 그는 ‘밝을 수도 있는 5년 후’를 잃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부터 고배를 마셨다. 10년 후도 마찬가지다. 2007년 또 한 번 도전한 17대 대선에서도 6위로 낙선했다. 2인자인 그에게 국회의원 배지는 네 차례 더 주어졌지만, 대통령이 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2002년, 제16대 대선…2인자 정몽준의 선택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맞붙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한나라당 이회창과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맞붙었다. 선거의 승자는 57만 980표(2.33%포인트) 앞선 노무현이었다.

새천년민주당은 최초로 일반 국민들이 참여하는 국민참여경선 제도를 도입했다. 당원과 국민을 50대 50의 비율로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후보는 이인제·김근태·정동영·한화갑·김중권·유종근·노무현으로, 총 일곱이었다. 당내에서는 앞선 대선에서 2인자였던 ‘이인제 대세론’이 앞섰다. 그러나 첫 주말 경선의 종합 1위는 노무현이었다. 16개 경선 이후 7명의 후보 중 노무현과 정동영 두 후보만이 남고, 모두 사퇴를 선언했다.

두 달 간의 경선을 통해 노무현이 70.5%의 득표율로 후보로 당선됐다. 그러나 6월 지방선거와 8월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면서, 노풍(盧風)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당내에서 ‘제3의 후보 영입론’이 제기됐다. 마침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던 때라, 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몽준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노무현은 승부수를 던진다. 이미 합법적인 절차로 민주당 후보가 된 그였으나, 11월 정몽준에게 후보 단일화를 제안했다. 하지만 단일화 결과 역시 노무현이었다. 두 사람은 국정 동반자로서 정치 개혁을 함께 추진할 것을 합의한 뒤에야, 정몽준은 유세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첫 공동 유세는 선거 닷새 남긴 14일 부산 유세에서였다.

그러나 선거 전 날인 18일, 명동과 종로 유세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날 밤 2인자 정몽준이 내린 최종 선택은 ‘단일화 철회’였다. 그는 유세장에서의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노무현의 발언이 합의된 정책 공조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은 다르다.

당시 유세장에서 ‘차차기는 정몽준’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고, 노무현이 정동영과 추미애를 단상 위로 올라오게 했다. 이에 노무현은 “정몽준 대표와 정동영, 추미애 의원 등을 함께 추켜세우고 덕담을 했다(자서전·200쪽)”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노무현이) 너무 속도 위반하지 말라”며 “대찬 여자 추미애 의원도 있고, 국민 경선을 지킨 정동영 최고위원도 있다. 몇 사람 있으니 경쟁할 수 있다(회고록 2권·1030쪽-e북 기준)”고 서술했다.

노무현은 정몽준 자택을 찾아갔고, 문전박대 당했다. 선거 전 날 밤의 일은 국민 정서를 건드렸다. 결국 노무현은 다음 날 대통령에 당선됐다. 2인자 정몽준의 선택은 그가 원했든 안 원했든 간에 그의 당선에 도움이 됐다. 이회창은 이를 “노무현 지지자들을 더욱 결집시키는 계기(회고록 2권·1031쪽)”라 평가했다.

문제가 됐던 선거 전 날 저녁 명동-종로 유세 모습이다.ⓒ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문제가 됐던 선거 전 날 저녁 명동-종로 유세 모습이다.ⓒ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언론의 평가는 양분됐다. <조선일보>는 선거 당일 새벽 “정몽준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급작스러운 변화의 뜻을 슬기롭게 읽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레시안>은 정몽준을 “스스로 무덤 팠다”고 표현하며, “신의를 저버린 정치인으로 각인됐다”고 서술했다.

[사설]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

16대 대통령 선거의 코미디 대상(大賞)은 단연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다. (중략) 투표를 10시간 앞둔 상황에서 정몽준 씨가 후보 단일화를 철회했다. 이로써 대선 정국은 180도 뒤집어졌다.

(중략) 한편으로는 희극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급격한 상황 변화 앞에서 우리 유권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 지금까지의 판단 기준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뒤집는 것이다. (중략)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급작스러운 변화의 뜻을 슬기롭게 읽어내야 하는 일이다.

- <조선일보>, 2002.12.19.

‘스스로 무던 판’ 정몽준·이인제·김민석 - <備忘錄> 배신과 변절의 정치인 리스트

어려울 때일수록 ‘인간의 본모습’과 ‘그릇의 크기’가 드러난다고나 할까? 2002 대선, 격전의 1년 동안 숨가쁜 고비마자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 정치인들이 많다. 정치적 신의를 돌출 행동으로 저버린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 (중략) 등은 이번 대선 결과 정치적 입지를 상실한 대표적 정치인이다.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뭘까?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남보다 앞장서 제 무덤을 팠다는 점이 아닐까?

(중략) 선거공조 파기의 말 못할 내막이 무엇이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가 당선된 현실은 정 대표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혹한 심판의 의미도 담겨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신의를 저버린 정치인'으로 각인된 오늘의 정 대표를 국민들이 기억에서 지워줄 리 만무해 보인다.

- <프레시안>, 2002.12.21.

이후 정몽준은 17~18대 울산 동구, 19대 서울 동작을 국회의원을 지냈다. 의원직 사퇴 후 2014년 제6회 지선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했으나, 故 박원순에 밀려 2위로 낙선했다. 그는 이 선거를 끝으로 정계 은퇴했다. 그에게도 일곱 차례의 국회의원 기회는 주어졌으나, 대통령 선거에서 승자가 될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2021년, 보궐선거…2인자 안철수의 선택


ⓒ뉴시스(국회사진기자단)
지금의 쓰라린 아픔을 어떻게 승화시킬지는 결국 2인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뉴시스(국회사진기자단)

그리고 또 한 명의 2인자가 있다. 4월 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야권 단일화가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은 치열한 협상을 치렀다. 단일화 결과 오세훈이 최종 야권 후보로 3월 23일 결정됐다.

2인자 안철수는 세 가지 길 중 1971년 YS의 ‘선거 운동’을 택했다. 차이가 있다면 경선 승자인 오세훈이 DJ와 달리, 안철수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현재 대부분의 유세 일정을 함께 소화하고 있다.

물론 앞으로 남은 선거 기간 동안 그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 ‘불복 및 출마’를 택한 1997년 이인제나, 선거 전 날 ‘단일화 철회’를 택한 2002년 정몽준의 선택을 따를 수도 있다. 이는 온전히 그의 결정에 달렸다.

그러나 오랜 역사는 이후의 결과도 이미 말해주고 있다. 승자가 쓴 역사 못지않게, 2인자의 선택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먼 훗날 2인자에게 주어질 기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말이다. 지금의 쓰라린 아픔을 어떻게 승화시킬지는 결국 2인자의 선택에 달린 셈이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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