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16)] 노승우 전 국회의원˝잠 안재우며 YS 돈줄 대라고 협박˝
스크롤 이동 상태바
[民山되짚기(16)] 노승우 전 국회의원˝잠 안재우며 YS 돈줄 대라고 협박˝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2.04.25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정권, YH여공 농성 무자비하게 강제해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산 되짚기' 16번째 주인공은 노승우 전 의원이다. 인터넷 포탈사이트 검색창에 '노승우'를 넣고 치면 '태초의 이브' 등 노 전 의원의 작품들이 줄줄이 뜰 뿐 정치와 관련된 내용은 찾기 힘들다. 노 전 의원은 15대를 마지막으로 정계를 떠나 화가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작품은 유명세를 타고 있다. 대표적 작품인 '태초의 이브'는 영구보전을 위해 한국미술문화협회에 소장돼있다. 

GS 칼텍스 허동수 회장실에 그의 작품이 걸려있고 이 회사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각종 공모전에서 상을 타는 게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닐 정도다. 인터뷰는 2012년 4월 18일 한국 외국어 대학교 인근에 위치한 노 전 의원의 화실에서 진행됐다. 그의 조그마한 화실은 소박했고 노 전 의원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화가로서의 노승우에 대한 궁금증이 컸지만 일단 그의 과거 정치와 관련해 물어봤다.

 

▲ 노승우 전 의원은 YS가 민주화에 기여한 것은 '팩트'라면서 민주화의 기반을 놓은 최초의 대통령으로 인정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를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가요.

 

"제가 1967년도에 장학금을 받고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 곳에서 한국 학생회 간부를 맡았습니다. 김영삼 총재가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할 때 미국에 와서 강연회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동아일보 지사장 겸 편집인이었기 때문에 YS의 미국 방문 기사와 광고를 대문짝 만하게 냈습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국 강연을 했는데 그 때도 제가 도왔습니다.

그런데 DJ가 시국 강연을 할 때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방해를 했습니다. 한 쪽에 계란꾸러미가 있었어요. DJ에게 던지려고 했던 것이지요. 200여 명의 가죽잠바 부대(검은색 가죽잠바를 입은 한국 중앙정보부 관계자들)가 모여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미국 경찰에 신고했어요. 잡아가라고. 왜냐하면 저희는 합법적으로 강연회를 하는 것인데 가죽부대가 방해를 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경찰이 출동했고 무사히 강연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3선 개헌은 1969년 박정희의 대통령 3선을 목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신민당은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구성, 개헌 반대 투쟁에 나섰고 전국 대학가에서는 연일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그해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 국회 제3별관에서 여당계 의원 122명이 모여 기명투표 방식으로 찬성 122, 반대 0표로 개헌안을 변칙통과시켰고 그 후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총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 찬성을 얻어 확정됐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YS·DJ 도와"

-DJ와도 친했나요.

"저는 유학시절 반(反)독재 운동하는 사람은 무조건 도와줬습니다. YS든 DJ든 가리지 않고 도왔습니다. 그런데 DJ가 열흘 정도 미국에 체류한 적이 있는데 저를 항상 데리고 다녔어요. 납치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저를 증인으로 데리고 다닌 것이죠. 지금도 기억나는 건 DJ가 절대로 찬물을 안 마시는 겁니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냉수를 마셔요. 그래서 제가 더운물을 조달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던 노 전 의원은 1975년 개헌투쟁 당시에도 YS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국내에서는 유신에 저항하는 개헌청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노 전 의원은 미국에 온 한국의 반독재 인사들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민주화운동에도 온 힘을 쏟았다.

"전 혼자서 영사관 앞에서 데모도 했습니다. 그 바람에 제가 학위가 늦었습니다. 한 번은 최형우 전 의원이 한국에서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죽도록 두들겨 맞은 뒤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온 적이 있어요. 1975년이었던 것 같은데 최 전 의원이 사기 비슷한 것을 당했어요.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그 바람에 최 전 의원이 신용불량자 비슷하게 되면서 곤경에 처하게 됐습니다. 때마침 갑자기 한국에서 최 전 의원에게 귀국하라는 소식까지 날아왔어요. 문제는 미국에서의 신용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제 신용카드로 겨우 풀어줬습니다. 저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연이 됐습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의 오른팔인 최형우와의 인연은 노 전 의원이 자연스럽게 상도동계에 입문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노 전 의원이 본격적으로 상도동계에 입문한 시점은 1979년이다. YS가 그 해 5·30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당선된 뒤 당 국제국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노 전 의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노 전 의원은 국제국장이 되면서 그 유명한 YH사건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5·30 전당대회가 열릴 즈음 박정희 정권은 YS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인 차지철이 신민당 신도환 최고위원을 불러 YS와 당권 경쟁을 벌이던 이철승을 지원할 것을 종용할 정도였다. YS가 선명야당이라는 기치 아래 유신정권에 대립각을 세우면서 단호한 투쟁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방해공작에도 전당대회는 YS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YH 사건이 발생한다.

"YH여공 농성 강제 해산 과정서 폭력 난무"

-YH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제가 1979년에 국제국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데 한국으로 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귀국했는데 월급도 안 주고 자리를 지키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상도동계인) 제가 국장이면 부국장은 동교동계에서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석재가 재무국장이었고 문정수가 총무국장이었습니다.

그러다 그해 8월에 YH 사건이 벌어집니다. YH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며칠째 철야 농성을 했습니다. 저는 당사 2층을 담당했습니다. 각 부장마다 담당 층이 있었어요. 그 때 김경숙(여공)이 자살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경찰이 들이닥쳐서 곤봉으로 저를 두들겨 팬 뒤에 닭장차에 던져 넣었어요.

이후 저한테 세명이 붙더라구요. 강경파와 중간파, 그리고 살살 달래는 파가 저를 상대했는데 저 보고 김영삼 돈 줄을 대라고 하는 거에요. 잠도 안재우고. 그래도 그 때는 당당했어요. 당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옳은 일을 했으니까요. 그렇게 감옥에서 시달리고 있는데 정대철이 저를 한 번 찾아왔더라구요. 나중에 정대철이가 미국에 전화해서 별 것 아니라고 가족들에게 전했다고 해요."

-무슨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갔나요. 또 경찰의 폭력 진압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집시법 위반, 그런 것으로 걸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때 박권흠과 백영기가 많이 다쳤어요. 다른 사람들도 많이 다쳤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경찰들이 닭장 차에 저를 던져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닭장차에 앉아 있었는데 여공들도 막 닭장차로 던지더라구요. 경찰들이 여공들을 마구 던져대니까 제 앞으로 여공 브레지어가 휙 날라오더라구요. 얼마나 여공들을 세게 던졌으면 그렇게 브레지어가 분리될 정도였겠어요."

 

▲ 김영삼 전 대통령과 노승우 전 의원 ⓒ사진=노승우 제공

박정희 정권은 YH 사건을 계기로 YS 제거에 나섰다. 그해 9월 8일 YS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이 내려지고 10월 4일 의원직이 박탈됐다. 하지만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전개됐고 마산과 창원으로까지 시위가 확산됐다. 이후 10·26 사건이 발생하며 '서울의 봄'이 찾아온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고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발생한다. 이 무렵에 대해 노 전 의원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980년에 제가 얼마간 한국에 있었습니다. YS는 가택 연금되어 있었고요. 저는 매일 아침 연합통신 사무실로 출근해서 외신을 번역한 다음에 YS 비서인 김덕룡에게 줬습니다. YS가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한 외국의 반응 등을 궁금해 했으니까요."

"외대 학보에 광주 사진 쫙 깔어"

이후 노 전 의원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1982년도에 귀국, 외국어대학교 교수가 됐다.

"교수를 하면서 외대 학보 교수 편집인을 맡았어요. 그 때만 해도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일간신문에서는 한 줄도 못 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전두환이 '언론통폐합' 같은 것을 하면서 무지막지하게 언론을 탄압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외대 신문에 광주문제와 관련한 사진을 쫙 깔았습니다. 정보부에서 난리가 났고 배포를 중지하라고 했습니다. 황병태 총장도 제게 '좀 기다리라'고 했지만 저는 배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신이 나서 뿌렸습니다.

그러자 정보부에서 저한테 협박성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다. 대학 안에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너희가 오히려 침해를 하는 것이다. 교권을 침해하는 것이다'라며 싸웠습니다. 그 때 이희옥이라는 조교가 옆에서 제가 그렇게 통화하는 걸 다 봤습니다. 이희옥은 지금은 교수가 됐는데 그 친구가 증인입니다. 당시 다른 대학 신문들은 외대 신문 수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고 자신들의 신문 수위를 결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제가 교수 편집인에서 물러나게 됐습니다."

노 전 의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발생한 동아일보 사태 때도 미국에서 사람들을 모아 언론탄압 반대 선언을 했다. 또 백지 광고를 모집해서 동아일보 본사에 보냈다. 그가 언론 자유에 애착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외대 학보 교수 편집인에서 물러난 뒤에도 멈추지 않고 반독재투쟁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1986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을 때 시국선언 교수로 앞장선다. 전두환 정권에서 시국선언 교수가 되려면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제가 교수들을 모아 시국선언을 하려고 여러 교수들과 접촉을 했는데 '부인하고 얘기한 뒤에 결정하겠다' '부모님과 상의 하겠다'면서 즉답을 피하더라구요."

노 전 의원이 소위 '시국 교수'라고 해서 무조건 운동권 학생들을 감싸고 돈 것만은 아니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있었는데 대학교 담장의 블록을 깨고 있는 겁니다. 그 것을 가지고 전경들에게 던지려고 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막 나무랬어요. 부모님들이 힘들게 마련해주신 등록금으로 마련된 대학시설을 깨부수는 게 말이 되냐고요. 그 때 저는 운동권 교수였기 때문에 그 학생들도 저한테는 대들지 못했어요. 제가 혼을 내니까 그 자리에 있더 학생들이 다 돌아갔어요. 그런데 한 학생만 남아 있더니 저한테 이러는 겁니다. '교수님 어차피 이 담장은 너무 오래돼서 새로 바꿔야 합니다'라고요. 그런데 담장이 오래된 건 사실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웃을 수도 없고…, 할 말이 없더라구요."

"동우산악회 유지…민주산악회 명맥 이어"

-민주산악회 활동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제가 1990년에 동우산악회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지구당 위원장을 한 동대문의 '동'과 제 이름 노승우의 '우'자를 결합해서 '동우'라고 했는데 3천명 정도 됐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도에 민주산악회가 전국적으로 발족했는데 그 때 동우산악회에서 민주산악회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한 동안 '동우민주산악회'로 불리기도 했어요. 나중에 민산이 해체된 뒤에 다시 동우산악회를 복원시켰고 지금도 매달 두번씩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 동우산악회 사무실이 지금도 휘경동에 있어요. 크리스마스 행사를 꼭 하고 산신제를 1월에 합니다."

 

-YS가 집권 직후에 민산을 해체한 것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강을 건너려며 뗏목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나무를 모아 뗏목을 엮어서 강을 건너야 하는데 일단 강을 건너면 뗏목이 짐이 되기 때문에 놔두고 가야 합니다. 뗏목의 역할을 한 동지들을 생각하면 정말 애가 타죠. 자신들의 가족이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민산을 위해 헌신한 동지들 아닙니까.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YS 입장에서는 버리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하면 부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민주산악회를 완전히 없애기 보다는 이름과 성격을 바꿔서 유지했더라면 동지들에게 조금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민주동지회 모임이 있을 때 보면 국회의원 출신만 소개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민산에서는 부장이나 차장들이 정말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집에 먹을 게 없는데도 민주화 깃발을 들고 나온 것 아닙니까. 그들에 대해 인정을 해야 합니다."

노 전 의원은 이날 최종두, 윤인권, 김지은 등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민산 간부 등을 언급하며 이들의 노고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점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YS, 깨끗했기에 금융실명제 할 수 있어"

-민산을 조직하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돈은 어떻게 조달했나요.

"민주산악회에 누가 돈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지회장들이 자체적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에서 땡전 한푼 받은 적 없습니다. 그리고 YS도 결백한 사람입니다. 그 분한테  개인적으로 쓰라고 돈을 줘도 절대로 안 받습니다. 공천과 관련해서도  절대 안 받습니다. YS가 깨끗했기에 금융실명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YS가 '하나회'를 척결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YS는 과감했습니다. 그 바람에 노태우·전두환이 어떻게 됐습니까."

-YS의 3당 합당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군정에서 민정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인 게 필요했다고 봅니다. 3당 합당이 바로 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군사정권이 계속 이어졌고 '리비아' 유혈사태 같은 게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10·26 이후에 전두환 정권이 나올 것으로 누가 예상했습니까. 민주화가 될 것 같았지만 군사정권이 또 다시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현재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데요.

"역사라는게 50년이 지나야 평가가 가능합니다. '반 고흐'도 죽은 지 40년 뒤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YS는 민주화의 기반을 만든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그런 인정을 받을 것으로 봅니다. 사실 본인은 깨끗하게 잘했다고 봅니다. YS가 민주화에 기여한 것은 '팩트'입니다. '팩트'는 살아서 남게 됩니다. 국민들이 냉정하게 눈을 뜨고 봐야 합니다. 금융실명제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공과 과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시대 분위기에 휩쓸려 과거 정권을 평가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YS, 민주화 초석 놓은 최초 대통령으로 인정 받을 것"

-YS가 재평가 받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다고 보나요.

"그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승자의 역사만 기록하고 패자의 역사는 기록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한국적 정서가 비명에 간 사람들에게 후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보약을 먹으면서 자신의 명대로 살다가 갔다면 지금처럼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겁니다."

-YS의 차남 김현철 씨가 이번에 새누리당 공천을 못받은 것에 대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사면 받았으면 과거 허물에 대한 건 끝난 것 아닙니까. 저도 왜 김현철이 공천을 못 받은 지 모르겠습니다."

-YS가 박 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를 이룬 건 사실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음했습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재를 한 건 사실입니다. 반면, YS는 죽기로 각오하고 헝거스트라이크(단식투쟁)를 했습니다. 그런 점이 반영됐겠지요."

 

▲ 노승우 전 의원과 최형우 전 의원. 1983년 당시 노신영 안기부장은 최형우를 민정당에 끌어들이기 위해 집요하게 설득했다. 괴로운 최형우는 노승우와 상의 후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후 노승우는 최형우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다. ⓒ사진=노승우 제공

앞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노 전 의원은 최형우 전 의원과 가까운 인물이다. 최 전 의원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뇌일혈로 쓰러졌다. 많은 사람들이 최 전 의원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조직에서 앞선 최 전 의원이 대통령 후보가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말한다. 이날 그는 최 전 의원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했다.

 

"최 전 의원이 굉장히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최 전 의원에게 도움 안 받은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이재오와 손학규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최 전 의원이 쓰러진 뒤에 병원에 갔더니 겨우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 전 의원이 청와대에 자기 사람을 많이 심지 못했습니다. 너무 순수한 면이 있습니다."

인터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됐다 싶어 다시 화가로서의 노 전 의원의 삶에 대해 물었다.

-언제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나요.

"제가 서천중학교를 다녔는데 왕복 16km 거리였어요. 너무 멀어서 학교 숙직실에서 잘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단짝 친구인 동수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정말 귀했던 파카 만년필을 상품으로 받았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환경미화는 제가 도맡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미대에 간 줄 알아요. 그런데 먹고 사는게 힘들었기 때문에 미대에 가지 않았어요. 교수생활을 할 때는 학생들 미술 동아리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신민당 대외협력위원장을 할 때 태국 궁중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저는 그 곳 복도에 걸려있는 그림을 유심히 봤습니다. 국회의원 하면서도 전시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노 전 의원은 15대 국회의원 생활을 마치고 2000년 미국 뉴욕에 있는 140년 전통의 '아트 스튜던트리그 오브 뉴욕'에서 수학했다. 그는 화가로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숨겼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주변에서 그가 국회의원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였다. 이런 그의 비밀이 들통난 것은 그가 개최한 전시회에 이명박 대통령의 화환이 전달되면서였다. 그림 분야 선배들이 노 전 의원을 향해 '자네, 옛날에 뭐했었어'라고 물어봤고 노 전 의원은 미안함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추구하는 철학이 있나요.

"저는 인간성 회복을 철학적 기반으로 합니다. 사랑, 피스(평화), 하모니(조화)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잃어버린 것을 찾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 사람이 찾아와서 보는 그림보다 한 사람이 백번 보고 싶어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봅니다. 혼이 들어가야 하고 자기를 표현해야 합니다."

이날 노 전 의원의 화실에는 '파리의 오늘'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여러개 걸려있었다. 아직 미완성된 그림이지만 마음에 평화로움을 줬다. 민산의 민주화 투쟁 정신이 평화스러운 그림으로 승화돼 영원토록 기억될 수 있을 듯 싶다.

한편, 이날  인터뷰 도중 노 전 의원의 부인이 지난 '한보 사건'과 관련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요즘도 길을 걷다가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또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한보 사건은 노 전 의원이 1995년 한보로부터 천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사건이다. DJ정부 시절 법원은 이 같은 혐의를 인정했다. 노 전 의원은 "나도 처음에는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며 "하지만 마음을 다스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역모죄를 무조건 뒤집어 씌웠다. 그런데 요즘에는 역모죄가 없으니까 그 사람을 철저히 뒤져서 엮어 넣는 방법을 쓴다"고 짧게 말했다.

담당업무 : 大記者
좌우명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