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몰락] 선거를 보면 그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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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몰락] 선거를 보면 그 끝이 보인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1.05.18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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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서른네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역대 정권 몰락이다.ⓒ시사오늘 김유종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 붉을 순 없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의미다. 영원할 것만 같던 꽃이 언젠가 떨어지듯, 위세가 당당했던 역대 정권도 몰락을 맞았다.

정권의 마지막을 예측할 수 있는 여러 신호가 있다. 하인리히의 법칙에 따르면, 정권 종말 전 29번의 작은 사건과 300번의 잠재적 요소가 존재했다. 수많은 예고 중에서도 ‘선거’는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권력 지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짐작케 했다.

몰락 직전 선거는 어떤 신호를 보냈을까. 그리고 종말 전 정권이 공통적으로 보인 행동이 있을까.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서른네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역대 정권 몰락이다.

 

10대 총선…박정희 몰락


1978년 제10대 총선은 유신 체제의 몰락이자,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알린 선거였다.
1978년 제10대 총선은 유신 체제의 몰락이자,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알린 선거였다.ⓒ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1978년 제10대 총선은 유신 체제의 몰락이자,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알린 선거였다. 유신헌법에 따라 중선거구제로 154석의 지역구를, 간선제로 77석의 유신정우회를 구성했다.

선거 결과, 박정희의 민주공화당(31.7%)이 야당인 신민당(32.8%)에 1.1%포인트 득표율이 뒤처졌다. 그러나 중선거구제를 채택해, 공화당이 68석 대 61석으로 1당을 차지했다.

총선 참패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9대 총선 이후 YS가 신민당 총재에 당선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유신 헌법 하에서 첫 번째로 치러졌던 1973년 제9대 총선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신민당은 52석(35.6%)로 73석(50.0%)을 차지한 공화당에 의석수와 득표율 모두 참패했다. 그럼에도 김영삼은 “공포 분위기 하에서 치른 부정선거로도 박정희는 의석의 절반밖에 획득하지 못했다”고, 김대중은 “야당의 예상 밖 선전”이라 평가했다.

선전에도 불구하고, 유진산 총재 체제의 신민당은 온건 야당 기조를 유지했다. ‘김대중(DJ) 납치사건’을 비롯해 모든 사안에 침묵을 지켰다. 1973년 DJ 납치사건의 막전막후는 아래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256)

좌측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뉴시스(=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김영삼(YS)은 이러한 신민당 내 기조를 뒤집기 위해 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는 선명 야당 기치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산체제하의 신민당은 실상 유신체제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나는 그 기류를 선회시키고자 무진 애를 섰다. 1973년 12월 17일 부총재로 있던 나는 서울주재 외국특파원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 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중략) 드디어(1974년) 진산도 결단을 내렸다. 신민당이 개헌에 전력투구할 것임을 결의하자는 것이었다. 나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9~40쪽.

그러나 박정희는 야당의 기류 변화에 긴급조치 발동으로 맞섰다.

신민당이 개혁추진을 당론으로 확정한 바로 이 날 정부는 곧바로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 유신헌법 개폐 주장을 일체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유신헌법을 부정·반대·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헌법관련 언동에 대해서는 한 줄의 기사도 못 쓰게 보도금지 조항을 두었고, 이상과 같은 금지조항을 위반할 때는 영장 없이 구속할 수 있으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40~41쪽.

긴급조치가 선포된 지 이틀 후 유진산은 위경련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암을 진단 받으며, 3개월간의 투병생활 끝에 운명했다.

이후 신민당은 새로운 지도 체제 구축에 나섰다. 전당대회는 8월로 예정돼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정희에 대한 선명 투쟁을 줄곧 주장해 온 YS는 당내에서 소수파로 밀려나 있었다.

도전자로서의 선명한 이미지가 나의 무기였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방해공작이 매우 심했다. 나는 간신히 운동원을 지방에 출장시킬 수는 있었지만, 나를 지원하고자 하는 사람도 정보부의 보복이 두려워 돈을 대지 못하는 상태였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45쪽.

그러나 1~2차 투표 1위로 YS가 총재로 선출됐다. 불과 46세의 나이로, 최연소 야당 당수가 된 것이다. 그는 이를 “선명과 강경의 야당성 회복에 대한 국민과 당원의 열망”으로 해석했다.

1974년의 신민당 전당대회는 정통야당의 새로운 출발이고 변혁이었다. 나의 총재 당선은 선명과 강경의 야당성 회복에 대한 국민과 당원의 열망을 담은 것이었다. 동시에 유신 이후 공포정치를 통해 장기 독재체제에 들어간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도전이 본격화되었다는 의미를 가진 대회였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52쪽.

이렇듯 유신 체제 몰락에 대한 열망은 9대 총선에서도 얼핏 확인할 수 있었지만, 미약했다. YS 총재 당선 이후 신민당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면서 상황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압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비등점에 이르렀고, 그 민심의 결과가 10대 총선이었다.

1년 뒤, 국민들은 또 한 번 신민당 총재에 YS를 당선시켰다. 그는 신민당을 찾은 YH 여공들을 보호하고(YH 무역사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와 제명, 이후 부마항쟁까지 일련의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한 해에만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여러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정희 정권은 몰락했다. 1979년 유신 체제의 막전막후는 아래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792)

 

12대 총선…전두환 몰락


1985년 제12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퇴장의 시작을 알린 선거였다.ⓒ김영삼 자서전

1985년 제12대 총선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의 출발점이자, 전두환 정권의 퇴장의 시작을 알린 선거였다. 선거 결과, 신한민주당이 67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됐다.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은 35석에 그쳤다. 이후 신민당 돌풍은 6월 항쟁의 토대를 마련해,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기류 변화의 중심에는 또 한 번 YS가 있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또 한 번 목소리를 잃었다. 이때 그가 긴 침묵을 깨기 위해 택한 것이 23일간의 단식 투쟁이었다. 목숨을 건 투쟁은 가택 연금 해제와 야권 인사들의 각성을 가져왔다.

민주화추진협의회 개소식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김영삼민주센터
민주화추진협의회 개소식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김영삼민주센터

이후 YS는 민주화를 실현할 야권 연대에 나섰다. 그렇게 만들어진 투쟁 기구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다. DJ의 동교동계와 YS의 상도동계가 함께 발족했다. DJ는 “독재의 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고 회고했다. 1984년 민추협의 막전막후는 아래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143)

총선을 세 달 앞두고, 전두환은 국민화합조치의 일환으로 3차 해금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3김(YS·DJ·JP)은 명단에 들지 못했다. 민추협은 선거로 정권을 심판하자는 ‘참여파’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선거의 들러리가 될 수 없다는 ‘거부파’로 나뉘었다. 결국 참여파가 승기를 잡고, 신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총선에 임박해서 발표된 해금조치는 자연스럽게 신당창당 가능성을 가늠해 보게 만들었다. 야권의 해금 당사자들은 민한당이나 국민당 입당을 매우 꺼려했다. 사실 민한당, 국민당은 구색을 갖추기 위한 ‘명목야당’에 불과했다. 대세는 역시 신당창당이었다.

(중략) 한참을 고심한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비록 나 자신은 정치규제로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명실상부한 야당을 창당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국민에게 전두환 정권을 공개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시일이 촉박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억눌려 온 우리 국민들은 전두환에 대한 분노를 표출시킬 기회만 마련된다면 엄청난 힘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마음을 굳히고 신당창당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294~295쪽.

정치인의 해금 조치는 새로운 기운을 움트게 했다. 자연스럽게 신당 창당을 거론했다. 사실 당시의 민한당이나 국민당은 관제 야당이었다. 민추협을 모체로 해서 신당을 창당하기로 했다. 12월 11일 나와 김영삼 공동 의장, 김상현 공동의장 대행의 명의로 민추협의 신당 창당과 총선 참여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민한당 소속이었던 의원들이 신당에 합류하려 대거 탈당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483~484쪽.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을 무렵, 전두환은 총선 날짜를 기습 공표했다. 관행 상 3~4월에 치러지던 총선이 2월로 확정됐다. 그럼에도 불구, 신민당은 창당한 지 불과 25일 만에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언론은 민한당에 이어 제3당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으나, 최종 결과 민한당(35석)의 두 배에 가까운 67석의 성과를 얻어냈다.

DJ는 이러한 선거 결과를 “민심의 명령”이라고, YS는 “선거혁명”이라 회고했다.

국민도, 정부 여당도 그리고 신민당 내부에서도 믿기지 않은 야당의 선전이었다. 참다운 야당 출현을 국민들이 얼마나 갈망하는지, 민주화를 얼마나 열망하는지 알 수 있었다. 헌법을 바꿔서 직접 ‘우리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 표심이었다. 결국 목숨을 건 나의 귀국은 국민들의 민주 의식과 민주 세력의 야성을 일깨웠다.

(중략) 12대 총선은 관제 야당인 민한당을 침몰시켰다. 총선이 끝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 민한당 당선자 35명 중 29명이 신민당에 입당했다.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의 명령이었다. 민한당은 민심의 바다에서 속절없이 가라앉았다. 신민당은 103석의 거대 야당으로 우뚝 섰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493쪽.

마침내 1985년 2월 12일 투표함이 열리자 정부‧여당은 경악했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신민당이 예상을 뒤엎고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1월 18일 창당한 지 불과 25일 만에 얻은 눈부신 성과였다. ‘선거혁명’ 바로 그것이었다.

(중략) 야권이 정치적 동면에서 깨어난 것은 나의 단식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내가 심혈을 기울인 민주산악회와 민추협은 신민당의 산파 노릇을 했다. 그 신민당이 선거투쟁에 참가, 2‧12총선에서 선거혁명을 성공시킨 데 대해 나는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304~305쪽.

이렇듯 YS의 단식 투쟁을 시작으로 DJ가 귀국하며 야권은 다시 한 번 힘을 모았다. 국민들은 야당인 신민당에 표를 몰아줌으로써 불만을 표출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성난 민심은 이후 선명 투쟁하는 신민당 편에서 직선제를 외쳤다. 그 결과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그해 12월 대선은 직선제로 열리며, 전두환 정권은 물러났다.

이와 관련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은 2018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978년 총선에서 야당의 선전으로 박정희 정권이 흔들렸던 것처럼, 85년 12대 총선 돌풍이 전두환 정권을 흔들었다”며 “선거는 반드시 정권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20대 총선…박근혜 몰락


2016년 제20대 총선은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견고한 보수의 몰락을 알린 선거였다. 사진은 2016년 12월 31일 제10차 촛불집회 모습이다.ⓒ뉴시스

2016년 제20대 총선은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견고한 보수의 몰락을 알린 선거였다. 선거 결과, 더불어민주당 123석 대 새누리당 122석이었다. 이로써 2000년 16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됐다.

여기에 국민의당이 38석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제3지대가 자리 잡았다. 정치 지형의 변화는 그해 10월 박근혜 사퇴를 요구하는 촛불 집회로 이어졌으며, 이듬해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청구를 인용했다.

이러한 결과는 여론조사뿐만 아니라 방송 3사 출구조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여당인 새누리당이 적게는 180석에서 많게는 200석까지 얻을 것이라는 전망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공천 과정의 비민주성 등이 원인으로 지목됐으나, 결국 박근혜 정권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기저에 있었다. 이후 20대 총선이 만들어낸 민심의 산물, 여소야대 정국과 제3당 등장은 촛불 항쟁과 첫 탄핵 인용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2021년, 또 한 번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4·7 보궐선거의 더불어민주당 참패는 하나의 신호였다. 선거가 주는 신호를 제대로 읽지 않고, 민심에 역행했던 역대 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유신헌법 개정, 직선제 개헌 등 민의(民意)를 애써 무시한 정권에겐 더 엄중한 민심이 기다렸다. 선거 속 정권 몰락이 보이는 이유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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