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④> 한국정치의 야당사를 그린 『증보판 김영삼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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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책④> 한국정치의 야당사를 그린 『증보판 김영삼과 박정희』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2.05.16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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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박정희, 정의는 누구일까?
박정희 군사독재의 반대편에 YS 있었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증보판 김영삼과 박정희>는 격동의 한국정치사를 담은 책이다.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이 쓴 이 책 1부에서는 김영삼과 박정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지금의 세대들이 박정희를 경제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박했다.
2부에서는 정치인으로 살아온 자신이 정치 50년사를 썼다. 자신이 몸담았던 진산계, 고흥문계, 상도동계 등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어, 한마디로 한국 야당의 정치사라고도 할 수 있다. 책의 중요부분을 발췌해 봤다.

◇문민정부의 업적
노 전 회장은 문민정부의 업적을 크게 7개로 구분해 역설했다.

1.열두 채의 안가(安家) 철거
김영삼이 취임하고 청와대 안의 모든 곳을 순시하는 과정에서 안가를 돌아보면서 이곳이야말로 타락한 독재 권력의 비밀 아지트임을 알아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고 즉시 철거하라고 지시하고 그 자리에 서울시민 누구나 쉴 수 있는 공원을 만들었다.

ⓒ권희정 기자
2.대통령 집무실의 금고 철거
‘통치자금’이라고 이름 붙여 대통령 집무실에 대형금고를 만들어 혼자서 돈관리를 했던 금고를 철거했다.

3.하나회의 척결
군사정부가 군대 내에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불법으로 운영했다. YS는 이를 과감히 척결했다.

4.공직자의 재산 공개
김영삼은 첫 번째 국무회의에서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모든 국무위원들이 솔선수범해 자신들의 재산을 진실하게 공개 할 것을 주문했다.

5.대통령 임기 중 어떤 누구에게서도 돈을 받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오찬이다, 만찬이다’하며 청와대로 경제단체들과 기업인들을 차례로 불러들여 ‘통치자금’이라고 이름 붙여 막대한 돈을 받았다. 하지만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단 한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6.금융 실명제
극비리에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우리보다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도 못하는 금융실명제를 극비리에 진행시켜 번개처럼 단행한 것이다.

7.부동산실명제의 실시
금융실명제는 32년 동안 부당하게 형성된 막대한 돈으로 정치도 경제도 망쳐버린 독재정권금융질서의 난맥을 바로 잡았고, 한편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부동산을 부패의 축으로 진단한 김영삼은 부동산실명제를 과감하게 실시했다.

◇박정희의 본질
필자는 박정희를 크게 ‘독재자’와 ‘친일파’라고 기술했다.

1.독재자 박정희

박정희는 처음부터 내려갈 생각은 없었고 영구집권을 꿈꾸면서 18년이나 앞만 보고 달려왔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일으킨 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무력을 동원해 강압에 의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 국민투표형식을 빌어 헌법을 개악하고 국회도 해산하고 급기야는 국회의원까지도 마음대로 임명했다. 그는 늘 헌법위에 있었고, 헌법의 어떤 규정도 박정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헌법을 네 번이나 고치면서 가지고 놀았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헌법의 존엄성을 정중한 자세로 대하지도 않았고 지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독재는 안 된다, 전통적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우리는 철저하게 배웠다.                       

<증보판 김영삼과 박정희> 표지.

2.친일파 박정희

박정희는 확실한 친일파였다. 박정희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에서 농부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취직하여 근무하다가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고 만주의 신경군관학교에 지원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불합격되자 박정희는 ‘죽음으로써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겠다’는 혈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써서 서류에 첨부하여 재차 지원서를 제출하여 이에 일인들을 감동시켜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박정희의 신봉자들은 이를 변명하기 위하여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만주군관학교에 갔었다고 변명한다. 신경군관학교도 일본군이 운영하는 사관학교다.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에서 어느 일본학생 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도하고 충성심도 보여 1942년 3월 졸업생 240명중 1등으로 졸업했다. 신경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미주이찌(南雲忠一)는 박정희에 대해“태생은 조선인 이지만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에서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답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50년 정치사
그의 50년 정치사는 한국 야당사라고 할 수 있다. 

1.YS 단식투쟁

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3주년. YS는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외신기자들에게 부인 손명순이 일일이 전화로 성명내용을 불러줬고, 이는 로이터, AP, UPI, 교토통신 등에 의해 일제히 국제사회에 타전됐다.

그러나 국내신문에는 언론통제로 단 한 줄도 보도가 안됐다. 단식 이틀이 지난 5월 20일 일부언론에서 이를 ‘정세흐름’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한 게 다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상도동측은 YS의 단식사실을 국내에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에 관한 유인물을 만든 후 대학가는 물론, 집집마다 뿌리고 다녔다.

YS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YS를 서울대병원으로 강제 이송시켰다. 당시 전 정권은 단식이 ‘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 측의 체크결과 YS는 오로지 물과 소금만으로 단식을 계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전 정권은 단식 10일째인 5월 27일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을 시켜 회유에 나섰다. 당시 권 총장은 “대통령께서는 총재가 단식을 빨리 끝내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건강이 회복되면 총재가 원하는 대로 일본 미국 유럽 등지로 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이에 YS는 “우리 국민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외국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없다. 나에 대한 연금해제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요구한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이 정권도 이승만 박정희를 따라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다. 권 총장은 이 말을 전두환에게 꼭 전해라”고 맞섰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단식 12일째인 5월 29일. 권 총장은 병실로 YS를 찾았다.
“이날 밤 0시를 기해 총재님의 연금이 해제되며 이제 국내외 어디든 갈 수 있다.”
YS는 이에 “나를 해외로 보내고 싶다면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고 답했다.
권 총장은 반색을 하며 물어봤다. YS는 이렇게 답했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

그리고 다시 단식 17일째인 6월 3일. 김영삼의 건강상태가 극도로 악화됐다. 병원 측은 최소한의 응급조치를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김수환 추기경까지 병원을 방문, 생명보존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로부터 다시 단식 23일째 YS는 병실에 누운 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단식중단을 선언했다. 그의 성명서는 비서실장이던 김덕룡이 대독했다.

“국민 여러분, 나는 부끄럽게 살기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나의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했던……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2.DJ의 4자 필승론

김대중은 변명과 변신의 명수였다.
김대중은 전당대회를 통해 통일민주당의 대통령후보를 뽑자는 김영삼의 제의를 받고 어떤 핑계거리도 없어지자, 마침내 87년 10월 28일 자신의 대통령 출마와 신당창당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나와 오랜 친분이 있던 이중재가 김대중의 대선출마와 신당창당 방침을 전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로 김영삼을 찾아왔다.

김영삼을 만나 김대중의 뜻을 전한 이중재가 수심에 찬 얼굴로 나오는 것을 보고 예감이 좋지 않아 따라가서 물었다.

ⓒ김영삼민주센터
“회장님 불길한 소식입니까.”
이중재가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틀렸어, 다 틀렸어. 나는 호남사람이니 틀린걸 알면서도 김대중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어.”
“그럼 80년대처럼 다잡은 정권을 포기한단 말입니까, 김영삼이 제의한 경선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 말을 듣고 있던 이중재가 말했다.
“내 생각도 노 국장의 생각과 같아. 그런데 김대중은 자기 집 지하방에 나와 양순직, 그리고 몇사람을 앉혀놓고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이 세 사람을 대통령선거에 나오게 해서 넷이 싸워야 김대중이 틀림없이 대통령이 된다고 역설하는 거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강상남북도는 김영삼 노태우가 나눠먹고, 충청도는 김종필이 많이 가져간다고 해도 전라남북도와 수도권은 자신이 절대우세하고 강원도도 자신 있다고, 4자가 출마해야 꼭 당선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고집을 부리는데 어쩔 수가 없어, 이제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어.”

김대중은 기나긴 군정기간 동안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민주화 운동 대열의 지도자로 지내오면서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오면 이상한 변명과 변신으로 대응해서 민주화의 호기를 방해하는 처신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그것도 나라의 발전을 가장 저해하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선거의 전략전술로 정하고 자기가 만든 정당을 둘로 갈라놓은 김대중에게 참으로 실망했다.

3.민주산악회 해체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지 5일이 되던 92년 12월 24일이었다. 민주산악회(민산) 본부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형우 회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와 “지금 김영삼 상임고문께서 불러 다녀오는 길인데, 오늘 날짜로 민주산악회 간판을 내리라고 했으니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최형우 회장은 “민산은 사조직이고 우리의 1차목표인 김영삼 대통령만들기에 성공했으니,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의 국정운영에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임을 이해해 달라”고 설득에 나섰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월계수회의 국정폐해를 생각해 200만명에 달하는 민산 회원들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월권행위 등을 막으려는 대통령 당선자의 깊은 뜻이 담긴 조치라고 힘주어 역설했다.

길게는 30년을 김영삼을 따라 군사독재와 싸우느라고 얼마 안되는 가산마저 지부운영을 위해 털어넣으며 천신만고 끝에 얻은 승리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으라니 아무리 올바른 국정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 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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