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의 시작과 끝은]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며 지역감정 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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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의 시작과 끝은]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며 지역감정 유포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0.01.19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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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승리위해 박정희 후보 ‘지역감정’ 자극, 시초
87년 DJ, ‘4자필승론’ 내세우자 지역갈등 심화
지역등권론, 핫바지론으로 지역분할구도는 현실로
한국정치에 있어 ‘지역감정’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고질적인 지역감정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게 거의 통설이다.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전에서 약간의 지역감정을 자극할 일이 벌어졌다.

신민당 3선 의원이었던 김영삼(YS)은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40대기수론’을 내세운 것. 이에 당내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유진산은 “YS의 대선출마는 그야말로 구상유치(口尙乳臭)”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이후 김대중(DJ)과 이철승이 대선경선에 뛰어들며 ‘40대 기수론’은 신민당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 3자 대결구도로 진행된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1차투표에서 김영삼이 가장 많은 표를 얻어 당선이 확실시 됐다.
 
▲ 김대중과 김영삼

하지만 2차투표를 앞두고 김대중 측은 이철승 측에게 “당신은 전라북도, 나는 전라남도다. 같은 전라도 출신끼리 힘을 합치자. 나를 지지해 준다면, ‘이철승 당수-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콤비를 짜겠다”고 유혹했다. 지역감정을 건드린 것. 이에 이철승은 김대중을 지지, 판세가 역전됐다. 하지만 이는 지역주의라기 보다는 ‘애교’에 가까운 선거전략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7대 대통령 선거 본선에서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측은 선거의 달인으로 불리던 ‘엄창록’을 공화당의 선거캠프로 끌어들였다.

엄창록은 “김대중에게 승리하려면 지역감정을 자극하라”는 메시지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에게 전달했다. 4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영남지역에 대대적인 전단지가 뿌려졌다. 내용은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였다. 이런 괴문서가 나돌자 영남인들의 표심은 ‘박정희’를 향했다.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약100만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영남에서 박정희는 김대중보다 약 170만표를 더 받았다. 반면 김대중은 호남에서 박정희보다 약 70만표가 앞섰다. 결국 표차를 계산해 보면, 박정희는 지역감정을 자극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후 지역감정은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18년 만에 부활된 대통령직선제 아래에서 치러진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의 가장 큰 이슈는 ‘군정이냐, 민정이냐’였다. 군 출신인 집권여당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맞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는 YS와 DJ라는 두 대권주자가 있었다. 당시 국민의 염원이라 할 수 있는 ‘군정종식’은 야권 단일화가 이뤄지면 가능할 듯 보였다. 박찬종 등은 삭발을 하며 ‘단일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둘은 끝내 야권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아예 통일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자체가 없었다. DJ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딴 살림을 차렸다.

‘4자필승론’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선에 모두 참여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다. 이론적으론 그럴 듯했다. 영남에서 노태우 후보와 YS가 표를 나눠 갖고, 충청에선 김종필(JP) 후보가 표를 독식하면, 호남과 수도권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은 DJ가 대통령이 된다는 가정이다. 한마디로 지역감정에 기댄 표계산법이다.
 
▲ 7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지역감정이 생겨났다는 게 통설이다. YS와 박정희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1992년 대선에서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김영삼 후보가 대구지역 유세도중 “우리가 남이가”라며 영남인들의 집결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도 거의 ‘애교’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주의는 극성을 부렸다.

YS에게 패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외유를 떠났던 DJ는 ‘지역등권론’으로 무장한 채 민주당 지원유세에 나섰다. DJ는 “한 줌밖에 안되는 특권지역이 권력을 독점하는 지역패권구도를 깨야 한다”며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민자당으로부터 용도폐기 됐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도 ‘핫바지론’을 내세우며 충청표를 훑기 시작했다. 대통령이었던 YS도 이들의 행보를 막기 위해 충청은 ‘이춘구’를, 호남은 ‘김덕룡’을 내세워 배수의 진을 쳤다. 하지만 이들이 DJ나 JP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지역주의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AP통신이다. AP통신은 선거결과를 놓고 “이번 선거의 승자는 지역주의고 패자는 김영삼 정권”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시작된 지역주의의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2010년 현실정치에서 보면 지역주의는 엄연한 현실이 됐다. 정치판에는 영남당이라 불리는 한나라당과 호남당이라 지칭되는 민주당외에는 없는 듯 보여 진다. 있다면 자유선진당이다. 하지만 자유선진당도 충청지역을 발판으로 만들어 진 지역정당에 불과하다.

더욱이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두 번이나 지냈던 이회창 총재가 자신의 선영이 충청남도 예산에 있다는 이유로 지역정당의 수장이 돼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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