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抗爭日記] “그 해 요원의 불길이 타올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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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抗爭日記] “그 해 요원의 불길이 타올랐네”
  • 정세운·윤진석 기자
  • 승인 2021.07.2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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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살 박경옥의 6월항쟁 일기
1987년 1월 故박종철 열사 추모부터 6·29선언 받아내기까지
6월 민주항쟁 한복판 현장서 기록된 생생한 그날의 항쟁일기
박경옥 전 민추협 여성부장의 87 민주화 항쟁 기록 전문 공개
실질적 민주화 이룩한 민추협, 수많은 민들레 홀씨들에 감사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윤진석 기자]

박경옥 전 민추협 여성부장의 87 민주화 항쟁 기록 전문 공개에 앞서 민주화 주역들을 재조명하다ⓒ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박경옥 전 민추협 여성부장의 87 민주화 항쟁 기록 전문 공개에 앞서 민주화 주역들을 재조명하다ⓒ시사오늘(그래픽=이근)

그날은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초복이니 삼계탕을 준비할 예정이라며 시간 될 때 가져가라는 복지사의 말이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초여름 망월사역 주변 언덕배기 위 열세 평 남짓의 다세대 주택에 사는 박경옥 씨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관할 기초생활수급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이 안내하는 모양이었다. 

앞서 마중을 나온 박 씨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목욕탕에 갔다가 현기증이 나 쓰러진 뒤 거동이 쉽지 않다고 했다. 홀로 병원 신세를 지면서 돌봐줄 가족이 없어 좀 더 힘들었다는 얘기가 담담하니 스쳤다. 

눈이 깊고 선했다. 커다란 눈망울엔 소녀의 꿈같은 자화상도, 슬픔도 회한도 모두 담겨 있었다. 1937년생이면 85세다. “살아 보니 갈 날이 보여”라고 했다. 어떻게 보인다는 걸까. 적막 속 아득하니 창공을 나는 한 마리 새가 망망대해를 빙그르르 날다 돌아왔다.

작은 거실을 둘러봤다. 김영삼(YS) 전 대통령,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등 민주계 거목들의 생전 사진이 들어왔다. 그 옆에 선 젊은 시절의 박경옥, 그도 웃고 있었다. 

 

민주화와 민추협 


지위 고하 막론하고 모두가 민주화 동지들이었다. YS가 이끈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서 그는 여성부장으로 통했다. 

5·18 광주의 참상을 알린 YS 단식을 계기로 범야권 세력이 기어이 동면을 깨고 ‘민주화 투쟁’을 선언하며 한데 뭉쳤다. 1984년 5월 18일 외교구락부에서 발족한 범야권 정치결사체, 이른바 민추협이다. 후에 주축인 상도동계는 물론 DJ(김대중) 동교동계를 비롯해 공화당, 진보당, 민한당 출신들이 결합했다. 
 

직선제 개헌 요구하며 가두행진하는 민추협 YS와 최형우 전 장관, 김수한 전 국회의장, 이민우 의원 등ⓒ김영삼도서관
직선제 개헌 요구하며 가두행진하는 민추협 YS와 최형우 전 장관, 김수한 전 국회의장, 이민우 의원 등ⓒ김영삼민주센터

현재 민추협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성공하기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주역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왜 그럴까. 6월 민주항쟁이 민주화의 변곡점이었다면, 민추협은 6월항쟁의 산실이었다. 민추협이 있었기에 민주화 투쟁은 산발적 투쟁에서 조직적 투쟁으로 발전했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재야·학생·종교계·시민이 함께하는 거대한 판이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기까지 선거혁명이 있었다. 민추협을 모태로 창당한 신민당이 12대 총선에서 관제 야당을 갈아치우는 돌풍을 일으켰다.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제도적 시스템 안에서 민의가 무엇이고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어느 정도인지 승리로써 증명했다. 제아무리 전두환 정권이래도 성난 표심 앞에서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선명 야당은 부활했고 시대는 달라지고 있었다. 제도권부터 시작한 바람을 마중물 삼아 재야, 학원가도 자신감을 회복해갔다. 

민추협은 이후에도 중요한 분기점마다 기폭제가 돼줬다. 민심이 앞서나가도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공염불이 되고 마는 한계를 딛고 선거 제도를 개혁해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민주산악회와 연동해 전국적으로 투쟁 조직을 넓혀갔다. 신민당과 함께 1천만 개헌 서명 운동을 확산하는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일원화돼있지 못한 집단들의 다양한 투쟁 노선을 독재 타도와 직선제 쟁취라는 구호로 통일시켜 대중의 호응을 넓혀나갔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돼줬던 故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세상에 알린 주체도 민추협이었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의 이부영은 감옥 안에서까지 취재한 사건의 전모를 그의 친구인 민추협 소속 김덕룡에게 처음 전달했다. 정치권에서 발표하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하에 민추협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이를 폭로하게 함으로써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는 결정타를 제공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관련 보도ⓒ시사오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전시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관련 보도ⓒ시사오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을 만든 실질적 주체도 민추협이었다. 통일민주당(신민당 후신) 등 제도권만으로 범대중적 확산이 어렵다고 본 민추협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시민단체, 전대협(전국학생대표자협의회) 등 학생운동, 정의사회구현제단 등 종교계가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범 대중 조직을 만들었다. 바로 국본이었다. 이것이 성공해 전두환 정권이 4·13 호헌조치 후 체육관에서 민정당 후계자를 지목한 그날(6월10일), 전국서 민주항쟁을 일으켜 승전고를 울릴 수 있었다. 

6·29 선언을 이끈 것도 민추협의 역할이 컸다. 수세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YS와 김태룡 민추협 대변인이 청와대를 찾아가 “탱크로 진압한다면 그 탱크가 머리를 돌려 청와대로 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제2의 10·26사태가 와서는 안 된다고 설득한 끝에 6·29 선언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뿐인가. 한국 민주화 운동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지금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든 주역들도 김덕룡 등 민추협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기억되고 있을까. 진주를 품고서도 입을 열지 못하는 조개처럼 민추협의 공은 온전히 드러나 있지 못하다. 이제 겨우 재발견되고 있을 뿐이지, 6월 민주항쟁의 공로 대상에서 그만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한 형편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혹자는 YS와 DJ가 갈라져 1987 대선 단일화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민추협도 흐지부지돼 그 빛을 잃어갔다고 평했다. YS와 DJ라는 걸출한 대통령이 배출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가담했던 조직으로 화려한 명맥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점 때문에 오히려 가려지고 말았다는 지적도 들리는 것이다. 민추협이 지닌 정치적 결사체에 대한 바른 평가와 민주화 운동 전반에 걸친 저변의 순수했던 영역까지 그 가치를 조명받지 못한 원인이 돼 버렸다는 지적이었다. 

 

진정한 주역들   


다행인 것은 민추협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뒤늦게나마 제대로 평가되기를 바라는 목소리들이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박경옥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지난 6월이던가. <시사오늘>에 “이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회고이자 그 시기 민추협 활동에 대한 기록”이라며 오래전 자신이 쓴 일기장을 폈다. 조각조각 쓴 일기장들을 모아 타이핑 한 하나의 원고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며 이 기록물이 세상에 알려져 당대를 구현할 귀한 퍼즐 조각 중 하나로 쓰였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전해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오래전 일기장ⓒ시사오늘(자료 : 박경옥)
1987년 6월 민주항쟁 오래전 일기장ⓒ시사오늘(자료 : 박경옥)

일기장은 1987년 1월 19일 故박종철 열사의 추모 농성으로 시작해 7월 5일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서 끝나 있었다. 그 사이 2월 25일 권인숙 성고문 항소심 공판, 4월 6일 유성환 국시(國是) 사건을 둘러싼 서소문 대법정 안, 6·10 항쟁 당시 국본 투쟁, 6·26 국민평화 대행진을 거쳐 마침내 6·29 선언이 있던 그날의 축제와도 같은 현장의 분위기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민추협 지도자 YS 투쟁기도 군데군데 기록돼 귀중함을 더했다. 

이중 성고문 사건은 1986년 서울대 재학생 권인숙 씨가 노동운동을 하다 적발된 후 부천경찰서서 성고문을 당해 이를 규명하고자 고발했으나 전두환 정권의 휘하에서 번번이 기각돼 국민 공분을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국시 사건은 신민당 소속의 故유성환 의원이 1986년 10월 12대 국회 본회의에서 통일국시 발언을 했다가 국가보안법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다. 민족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분단된 조국에서는 반공이 아닌 통일이 국시가 돼야 한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발언을 한 것인데 전두환 정권에서는 이를 빨갱이로 몰아 구속했다. 유 의원은 이 일로 국회의원 최초로 회기 중 체포돼 옥고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민추협 여성부장으로서 이 같은 현장을 지켜보고 함께 싸워나갔을 박경옥은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짧게나마 그날그날의 투쟁일기를 기록했을 터였다. 기막힌 것은 ‘폴로’ 한 알, 알사탕 하나로 견디며 극심한 배고픔을 이겨낸 흔적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6월의 오래전 일기장에선 그는 철저히 기록자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시인이자 수필가인 그가 남긴 또 다른 회고록, 예컨대 <민들레 홀씨> 등을 보면 이런 글들을 쓰기까지 그가 어떤 하루하루를 보냈을지 짐작되고도 남을 가난이 처절하게 기록돼 있다. 평생을 독신인 미혼의 몸으로 무주택 쪽방 생활을 견디며 어찌 그렇게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게 민주화 투쟁에 헌신할 수 있었는지 평범한 시각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내 인생에 내일은 없다’처럼 살아간 들꽃 같은 한 민주화 운동가의 일기장이지만, 단순히 기록물로만 간주할 수 없음을 먼저 강조하고 싶다. 그의 일기는 그처럼 고통스러운 생활고에도 자신의 살을 으깨 민주화 등불로 산화한 이름 모를 수많은 투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정신이 투영됐기 때문이다. 아무 대가 없이 목숨을 내놓듯 민주화의 길을 연 이 땅의 수많은 박경옥 씨 같은 이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찬란한 영광 없이 오늘을 만들어준 민들레 홀씨 같은 이들이여. 감사합니다. 
 

박경옥 전 민추협 여성부장이 전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일기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29일 직선제를 쟁취하기까지의 생생한 현장이 기록돼 있다.ⓒ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박경옥 전 민추협 여성부장이 전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일기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29일 직선제를 쟁취하기까지의 생생한 현장이 기록돼 있다.ⓒ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다음은 6월 민주항쟁 현장 기록 
박경옥 전 민추협 여성부장 글 全文

 

프롤로그
그 해는 요원의 불길이 타올랐네.



1987년 6월 그해, 그때 우리는 왜 그렇게 그들과 맞붙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싸워야만 했던가. 우리란 실체는 누구였으며 그들이란 대상은 누구였는가. 우리란 자신의 안일과 생업을 포기하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인 모든 민주 시민들이었으며 그들이란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군부독재 정권의 실세들이었다. 

전두환 5공 세력들은 자기들끼리 장기집권의 음모를 꾸며놓고 돌아가면서 대통령 해 먹겠다는 야욕의 망각을 드러내기 시작해 그들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인 야당과 재야 저항세력들에 대해 무차별 탄압의 강도를 높였던 것이다. 

시위 학생들이 잡혀 들어가 처절하게 고문으로 죽어갔고 또한 최루탄에 맞아 죽어갔으며 반 정권 사람들이 끌려가서 인간 이하의 고문을 당했으며 깊고 어두운 습지에서 쫓기어 숨어 살아야 하는 수배자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야당을 이끄는 강철보다 강한 지도자가 있었고 비수 같은 일부 언론이 견인차 역할을 했으니 혼연일체가 된 모든 국민이 궐기해 반독재 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앞장섰던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소위 6·29 항복 선언을 받아내기까지 민주화 투쟁이란 화약고가 터지게 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마지막 해인 1987년, 나는 이 한 해 동안 전개되던 일련의 시위 집회에 동참하며 현장에서 겪었던 산 증언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아무리 세상이 천지개벽할 것처럼 뒤집어져도 시계바늘은 멈추지 않는다. 1986년에 쏘아댄 최루탄 여진이 가시지 않은 이 땅에 한 해가 바뀌고 태양은 또다시 떴다. 그리고 1987년 벽두부터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부의 폭력적 만행으로 한 젊은 대학생이 억울하고 분통하게 고문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박종철 서울대생(21세 인문대 언어학과)이 1월 14일 밤 자정, 그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특수기관에 의해 연행돼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수배자인 박 군의 대학 선배 행방을 대라고 심문하던 중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숨을 거뒀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새빨갛고 시커먼 거짓말이란 것이 탄로 났다. 

1월 16일 결국은 사인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박 군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지옥같이 밀폐된 고문실에서 인간 백정이나 다름없는 고문 기술자에 의해 폭행, 전기, 물고문을 당한 나머지 질식사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패륜아 집단들이 저질렀다고 펄펄 뛰며 분노하고 있었다. 

이 엄청난 충격과 격분은 온 국민을 울렸고 가슴을 치게 했다. 아, 하늘도 울고 있는가. 오늘따라 때아닌 겨울비가 온종일 통곡하듯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모두가 울고 있었다. 

 

1월 19일


민추협의 YS와 DJ가 민추협 등 박종철 군 추모 농성에 참석하고 있다.ⓒ김영삼도서관
민추협의 YS와 DJ가 민추협 등 박종철 군 추모 농성에 참석하고 있다.ⓒ김영삼민주센터

민추협 사무실에서는 1월 19일부터 48시간 동안 고(故)박종철 군 추모 농성에 들어갔다. 검은 리본을 두른 고인의 영정 아래 황백국 조화와 애잔하게 타오르는 촛불, 흘러내리는 촛불은 고인의 눈물인가. 

비감한 분위기에 젖은 김영삼·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침통한 심정으로 분향하고 있었다. 두 의장은 오늘부터 각자 하루씩 교대로 철야농성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민추 회원들과 야권 인사, 민주열사 유가족, 구속자 가족들이 민추 사무실에서 철야농성 중에 고문 사례보고와 고문 근절책에 관한 세미나를 가졌다. 조문객들의 가슴에는 ‘근조 故박종철 군’이 새겨진 검은 리본을 달았다. 

좁은 실내에 2백여 명의 농성조 가운데 ‘민주사망’ 붉은 글씨로 새겨진 두건을 쓰고 있는 문부식 전 의원과 조문을 위해 출속했다는 도포장삼에 허연 장발 수염을 한 자칭 도사(?)는 뉴스감이 되기도 했다. 지나던 많은 시민이 과일과 음료수를 갖고 농성장을 찾아와서 분향하고 격려해주고 기도했다. 

민추협 건물 출입문 앞에는 전경들을 배치해 시민들의 분향소 방문 출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민추 회원들은 1월 20일에서 26일을 애도의 주간으로 삼고 시민들 가슴에 검은 근조 리본 달기 운동에 들어갔다. 

 

1월 26일



1월 26일 오후 4시에 기독교 회관에서 ‘고문근절 대책위원회’ 모임이 있었다. 무장 전경들이 회의장과 종로 5가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입장할 사람과 전쟁이나 다름없는 매우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전경들은 김영삼 총재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쪽으로 연발 최루탄을 쏘아댔다. 안개처럼 자욱한 독가스 살포로 눈을 뜰 수 없는 아수라장에서 총재 일행을 너무나 거칠게 저지하는 전투경찰들, 이 와중에서 나는 방독 마스크가 벗겨진 한 전경의 얼굴과 마주쳤다.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 충혈된 눈, 탄력이 없는 약간 벌어진 두 입술, 마치 알코올이나 흥분제로 인해 정상을 일탈한 것 같은 마비된 상태의 인상을 받았다. 
 

6·29 평화대행진, YS와 윤영탁·김명윤·김봉조·홍인길·정대철·박종웅·김동주 등ⓒ김영삼도서관
6·29 평화대행진, YS와 윤영탁·김명윤·김봉조·홍인길·정대철·박종웅·김동주 등ⓒ김영삼민주센터

얼핏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지난 1980년 광주 5·18 사태에서 진압군이 맨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방 의무를 위해 불러들인 우리의 젊은이들. 10여만 명이 넘는 전경들을 권력자의 부당한 인간 방패로 삼고 있다는 것에 전경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찡 울리며 슬퍼졌다. 

이날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에선 ‘故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추방 미사’(일명 인권 회복 미사)가 있었다. 2천여 명이 참석, 성당 마당까지 사람들로 꽉 찼었다. 민추협 여성들은 미사 참석자들에게 검은 리본을 달아주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미사 집전에서 “현 정권은 아우 아벨을 죽이고도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는 카인과 같다. 정의사회, 법치국가란 이름 아래 공공연히 비인간적인 짓을 자행하고 있다. 현 정권이 자유민주주의를 입버릇처럼 부르짖으면서 동시에 인권을 짓밟고 독점 자본주의 체제로서 반민중적이고 반민주적인 행패를 부리고 있다. 이 정권이 뿌리가 있느냐 없느냐. 이 정권의 도덕성에 의문을 느낀다. 이 정부가 양심과 인간성을 회복해 대오각성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인간다운 삶과 정의로운 삶을 원한다. 고문은 인간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강론은 비수 같은 질책으로 일관했다. 

미사가 끝나자 오후 8시 30분부터 밤 10시 30분까지 나는 박 군 초상화 피켓을 든 침묵시위자들과 함께 행진하기 시작했다. 

 

1월 27일



1월 27일 오후 광화문에 있는 변호사 회관에서 변호사협회 주최로 열린 ‘고문 대책 공청회’에 참석하기 위해 뛰어갔다. 건물 초입부터 사복 경찰들이 완강하게 출입문을 저지하고 있었다. 민추 회원들과 구속자 가족들이 저지선을 뚫기 위해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있을 때 누가 내 뒤에서 비상문이 있다고 귀띔을 하길래 잽싸게 뒷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김은호 변협 회장과 쟁쟁한 인권 변호사들이 연단에 앉았다. 변호사측 발언인즉슨 “두 가지 필요의 고문이 있는데 피의자를 자백시키기 위한 사법적 고문과 집권자의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적 고문이 있다. 박종철 군 고문 살해 사건은 치안담당자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 정부의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살인 사건이다”고 규정지었다. 이어서 구속자 가족들의 고문 사례 증언과 구속되었다가 최근에 출소한 남녀 두 대학생이 자신들이 당했던 고문 사례를 증언했다. 

두 대학생의 몰골은 초췌해 보이고 음성은 약간 떨렸다. 그러나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신적인 인간 파괴와 육체의 고통을 이기고 살아남아 이 자리에서 폭로하고 있는 그들의 증언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었다.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더욱이 여대생이 눈물을 삼키며 던진 이 말은 인간적 감성의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아무리 고문 폭로, 고문 타도를 큰소리로 외치고 있다 한들 이 시간에도 깊은 벽 속에 갇혀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는 처절하고 고독한 구속자들의 목청이 찢기는 울부짖음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기막힌 사실은 비분강개한 호소로 들렸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한없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2월 7일


6월 민주항쟁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다.ⓒ시사오늘
6월 민주항쟁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다.ⓒ시사오늘

2월 7일. 시민권 행사와 故박종철 군 국민 추도회 날 행사가 열렸다. 오후 2시를 기해 서울을 비롯, 부산·대구·광주에서 동시적으로 거행됐다. 그 외 도심 교회·성당·사찰에서도 추도 예배가 있었으며, 정각 2시에 모든 차량 경적 울리기와 교회 사찰에서의 타종, 시민들은 1분간 묵념이 예정돼 있었다.

경찰은 이날 아침부터 서울 전역에서 초비상 사태에 돌입했다. 요소마다 5만여 명의 경찰을 배치, 검문검색과 통행 봉쇄로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서 실랑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후 1시가 될 무렵부터 미도파 앞과 남대문 시장 근처, 조선호텔 앞, 시청 앞, 롯데호텔 앞과 종로 일대에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울 8백만의 거대한 도시는 어느새 쇳물이 녹아내리는 뜨거운 불덩이로 달아올랐던 것이다. 

추도식장인 명동성당은 새벽부터 전경들로 하여금 출입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차선책으로 여러 주최 측 단체들은 각기 모여 있는 장소에서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 각 지정 장소마다 수많은 시민이 합세해 고문 추방을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자마자 탕, 타당, 탕탕! 하늘이 터지고 땅이 깨질 듯한 지랄탄(연발 최루탄) 발사가 시작됐다. 사람들 머리 위로 탄피가 날아와 떨어진다. 

온 천지가 독가스로 범람, 군중들은 얼굴을 싸잡고 허둥지둥 흩어진다. 그래도 사람들은 연신 모여들고 쏘아대면 잠시 흩어지기를 수차례 거듭하고 있었다. 마침 정각 2시가 됐다. 교회마다 댕댕댕. 조종(弔鐘)이 울리고 있고 모든 차량은 빵빵빵- 크락션을 길게 울리면서 달리는 가운데 거리에 군중들은 묵념을 하고 있었다. 이때에 사람들 속으로 최루탄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반성의 빛이 추호도 없으니 이 정권은 마치 살인강도가 추적당하자 오히려 흉기를 휘두르는 작태와 다름없었다. 

한편 전경들이 조선호텔 앞을 메운 시위자들을 강제로 밀어내면서 공간을 둥글게 방벽을 치고 있었다. 매우 긴장된 대치 상황이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내 오른손에 박종철 초상화, 왼손엔 흰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이때였다. 백골단 (흰 헬멧을 쓴 전경-초강경 부대였다) 들이 우르르 다가와 끌고 가기 위해 나를 에워쌌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누구냐? 왜 박종철이를 두 번 죽이고 있느냐? 그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지 못할망정 비열하게 공권력을 앞세워 오히려 정부가 국민에게 난동을 부리고 있지 않느냐. 자, 박종철이를 또 죽일 셈이냐? 추도식을 방해하라는 당신들의 상급자가 내린 명령일지라도 부당하다면 용기를 가져라. 이 정권의 부당한 처사에 시민들은 맨손으로 항거하고 있지 않느냐”면서 오열했다. 

그러나 그들은 위압적인 자세로 접근, 나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때 민추 간부들이 소리치며 전경들에게 뛰어들었다. 동시에 운집한 시민들이 몰려와 전경들을 밀어붙였다. 이런 틈에 황명수 민추협 간사장이 추도사를 낭독하고 나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사이 또 한차례 최루탄이 콩 볶듯 쏟아졌다. 눈과 목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갑고 아팠다. 눈물 콧물로 얼굴은 만신창이 된 채 살충제로 죽어가는 벌레처럼 사람들이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뒹굴었다. 

방독 마스크를 착용한 내외신 기자들이 이 장면을 연신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우리는 분통을 삼켰고 노상 추도식마저 풍비박산이 돼 버렸다.
 

박종철 추모 시ⓒ시사오늘(친필 자료 : 박경옥)
박종철 추모 시ⓒ시사오늘(친필 자료 : 박경옥)

 

故박종철 弔詩 

민주 제물 박종철 열사의 죽음 

펄펄 뛰는 생목숨 
억울함 절규 하며 
붉은 심장 찢기는 소리
최후의 몸부림 마저 
깊은 벽속에 갇힌 채
물고문에 죽어갔네 

어디에 있나 
우리 아들아 
한때 시신 조차 탈취 당했다네 
임진강 찬바람 겨울 강물에 
한줌의 재로 날리어 
꽃잎으로 펄펄 나리고 있네 

민주제물이 떠내려 가네 
질곡의 역사가 떠내려 가네 
박종철 열사여!

터지는 가슴속에 분노의 활화산 
두 주먹 악 쥐고 달려 가리라 
독재아성 무너트리고 

자유와 민주 깃폭에 
그의 이름 새겨 들고 
역사의 새 장을 행진 하리라 
-1987년 1월 박경옥 詩-

 

2월 25일



2월 25일, 서소문 서울지법 104호 법정에서 성 고문 항소심 공판이 열렸다. 70여 명만이 들어설 수 있는 좁은 장소에 3백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 큰 혼잡이 일어났다. 재판부가 교도관이 앉을 자리와 피고인이 입정할 길을 터놓지 않으면 재판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1시간 30분 동안 공판이 지연됐다. 

법정에 앉은 사람보다 겹겹이 포개어 서 있는 사람이 몇 곱 더 많아서 몸이 터질 듯했다. 방청객을 제한하고자 의도적으로 소(小) 법정을 택한 것이라고 흥분한 방청객들이 몹시 불만을 터트렸다. 

창백한 얼굴로 권인숙 피고인은 자신이 작성한 항소 이유서를 읽어나갔다. 또렷한 발음과 차분한 억양으로 울분을 삼켜 가며 법정에 떨어지는 혈흔 같은 고통의 언어들, 성 고문 과정 상황의 대목에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그녀의 음성은 끝내 울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피울음이었다. 

숙연하던 방청석에서도 훌쩍거리는 울음이 흘러나왔다. 이태영(전 가정 법률상담소장), 황산성(전 환경처장관) 변론 담당 두 여성 인권 변호사도 울고 방청객 모두가 울었다. 

검찰은 애써 항소심마저 받아들이지 않을 심사를 부렸다. 이때 한 다른 변호인이 “한 젊은 여성의 정신을 파괴시키고도 그녀의 죄명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고 강변하고 나섰다. 

오히려 피고인이 정부와 행동 대원 문귀동이란 경찰을 상대로 성폭행에 대해 피해 배상을 제소한 것을 검찰이 기각해 버렸으니 거꾸로 가는 세상이었다. 법과 질서를 정부 스스로 파괴시키고 있는 독재 정권의 시녀인 사법부 또한 스스로 권위를 추락시키고 있는 꼴이었다. 

 

3월 3일


YS와 민추협 등 민주화 투쟁 참가자들이 경찰의 저지를 받으며 휩쓸리고 있다. ⓒ김영삼도서관
YS와 민추협 등 민주화 투쟁 참가자들이 경찰의 저지를 받으며 휩쓸리고 있다. ⓒ김영삼민주센터

3월 3일,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중에 오늘도 신민당·민추협·민주산악회·재야단체가 故박종철 군 49세 추모행사를 비롯해 고문추방, 민주화 평화대행진이 있는 날로 잡았다. 각기 예정한 장소인 서울역, 광화문, 광교 입구, 을지로, 종각, 종로5가와 기독교회관 신민당사, 시청 앞, 롯데호텔 앞 등에서 낮 정오에 탑골공원을 향해 모든 참가 시민들과 침묵 행진을 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당국은 6만여 명의 전경을 투입, 초동 봉쇄 작전 계획으로 도심 전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종로통 하늘을 보라! 공중에 띄운 오색 고무풍선은 ‘고문 추방’이란 긴 꼬리표를 달고 꽃잎처럼 떠돌며 하늘을 수놓았다. 

시위 군중들은 태극기 수기를 들고 전 지역에서 탑골 공원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또 최루탄인지 지랄탄인지 퍼붓기 시작한다. 시위대들은 독가스의 질식상태에서 흩어져 잠시 몸을 가누었다가 금방 수천 명씩 모여들게 되고 이러기를 반복하면서 노옥자(민추협 여성특별위원장)씨와 나는 탑골공원 정문 앞에서 전경들 포위망에 걸렸다. 그들은 거칠게 우리를 밀어붙이며 내 손에 든 태극기를 뺏으려고 달려들었다. 

“우리나라 우리 국기를 왜 빼앗느냐”고 완강히 대항하면서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 사이에 장기욱(신민당-인권 변호사) 의원이 단독으로 탑골 공원 정문 앞에 세워둔 언론사 보도 차량 위에 올라가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박수치며 함성을 질렀다. 이때가 낮 12시 정오였다. 저녁까지도 서울 거리는 최루가스 여진이 짙게 깔려 있었다. 

 

4월 6일


유성환 의원 통일국시 사건 당시의 일기장ⓒ시사오늘(친필 자료 : 박경옥)
유성환 의원 통일국시 사건 당시의 일기장ⓒ시사오늘(친필 자료 : 박경옥)

 

4월 6일, 오후 2시 유성환(신민당) 의원 7회 공판이 있던 날, 서소문 대법정 안은 백골단, 형사 정보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단히 살벌한 분위기였다. 

유성환 의원 발언 원고를 국회 출입 기자들에게 사전 배포한 것에 대해 김태룡(신민당 대변인) 의원의 증언이 있었다. 이어 담당 변호인 장기욱 의원이 “이 사건은 명백히 ‘반공국시파동 혹은 반공국시시비사건’이라고 규정짓고 넘어 가야한다. 1986년 10월 15일 이후 온 나라가 국시론(國是論) 보도로 떠들었고 또한 국민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현대의 역사는 언론에 기재된 사실이 역사적 사건이라 인정할 수 있다”고 변론했다. 

오늘 결심 공판에서 정민수 부장검사의 논고가 있었다. 유 의원에 대한 검찰의 논리는 왜곡되고 거짓과 허위, 억지로 가득한 논리였다. 상부의 지령에 의한 각색 각본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권력층의 악의와 음모에 기가 막혀 대법정 안과 밖을 가득 메운 천여 명의 방청인들은 숨을 죽인 채 침묵하고 있었지만 참을 수 없는 폭발 직전의 분위기였다. 

나는 진정 참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 검사를 향해 소리쳤다. 

“정 검사, 이 사건은 민주 국민을 재판하는 것이다.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 각색 각본대로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정 검사는 붉은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고 담당 재판관 박영무 부장판사는 창백한 얼굴로 나를 향해 “저 여자가 아니, 저 여자가”를 연발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 방청석은 그야말로 벌집을 쑤신 듯 욕설과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소란 속에서 가장 뚜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전두환 찢어 죽일 놈, 천벌 맞을 놈, 정 검사 내려와.” 성미가 괄괄한 야당 투사 성승표와 김홍 동지였다. 

법정 소란이 일자 재판관은 즉각 10분간 휴정을 선언했다. 나는 겁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당 여성국 유경희 부장이 급히 내게로 다가와 “김덕룡 의원의 권유다”라며 “빨리 이 자리를 피하라”고 재촉을 했다. “잡아가려면 잡아가라지” 내가 버텼더니 유 부장은 “박 부장. 지금 잡히면 안 돼. 우리는 앞으로 싸울 일이 많이 남았어”이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리를 떴다. 청년 당원 두 사람이 법정 밖에서 차를 탈 때까지 나를 호위했다. 

경기도로 들어가는 차창 밖은 주룩주룩 차가운 봄비가 무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왠지 자꾸 눈물이 났다. 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울었다. 

이 길로 나는 신장읍(현 하남시) 청운 독서실에 파묻혀 한 주일가량 민추협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었다. 그사이 보안사 형사가 매일 민추협 사무실에 들려 내 인상착의를 알리면서 찾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김대영 동지가 “그런 여성 여기에 없다. 민추 회원 아니다”고 거짓말해서 돌려보내곤 했다는 것이다. 빈대도 낯짝이 있지, 내  수배는 짧았다. 

 

6월 10일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주최로 박종철 군 고문살인 범죄 조작 은폐 규탄과 4·13 호헌 철폐 범국민운동이 전국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오전 10시엔 민주당에서 규탄 대회를 가졌다. 

김영삼 총재는 대회사에서 “지금 이 시간 민정당은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체육관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누구를 대통령이라고 이름 지으려 하고 있다. 현 정권은 5·17 불행에 이어 또다시 분명한 불행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정권에 대해 함께 민주화를 선언하자, 최후까지 그런 노력을 기울일 것”을 제의하면서 사자후를 토했다. 

오늘이야말로 전국 동시다발로 엄청난 국민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집권자들과 민정당은 지금 이 시각에 잠실체육관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국민의 뜻을 묵살 역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고 직선제 쟁취를요구하는 YS와 DJⓒ김영삼도서관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고 직선제 쟁취를요구하는 YS와 DJⓒ김영삼민주센터

김영삼 총재가 시위 현장에 나서면 길목마다 시민들의 환영과 격려 박수가 쏟아졌다. 그 환영만큼이나 최루탄 또한 비 오듯 퍼붓고 있었다. 오늘도 최루가스로 가득 채워진 서울 천지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독가스실을 닮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가공할 일은 김 총재 승용차에 최루탄을 발사, 차체가 일부 찌그러들기도 했다. 이것은 YS의 신변위협도 불사한다는 저의에서일까?

한편 이날 민주당 여성들은 상도동 사모님 손명순 여사와 당 국회의원 부인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오전 11시경 소공동 롯데호텔 커피숍에 집결해 시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각자 치약 바른 마스크와 투명한 랩을 눈에 붙이고 태극기 수기를 들었다. 가히 기막힌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여성도 이같이 괴상한 자기 모습에 어색해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전선에 임하는 병사의 긴장된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롯데호텔 정문 앞 대열 선두에 오사순 여성국장이 섰다. 그는 민주헌법쟁취, 4·13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구호를 선창하면서 우리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다. 6차선 도로 건너 맞은편 미문화원 앞에 도열, 최루탄을 겨냥하고 있던 전경들이 일제히 발사했다. 

나는 도망가지 않으려고 땅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우리를 밀어내고 치열하게 몸싸움을 하고 있는데 최루탄은 사정없이 날아와 발아래 떨어진다. 롯데호텔 로비에도 최루가스와 사과탄이 굴러 국내외 호텔 손님들이 얼굴을 가리고 혼비백산해 달아나고 있었다. 

오늘 최루탄은 유난히 독했다. 당국은 갈수록 악성 최루탄을 제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아프고 얼굴이 푸석푸석해 있었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최루탄 속에서 하루를 보낸 것이다. 

이날 대도시에서도 지방에서도 밤이 지새도록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속보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6월항쟁’, 혹은 ‘6·10 민주화 항쟁’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6월 26일


민주화기념사업회에 전시된 6월 민주항쟁 당시 대규모 집회 현장ⓒ시사오늘
민주화기념사업회에 전시된 6월 민주항쟁 당시 대규모 집회 현장ⓒ시사오늘

6월 26일, 일명 ‘6·26 대회’인 국민평화대행진이 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열렸다. 오늘 오전부터 전국이 태풍권 안에 들 것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기류가 감돌고 있는 분위기에서 모든 민주화 운동 단체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서울·부산·대구·광주·마산·대전·인천·전주·청주·춘천·제주 11개 도시에서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이 요원의 불길로 타올랐다. 

당국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전경(전투경찰) 전체 병력을 동원해 전국에 투입했다. 오전부터 민추협 사무실 일대는 전경들이 울타리 치듯 3·4겹으로 봉쇄했다. 오후 4시경 수천여 명의 시민들이 물밀 듯 밀려와 운집했다. 민추협 사무실 옥외 스피커에서‘시민들이여, 궐기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는 목소리가 도심을 흔들고 있었다. 

또한 민주당의 평화 대행진 발대식에서 김영삼 총재의 식사(式辭)가 더욱 힘을 실었다. “오늘 우리의 대행진은 짧은 한 걸음 일지라도 역사의 커다란 발자취로 남을 것이다.” 매우 역동적이고 감격적인 격려사였다. 

오후 6시경 가두 행진에 나섰다. 전경들이 무차별 난폭 저지를 서슴지 않았다. 최루탄 집중난사와 함께 국회의원들과 민추 간부들을 강제로 토끼장 버스(경찰시위진압버스)에 태워 김포 가도, 난지도 근처, 안양, 수유리 등 변두리로 실어가서 짐짝 버리듯이 내려놓았다. 

이런 가운데 이날 ‘김영삼 총재와 닭장차’란 일화가 생긴 사건이 발생했다. 행진에 나선 김 총재가 강제로 닭장차에 실려 간 지 1시간가량 행방이 묘연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초긴장했고 부산과 다른 지방으로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때 매우 심각한 반응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였다. 

그 무렵 총재를 태운 닭장차는 경찰 버스 기사가 당황해서인지 잘못 알고 상도동이 아닌 김포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동승했던 김기수 수행 비서와 김용각 국장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호통치는 바람에 급회전 상도동행을 향했다고 자택에서 전갈이 왔었다. 그제야 모두 안도했다. 

흡사 극 중의 한 장면 같은 황급한 상황에서 닭장차 안에서의 김영삼 총재는 전경들에게 “한 사람의 독재자 때문에 우리 많은 사람들이 고생한다”며 위로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날 학생과 시민 가운데 부상자가 수백 명 속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까지 전국 도시에서 시위 과열은 산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과연 장렬한 국민 저항운동이었다. 

나는 밤늦게 마치 전마가 휩쓸고 지나간 전쟁터 같은 삭막한 서울 거리를 걸었다. 낮에 가장 치열했던 격전장인 을지로 3·4가엔 야심한 현재까지도 눈을 찌르는 최루가스 여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흡사 치열했던 전투 격전지를 연상케 했다.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오늘따라 이 지긋지긋한 거리를 탈출해 어디론가 신선한 공기를 찾아 마시고 싶었다. 옆에 있던 민추협 최성덕 차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교외로 달렸다. 기사에게 ‘서울 근교 가장 공기가 맑고 별을 많이 볼 수 있는 하늘 아래로 무작정 가자’고 했다. 내린 곳이 퇴계원이었다. 

아, 과연 상쾌하다. 오랜만에 향기로운 새벽공기가 폐부를 자극한다. 하늘에 별무리가 초롱초롱 천사의 눈빛 같다. 피곤을 삼키면서 시골길을 걸었다. 최루가스 없는 공기가 좋아서 자꾸만 걷고 싶었다. 검은 어둠 사이로 희뿌연 여명이 열리고 있었다. 암흑에 가리어졌던 물체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길·들판·과수원·나무들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땅에 우리의 민주 새벽도 언제쯤 열리게 될까!

 

6월 29일


6·10 관련 구속자 석방이 이뤄지는 가운데 김영삼과 김대중이 석방자들과 포옹하며 기쁨을 나누는 모습ⓒ김영삼도서관
6·10 관련 구속자 석방이 이뤄지는 가운데 김영삼과 김대중이 석방자들과 포옹하며 기쁨을 나누는 모습ⓒ김영삼민주센터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드디어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통해 민주화 조치의 8개 항목을 발표했다. 즉 현 정부가 국민 앞에 백기를 든 항복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발표가 진실로 독재 종식의 선언문인지는 일단 환영하면서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갑자기 내려진 정부 발표에 안도하는 한편 놀라움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이날 김영삼 총재는 논평을 발표했다. 그 일성은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얻어진 눈물겨운 결과가 독재자들을 굴복시킨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국민에게 감사한다”였다. 

나는 오늘 서울역 앞을 지나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3일 전 시위자와 공권력 사이 격전장이었던 이곳, 나는 민추협 동지들과 ‘독재 타도’스프레이 페인팅을 한 시위차를 타고 서울역 광장을 몇 바퀴 돌면서 차창 밖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다. 바로 그때 연도와 육교 위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엊그제의 전쟁터와 오늘의 작은 평화를 느끼면서 감회에 잠겼다. 

이날 많은 시민들은 축제 같은 기분에 들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다방에선 ‘오늘 찻값 무료’라고 써 붙여 놓았고 어떤 영업용 택시기사는 요금을 받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돌이켜보건대 시위가 가장 심했던 1987년에 접어들어 6·29 선언까지 온 시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최루탄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특히 어린아이가 엄마 따라 외출했다가 거리의 최루탄 포진 속에서 눈을 비비며 울고 있는 장면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 어린이들은 지금 40대 세대들이다.) 

 

에필로그 
아침 이슬이 되어 


이한열 군 영결식에 참석한 YSⓒ김영삼도서관
이한열 군 영결식에 참석한 YSⓒ김영삼민주센터

7월 5일, 지난 6월 8일 연대 교정에서 독재 타도 시위 도중 직격탄에 맞아 뇌사 상태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27일 만인 오늘 이한열군(연대생)이 사망했다. 꽃다운 젊음이 민주 제단에 또 하나의 희생양이 되었으니 이 땅에 한 줌 민주화의 밑거름으로 산화된 것이다. 하늘과 땅끝까지 가슴 치고 발을 구르며 온 세상이 젖도록 통곡하여도 모자를 분함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나는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시를 썼다.

아침 이슬이 되어

불꽃 같이 피어난 빨간 선인장 꽃 
스무 해 만에 
아침 이슬 헤치고 너의 고운 자태 
미처 펼치지 못한 채 
어디로 사라졌나 
돌개 바람 소용돌이치는 열사의 한가운데서 몸부림치다 
저 하늘 끝 
최루탄 없는 나라 평화의 땅으로 
학(鶴)처럼 훠훠이 날아가 버렸는가. 

- 대미(大尾)-

 

 

 

박경옥 전 민추협 여성부장ⓒ시사오늘
박경옥 전 민추협 여성부장ⓒ시사오늘

 

민주투사 박경옥…

팔순 여류시인 박경옥은 격동의 80년대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어 혼신을 쏟았다. 1937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이화여고를 거쳐 YS(김영삼)가 주도한 민주산악회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서 여성부장을 맡았다. 때론 민주화 투쟁 한복판에서 생생한 현장을 기록한 기자로, 동지들과 목숨을 내놓고 싸운 투사로 선봉에 섰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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