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정책] 역대 정부, 비핵화·남북 교류 해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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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정책] 역대 정부, 비핵화·남북 교류 해법은?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1.08.05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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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노태우 이명박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서른다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이다.ⓒ시사오늘 김유종

남북 연락통신선이 지난달 27일 복원되면서, 현명한 대북 전략이 요구되는 때가 찾아왔다. 한국은 정전협정 68주년을 맞아 재가동된 통신선을 시작으로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이어가면서도,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경고한 한미 연합군사훈련 실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평화와 안보의 기로에 서있는 셈이다.

한반도는 남북 화합과 대결 구도를 번갈아 경험했다. 이는 역대 대통령이 택한 대북 정책에 기반한다. 각 정부가 마주했던 국내외 환경은 달랐지만, ‘북한 사회 변화’라는 일관된 목표를 추구했다는 점만은 같았다. 핵 폐기를 요구하면서도, 남북 교류를 통해 한반도 평화를 꿈꿨다.

역대 정부가 택한 대북 정책의 흐름 속에 어떤 교훈이 있을까.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서른다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대북 정책이다.

 

노태우 “북핵 개발 명분을 제거하겠다”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기 위한 종합적인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 북한이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 유도 방안을 강구하라. 동서 진영으로부터 북한 개방화를 위한 측면 지원을 확약 받았다.” - 1989.12.05. 국무회의 中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뤄냈다.ⓒ연합뉴스

노태우의 대북 전략의 핵심은 ‘개방’이었다. 그의 핵심 정책인 북방정책은 북한과 관계를 맺고 있는 소련·중국·동구권 국가들과의 교류를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북한이 문을 열지 않으므로 저 먼 데로 돌아가자고 판단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나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 북한을 개방시킬 수만 있다면 통일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믿었다. 어떤 공산주의 국가이건 개방되면 변하게 마련 아닌가. ‘개방=통일’이라는 것이 내가 추진한 대북전략의 기본 개념이었다.

- 노태우 회고록 <전환기의 大戰略> 下편, 141쪽.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인 노태우는 안보에 있어 보수적 관점을 견지했다.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한미 동맹을 튼튼히 하고, 북한에 대한 지원 차단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 ‘자주’를 강조했다. 그는 “북한과의 모든 협상은 한국의 주도 하에 한미 간 협의를 거쳐서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 등을 이뤄냈다.

특히 북핵에 대응할 다양한 전략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노태우는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노력 자체가 안보를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남한의 핵 보유를 선택지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당시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는 있었다.

노태우는 “미국의 핵무기가 한반도에 존재하는 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협력을 얻어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핵 사찰을 받게 하기 위해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 철수를 요구했다. 부시 대통령은 신 핵군축 선언을 통해 전 세계에 배치된 모든 전술핵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북한은 핵사찰을 거부할 명분이 크게 약화됐다.

나는 북한의 핵개발 명분을 제거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남한 내 미국 핵 배치의 부정적 측면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의미에서 ‘비핵화’를 명백히 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판단했다. (중략) 북한이 핵사찰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남한으로부터의 핵무기 철수와 북한에 대한 핵 사용 및 위협 제거를 사실상 수용하는 것이었다.

(중략)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우리가 주한미군 기지를 포함한 상호 시범사찰을 1992년 1월까지 실시하자고 제안함으로써 북한의 표현대로 핵사찰의 ‘유일한 조건’ 조차도 받아들인 셈이었다. 한미 양국이 자신들의 제안을 전격 수용하고 나서자 북한으로서는 더 이상 버틸 명분이 없어져 버렸다.

- 노태우 회고록 <전환기의 大戰略> 下편, 373~374쪽.

이로써 한국이 주도하고 미국의 정치적 결단이 더해져 한반도 비핵화에 다가갔다. 북한은 1985년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고도 안전조치협정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기로 6년 만에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처음으로 북한 핵시설을 사찰했다. 아울러 이와 별개로 남북 상호사찰 체제도 마련했다.

 

김영삼 “대화와 압력을 병행한다”


“남북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 회복이다. 그러나 핵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없이는 절대 신뢰 회복이 불가능하다. 핵 해결에 이어 교류와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된 후에야 다른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 - 취임 100일 기자회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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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남북 정상회담을 16일 앞두고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들었다. ⓒ연합뉴스

문민정부는 시작과 동시에 긴장 국면의 연속이었다. 북한이 1993년 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다. 앞서 IAEA의 6차례 사찰 결과, 플루토늄 추출량이 신고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고, 사찰 중 북한이 영변에 지하 핵폐기물 처리장을 비밀리에 건설 후 가동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추가로 특별 사찰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거부하면서 위기가 발생했다.

북한의 전격적인 NPT 탈퇴는 문민정부 초기에 닥친 가장 큰 시련이었다. 나는 대통령 취임 전부터 보다 전진적인 대북 관계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모적 대결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이끌겠다는 나의 구상은 북한의 핵사찰 거부와 NPT 탈퇴로 수정이 불가피했다. 나는 “대화와 압력을 병행한다”는 대북 기본 전략을 마련하고, 미국과 IAEA, 유엔안보리를 중심으로 다각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上편, 102쪽.

이후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이 핵문제에 합의하기까지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IAEA와 북한의 핵 협상이 결렬되자 한반도는 전쟁 직전까지 갔다. 6월에는 미국이 UN 제재와 상관없이 북폭을 감행하려 하자, 김영삼(YS)가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를 불러 계획을 저지시키기도 했다. YS는 이 시기를 “재임 중 가장 힘들었던 한 시기였다”고 회고하며, “북한의 핵 개발을 봉쇄하면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절대 막아야 했다”는 고민을 담았다.

예상 밖의 역사적 전환은 카터 대통령의 방북에서 찾아왔다. YS는 “1994년 북핵 위기 해소의 커다란 공(功)이 카터 대통령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만큼, 카터가 이끌어낸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위기 돌파구 역할을 했다. 이후 이틀 만에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이 시작됐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과 심장쇼크 합병으로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을 16일 앞두고 무산됐다.

YS는 또 다시 대북 관계의 불확실성에 빠졌다. 불투명한 김일성 사후의 김정일 체제는 한반도의 안정을 저해했다. 8월에 재개된 북미 3단계 고위급 회담은 두 달 후에야 타결됐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이행과 남북대화 재개, 경수로 제공의 대가로 북한은 핵 동결 및 관련 시설 해체, NPT 복귀와 IAEA 일반 사찰을 허용했다.

이렇듯 YS는 북한의 태도를 변화시킬 전략으로 군사 개입 대신 경제 제재를 택했다. 제네바 합의는 경제적 유인책을 통한 북한의 변화 유도 전략으로, 1995년 북한에 기아 문제가 대두되자 YS는 대북 쌀 지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유인책 또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흘러가게 하진 못했다.

북측에 적지 않은 분량의 쌀을 보내주는 온정을 베푼 데 대해 고맙다고 인사를 받기는커녕, ‘인공기 사건’에 이어 쌀 수송선과 선원을 억류당하는 기막힌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북한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한마디로 표리부동한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며, 동족에 대한 배신이었다.

(중략) 대북 쌀 지원은 북한측의 생트집으로 15만t을 지원한 후 중단되었지만, 긴 안목으로 보아 굶주리는 동포들에게 쌀을 주었던 것은 남북 화해 차원에서 민족사에 기록될 만한 획기적 사업이었다고 생각한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下편, 84~85쪽.

이렇듯 임기 말까지도 남북 관계는 긴장 상태였다. 1996년 동해안 무장 간첩 침투 사건은 1994년 북핵 위기 때처럼 한반도를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다. 강원도 일대가 2개월간 전시 상태에 들어갔고, 26명의 무장 간첩 중 1명은 생포, 11명은 자폭, 14명 도주자 중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소탕됐다. 북한의 무력 도발에 YS는 대북 지원 중단으로 맞섰다. 식량난 해결 위한 농업 지원 유보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이 남한에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김대중 “따뜻한 햇볕 아래 평화적 공존 추구”


"태양 정책의 최근 성공 사례는 제네바 합의문이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아무런 해를 끼치거나 대결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진정으로 김정일 정권이 안정되고 경제 위기로부터 조속히 회복할 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따뜻한 태양빛 아래 그들과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고, 공동 번영과 민족 통일의 길로 함께 나갈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 1994년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초청 연설 中

2000년 6월 13일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다.ⓒ연합뉴스
2000년 6월 13일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다.ⓒ연합뉴스

김대중(DJ)의 태양정책은 훗날 햇볕정책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DJ는 비핵화 및 남북 교류를 포용 정책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햇볕정책의 기조에 동의하며 힘을 실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간첩선 등장에도 인내심을 갖고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대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주도하는 경제적 교류를 이어 나갔다.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됐던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3일 개최됐다. 남한이 제시한 의제는 4가지로, △화해와 통일의 문제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 문제 △교류 협력 활성화 문제 △이산가족 문제가 포함됐다. 이에 더해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요청했다.

나는 ‘남북 공동 선언’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이 매듭이 아니라 시작임을 강조했다.

“그들도 이익이 되고 우리도 이익이 되는 일을 같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부터 가능한 것부터, 쉬운 것부터 풀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당연히 믿음이 생기고 이해가 일치할 것입니다. 그런 토대만 놓고 내가 물러난다면 또 뒤에 오는 분이 잘하실 것입니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309쪽.

그러나 궁극적으로 DJ는 북한의 핵 포기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그는 북핵 문제를 미국과 북한의 협상에 의존했다. 정상회담에서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제네바 합의를 준수하고 미국과의 미사일 회담도 잘해서 조속히 관계 개선을 해야 한다”는 언급에 그쳤다.

이러한 태도는 1994년 1차 핵 위기 때도 잘 드러난다. 그는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북핵 해결 방안으로 “북한은 핵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남쪽의 안보를 보장해야 한다”며 “미국은 북한과 외교를 통해 경제 협력에 나서고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는 등 북한의 안보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핵화 문제를 남북 간 논의보다는 미북 협상에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임기 말 2001년 부시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의 동력을 점차 잃어갔다.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의혹을 제기하면서 미북 관계가 악화됐다. 이후 미국이 중유 공급을 중단하고, 2002년에는 제네바 합의마저 와해됐다. 북한은 2003년 NPT를 또 한 번 탈퇴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다.

 

노무현 “북핵의 본질은 북미 관계에 있다”


"북에 대해 일관된 원칙을 견지했다. 흔히 당근과 채찍 이론을 말하는데, 이것을 너무 강조하면 자칫 판을 깨는 강경론으로 흐를 수 있다. 나는 위험한 채찍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밝혔고 그런 원칙을 견지했다. " - 회고록 中

ⓒ연합뉴스
2007년 10월 두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연합뉴스

기본적으로 노무현은 김대중의 대북 정책 기조를 따랐다.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조성렬 박사의 저서 <한반도 평화체제>은 두 정부의 평화 구상을 기능주의적 접근인 ‘평화경제론’이라 정의했다. 대북 경제 지원 및 남북 협력을 통해 북한 사회의 변화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의미다.

한국의 기조는 같았으나, 미국의 대응이 달랐다. DJ 임기 말 출범한 부시 행정부의 강력한 제재가 북한과 계속해서 충돌했다. 노무현 역시 DJ와 마찬가지로 북핵의 본질은 북미 관계에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북핵 문제 협상은 본질적으로 이익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협상”이라며 불확실성 증폭시키는 전략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북미관계는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북한 핵문제는 본질적으로 북미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주도해서 해결하기는 어렵다. 한반도 분쟁과 평화의 직접 당사자이면서도 전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 때문에 5년 내내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48~249쪽.

미국은 강력한 제재와 북한의 고립과 압박에 대한 협조를 요구했다. 반면 노무현은 제재와 압박보다는 대화를 통한 해결을 내세웠다. 정부 간 정책의 엇박자는 ‘한미 갈등’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북미 관계의 악화는 남북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쳤고, 2005년 북한의 핵 보유 선언과 6자회담 무기한 불참 선언이 이어졌다. 노무현은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못한 것은 6자회담의 진전이 없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갈등 끝 2007년 6자회담과 함께 2차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북한과 미국은 여러 번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다. 그래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대선용으로 만들었다느니 하는 야당과 보수언론의 억측은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덮어씌워 본 것일 뿐이다. 진짜 그렇게 믿고 말했다면 무지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누가 주도한 것이냐는 질문도 별 의미가 없다. 상황이 정리되어 정상회담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남북 모두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누가 주도했다고 말할 수 없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62쪽.

노무현은 두 번째 정상회담의 성과로 ‘NLL(북방한계선) 문제 해결’을 언급했다. DJ와 노무현의 공통된 특징은 정치·군사적 문제를 뒤로 미루고, 평화 정착과 경제 협력 방안을 먼저 다루는 전략을 취했다는 점이다. NLL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NLL 문제는 경제협력과 군사적 보장 문제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NLL은 그 지위에 대한 남북의 주장이 서로 달라 충돌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다. (중략) NLL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분쟁 발생을 막는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는 뒤로 미루고 먼저 평화 정착과 경제협력 방안을 다루었다. NLL에 관계없이 필요한 협력을 하면서 이곳을 평화지대로 만들면 분쟁을 예방하고 양측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미리 논리를 세우고 사업 계획을 만들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68쪽.

 

이명박 “남북 교류는 북핵 폐기와 병행돼야 한다”


“나의 임기 이전 10년간 이루어진 이른바 햇볕정책의 본연의 취지는 북한 정권을 따뜻하게 대하여 외투를 벗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우리 정부의 선의를 악용하면서 햇볕정책의 의미는 퇴색됐다.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이 옷을 두껍게 껴입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효과가 나타났다.” - 자서전 中

ⓒ연합뉴스
이명박은 햇볕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대북 정책의 방향을 달리했다.ⓒ연합뉴스

이명박은 지난 10년간 이뤄진 햇볕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했다. 그는 대북 지원이 오히려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에 악용돼 ‘비핵화’라는 본질을 바꾸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대북정책을 쓴 10년 동안 대북 경제 협력이나 문화스포츠의 교류는 크게 활성화됐지만, 군사 관련 논의는 상호 비방 금지나 서해안 해군 당군자들의 긴급 연락 체계 구축 등 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핵 폐기나 군비 감축 같은 비중 있는 정책은 논의 자체가 힘들었다. (중략) 결국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총체적인 문제점이 드러났다.

- 이명박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 304~305쪽.

이명박의 문제의식은 대북 정책에 대한 다른 접근법으로 이어졌다. 그는 우선 북핵 문제를 미국이 아닌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남북 교류와 함께 핵 폐기 문제를 함께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 협력의 경우에도 단순 대북 지원에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의 구상은 비핵개방3000으로 불렸다.

하지만 북한은 “북핵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해서는 결코 남북 경제 협력을 하지 않겠다”고 못 박아 말했다. 이에 이명박은 남북 관계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벤트성 남북 대화를 넘어 본질적인 남북 관계의 변화를 초래하길 원했다. 그러나 북한의 반발은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명박 또한 5대 남북 교류 협력 중단 조치(5·24 조치)로 맞섰다. 그의 강경한 태도는 “북한의 잘못된 행동을 덮어둔 채 교류를 확대한다고 해서 남북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북한은 과거 아웅산 테러와 대한항공기 폭파 등을 통해 수많은 우리 국민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행위임을 부인하며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북한의 잘못을 제대로 묻지 않은 채 대북 포용정책을 내세웠던 과거 정부의 한계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남북 간의 신뢰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취임 전부터 가졌던 내 생각이다.

남북 간의 신뢰 구축은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응당한 대가가 따른다”는 원칙하에 북한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 같은 관점에서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가 선행되지 않는 한, 524 조치는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이명박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 344쪽.

그러나 이러한 대립 역시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모든 남북 관계가 사실상 중단됐다.

이와 관련 통일연구원의 <2000년대 대북정책 평가와 정책대안>에 따르면, 진보-보수 정부 간 대북 정책의 가장 큰 차이를 ‘정경분리’와 ‘정경연계’라고 설명했다. 정경분리란 정치·군사 분야를 경제 분야의 협력과 별개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남북관계의 긴장을 완화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일정한 기여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핵문제를 비롯한 정치·군사적인 이슈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상당한 제약을 받아왔다”고 설명했다.

반면 이명박이 추진한 정경연계 접근법은 경제 협력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의 성격 변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 또한 “정치군사적인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정책화되기 어려운데, 이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울 경우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정책도 실행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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