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실업급여 타는 예술인, 예술원상 받는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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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실업급여 타는 예술인, 예술원상 받는 회장님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1.08.18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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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직후까지 서로 연락하고 지내던 동네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의 별명은 '또라이', 노래방에 가면 꼭 마지막 곡으로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를 부르며 사방팔방 뛰는 친구였다. 그는 그림에 미친 사람이었다. 특히 유화를 좋아했다. 잘 그리는 것 같진 않은데 힘이 느껴졌다. 마치 그 친구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캔버스 밖에까지 구현되는 것처럼. 입시 미술이 싫다곤 했지만 공부도 제법 했고, 결국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미대에 입학했다.

졸업 전시회에서 만난 그는 많이 힘들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즐겁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졸업 후에도 드문드문 술자리를 함께했다. 모임에 누군가가 '백수끼리 뭉쳤다'고 하자, 그 친구가 '그림 그리는 사람은 백수 아니야'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끊겼고, 수년 뒤 그 녀석이 예술의 길을 떠나 평범한 직장을 다닌다는 얘길 건너 건너 들었다. 아마 결혼 때문이라고 했던가.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지난 16일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예술인 고용보험을 도입한지 8개월 만에 고용보험에 가입한 예술인이 6만 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고용보험에 가입한 예술인은 일감을 잃으면 실업급여(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고, 출산할 경우에는 출산전후급여도 수령 가능하다. 예술 창작 활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예술인, 특히 청년 예술인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작품 활동 직후 다음 일을 찾지 못해 강제로 휴식기에 돌입할 때에도, 출산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낼 때에도, 예전보다는 창작에 전념할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벌써 실업급여와 출산전후급여를 수령한 예술인들이 나오고 있다. 실업급여는 13명, 출산전후급여는 5명이라고 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그만큼 가난한 예술인, 배고픈 예술인들이 많다는 의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1억 원 이상 고소득자를 제외한 예술인 3125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4~5월 실시해 발표한 '2020 예술인 소득 및 계약 현황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예술계약 월평균 소득은 81만6000원에 그쳤다. 예술인 고용보험이라는 제도 자체도 재취업 노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술, 문학 등 개인 창작 예술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실정이다.

불현듯 지난 7월 초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문체부 산하 대한민국예술원은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부문 수상자로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을 선정했다. 예술원상은 매년 탁월한 창작 활동으로 예술 발전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예술인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상금은 1억 원에 이른다. 문체부는 보도자료에서 송 회장의 주요 예술 활동에 대해 "1969년 첫 전시를 시작해 52년 간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 2002년 비영리 가현문화재단을 설립하고 한국 최초 사진전문미술관 관장으로서 사진예술의 대중화, 한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2003년 개관한 한미사진미술관은 사진문화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 사진 전시를 기획·개최하는 비영리 기관으로 다양한 전시·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미술계와 사진계 전문가들은 모두 송 회장이 52년간 전업작가로 일한 것이 아니며 사진계에 작업의 성취도, 양식 등의 측면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거나 지명도를 쌓았다고 볼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인 미술평론가도 있었다고 한다. 상금 1억 원은 월평균 81만6000만 원을 버는 예술인들이 10년 이상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할 금액이다. 주요 예술활동이라는 것도 재단 설립, 미술관 개관 등이다. 그가 국내 제약업계를 대표하는 재벌 오너일가가 아니었다면, 과연 예술계에서 이 같은 공로를 세울 수 있었을까. 특혜 여부를 떠나서, 허탈을 넘어 통탄할 일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건 기자뿐일까.

'요리를 기다리는 물고기가 된 것 같다'고 말한 예술인이 최근 있었다. 아마 평범한 예술인들은 이미 지옥불 같이 뜨거운 매운탕에 들어가 펄펄 끓여지고 있는 물고기 신세가 된 것 같다.

-에필로그

이번 기자수첩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또라이' 친구와 통화를 했다.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어 많이 힘들지만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송영숙'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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