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③] 병영문화-아들의 군복무 일기
[일상스케치③] 병영문화-아들의 군복무 일기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1.08.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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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대한의 아들… 입영 통지서 앞에 멘붕
부모 찬스 대신 본인 찬스로 카투사 입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긴 세월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순간순간 아찔하고 노심초사하는 사건들이 끝없이 기다린다. 그중 아들 둔 가정에서 가장 가슴 졸이는 시기는 아마도 군 복무를 앞두고 일 거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언젠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게 타고난 숙명이다. 그러나 익히 염두에 두고 있더라도, 입영 통지서를 받아 드는 순간 당사자 본인뿐 아니라 전 가족의 간담이 서늘하며 숨 막히는 지경에 놓인다.

지금은 세상과 병영문화가 천지개벽했다 할 정도로 바뀌어, 군 복무 중에도 휴대폰을 소지, 외부와 소통하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라떼는 말이야' 하는 구세대인 나의 초등학교 시절엔 국군장병께 위문편지를 쓰며 자랐다. 그 당시 베트남 냉전시대 파월 장병에 위문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멀리 그저 우리나라를 지키는 고마운 불특정 다수 군인 아저씨라는 인식에서, 대학 시절 학과 친구들이 입영 대상이 되고 군 입대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보다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곤 결혼 후 남동생 둘의 군 복무 과정을 겪으며 병역 문제는 가족들의 걱정거리로 좀 더 심각해졌다.

가족 찬스로 동생들의 다급한 병영 현안 해결해

재수생이고 시력이 나쁘던 큰 동생은 현역대신 그 당시 대체 복무인 방위병으로 배정받았다.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거주 중일 때라 인근 경기도 군부대로 출근하며 국방 의무를 이어갔는데, 퇴근하면 저녁마다 힘들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상급 간부의 구타 등 지나친 고압적  태도에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고 계속 고통을 호소해 댔다. 보다 못한 엄마는 군 장성 출신 사촌 오빠에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고향집 근처 부대로 자대 변경, 전보하는 일로 마무리됐다.

그 다음 막냇동생, 카투사에 지원해 의정부 미군 부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부상당했다는 긴급한 연락이 왔다. 부대원 간 농구 경기 중 눈을 다쳤던 것이다. 그것도 안와, 즉 안구를 지탱하는 뼈에 골절상을 입었다. 미군 내 병원에서 CT를 찍어 증상을 확인했는데, 카투사 실제 소속이 한국군이기에 국군 통합병원에서 처치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무엇보다 당장 촌각을 다투는 빠른 수술이 시급했다. 그렇지 않고 시간이 지체될수록 안구가 꺼지는 치명적인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군 내 행정 처리가 매우 늦고 산적한 사고 병사들이 대기 중이라, 언제 순서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방에서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상경한 엄마는 이 일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가족회의를 하며 중지를 모았다. 동생 눈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이었다.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다 다행히 통합병원 고위 관계자와 연결이 되면서 신속한 일처리가 가능했다. 즉각 검사 결과지를 소지하여 등촌동 국군통합병원으로 가라는 통보를 받은 동생이 병원 입구에 도착해 신분과 상황을 알리자, 병원 측에서도 기다리고 있었다며 바로 입원, 신속한 수술 절차가 진행됐다. 사실 일반적 상황에선 불가능한 과정이었다.

처음 가 본 국군통합병원, 내부는 마치 영화나 전시 중 야전병원 상태를 방불할 정도였다. 커다란 홀에 펼쳐진 수많은 침대엔 온통 붕대를 휘감고 목발 짚은 상이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같이 입원한 한 전우는 한쪽 수정체를 다쳐 실명하기도 해, 인조 안와로 교체 수술을 받은 동생은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후 안과의 사촌 언니까지 대동한 엄마가 백방으로 뛴 후 마침내 막내 동생은 입대 10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했다.

그때 외삼촌 병문안을 가 처참한 실상을 직접 목격한 어린 아들들은 군 입대에 극심한 두려움을 갖게 됐고, 자라면서 절대 군대 안 간다고 수시로 거부감을 표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병역의무인지라 시간이 흘러 적령기가 되며 군 문제는 우리 가족을 압박했다. 국군 장병 아저씨께 하며 위문편지를 썼던 어린 소녀는 아들 입영 문제와 직면하는 시간이 됐다.

징징대던 아들, 부모 찬스대신 기도 찬스로 정면 돌파

공부엔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던 아들은 군 복무 문제엔 화력을 집중하며 온갖 방법을 모색했다. 자신의 문제니 알아서 하라고 맡겨 놨더니 왜 우리 집은 부모가 나서서 신경 쓰지 않느냐며 섭섭해했다. '강남에 행세깨나 하는 집 애들 경우, 대개 현역 대신 공익 근무요원으로 빠진다'고 불만을 터뜨리며 원망했다. 하긴 지인 아들도 입대 못할 일이 없게 건강해 보였는데, 피부병이 있다고 진단서를 떼러 병원에 들락거리더니 공익병이 되어 등기소 근무하는 모습을 봤다.

답변이 궁색했던 난 우린 힘이 없어서 아빠 찬스 엄마 찬스니 하는 부모 찬스는 없고 오로지 기도 찬스밖에 없으니, 열심히 기도하자며 아들을 토닥였다. 현실을 받아들인 아들은 카투사를 노려보겠다며 토익 준비를 했고, 그 당시 지원 조건인 토익 700점을 겨우 넘겨 응시 자격을 갖췄다.

추첨 결과, 금식 기도로 총 매진한 덕인지 카투사에 합격됐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해 날아든 아들의 편지를 가슴 졸이며 받아 들고 답장을 하며 시간은 흘렀다. 그다음 관문은 카투사 자대 배치와 보직 문제였다. 가장 꺼린 자대는 GOP와 동두천 제2사단에, 전투병이나 헌병 같은 보직이었다. 영어 구사력이나 훈련 점수를 기초로 배정되는데, 아무래도 전투병보단 행정병 선호가 강해 경쟁이 심했을 것이다.

아들이 바란 자대는 용산이 제1지망이었고, 보직은 운전면허도 없어 운전병도 안 되고 그렇다고 전투병 헌병 보병도 내키지 않아 하더니, 목사님 추천서를 받아 군종병에 지원키로 했다. 이번에도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용산 군종병'을 목표로 또 다시 기도 찬스를 노려 올인하며 결과를 기다렸다.

마침내 용산 군종병이 되다

논산 훈련소 기초 훈련 기간을 끝내고 카투사들만 의정부 보충대로 옮겨, 몇 주 영어 교육과 기본적인 훈련 후 마침내 자대와 보직 발표일이 다가왔다. 영어 성적이 중요하다던데 교육 기간 동안 얼마나 성적이 향상됐는지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연락을 한 아들 왈 "아는 형 꿈에 내가 용산 보급병이 됐더래" 하며 잘 될 테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피 말리는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큰 아들은 '용산 군종병'으로 확정됐다.

카투사 군종병(chaplain assistant), 두 종류로 아들은 chapel 소속이 아닌 군목 보좌라 자대는 용산 소속인데 군목 따라 평택에서 동두천 제2사단까지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운전을 못해 이동 중엔 자신이 모시는 군 목사님이 운전하는 옆 자리에 졸고 앉아 있었다고 하니 자칭 꿀 보직, 속칭 땡보라 할 수 있는데….

주말마다 외출하고 미국 공휴일까지 챙겨 쉬며 매주 집으로 와 잠만 자다 가면서도, 초기엔 군대 군 자도 꺼내지 말라며 예민했다. 숙소도 2인 1실 침대사용하며 분명 일반 한국군보단 여러 근무 조건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았음에도, 처음 겪는 군 조직 사회, 인간관계 등 초기엔 적응하는데 어려움과 미군 부대 특유의 음식이 안 맞아 고충도 있었다. 그래도 말년으로 갈수록 아들은 노련해지고 느긋해졌다.

자식들 군복무 동안은 안심은 금물, 뭘 해도 맘이 편치 않았다.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걱정이 앞서는 게 부모 마음이다. 아들 말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두가 쓰레기라고 했다. 가을 낙엽 지면 끝없이 쓸어야 하고 폭설엔 제설 작업하느라 동원되고 하니, 그동안은 내가 좋아하던 낙엽도 새하얀 눈도 즐길 수 없었다.

편하면 편한 대로 군대는 군대였던 거지만 '거꾸로 메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하듯, 그래도 감사하게 부상 없이 둘 다 만기제대했다. 이젠 예비군으로 편입되어 한 번씩 훈련을 할 뿐 국방 의무는 거의 관심과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렇다고 군 문제 걱정 끝 일까. 세대가 바뀌어 이제 손자들의 차례가 기다린다. 미리 걱정을 사서 하는 측면이 있겠고 아직은 긴 시간이 지나야 하지만, 20여 년 후엔 병영문화가 어떻게 바뀔까 궁금하기도 하다. 앞으로 남북한 문제가 어떤 형국으로 전개될 지 여부에 따라 좌우되겠지만 현재로선 전혀 예측할 수 없다. 70년 남북 휴전 상태, 일체 해결의 기미가 없고 미래는 더욱 안갯속 미궁이다. 

게다가 여전히 지구촌 여기저기 무력 충돌이 남발하고 아프간 사태까지 터지며 불행이 이어지는 인간사. 국내에선 병영 내 불미스런 성범죄로 여군의 극단적 선택까지 반복되니 일부 군대에 부정적인 시선이 쏠리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한미 연합 훈련과 북의 대응이 수시로 뉴스를 장식하곤 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래저래 우려스러운 심정으로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국가 대한민국, 작금의 시국에서 전혀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끝없는 긴장과 대치가 행해지고 있으니, 전쟁 대신 완벽한 평화는 언제쯤 가능할까….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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