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④] 비대면 시대와 70년대 연고전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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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스케치④] 비대면 시대와 70년대 연고전 추억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1.09.0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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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6년이여'...'아카라카' 외치던 학창 시절 추억에 젖는다
메타버스 고연전 기획,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2년째 개최 불발되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연고전 응원과 함성. ⓒ연합뉴스
연고전 응원과 함성. ⓒ연합뉴스

작년 코로나 19로 취소됐던 고려대와 연세대 간 정기 교류전이, 올해는 65년 역사상 첫 비대면 대회로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져 반가웠으나, 아쉽게도 다시 취소키로 결정됐다. 당초 '2021년 정기 고연전(연고전)'은 오는 9월 10~11일 이틀에 걸쳐 무관중 온라인 생중계 방식으로 열릴 예정이었다.

두 학교는 번갈아 가며 대회를 주관하는데, 홀수 해에는 연세대가 주관하고 '고연전'이라 부른다. 고려대가 주관하는 짝수 해에는 '연고전'이다. 올해 행사를 주최하는 연세대 측이 고려대에 대회 개최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급증하는 코로나 확진 사태가 심각해 결국 취소하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비정기적으로, 1956년부터는 연례행사로 구기 경기를 치러 왔다. 그러다 1965년을 기점으로 가을에 이틀간 축구, 농구, 야구, 빙구, 럭비 등 5개 종목 경기가 열리는 관례가 정착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비대면 시대 메타버스 고연전

처음 기획된 2021년 정기 고연전 세부 스케줄을 보면, 9월 10일 오전 10시 30분 목동야구장에서 열리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야구(목동야구장), 빙구(목동 아이스링크), 농구(잠실 실내체육관) 경기가 개최되기로 일정이 짜였다.

마지막 날인 11일 오전 11시 효창운동장에서는 럭비 경기가, 오후 2시 30분부터는 축구 경기가 치러지고, 학생 응원전은 코로나19 여파로 실제 경기장 대신 메타버스 경기장에서 진행될 계획이었다. SKT와 고려대가 메타버스를 기반으로 한 캠퍼스를 조성하기로 하면서 '고연전'을 첫 번째 적용 대상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는 가상·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가리키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현실과 가상이 섞인 온라인 공간을 말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메타버스 경기장에서 거리두기에 관계없이 역동적인 응원전을 펼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 올해 역시 그 모든 계획과 일정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Back to the 1970년대 연고전

이런 신 개념 연고전이라 해야 할지 다소 생소한 형태의 연고전 개최와 취소 소식에, 내가 경험한 과거 70년대 연고전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대학교 신입생이면 모든 게 신기하고 인상적일 따름인데, 학창 시절 4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는 뭐니 뭐니 해도 연고전이다. 봄에는 축제가, 가을이면 연고전이 열리니 캠퍼스가 들뜨고 노천극장에서 응원 연습하는 소리가 우렁찼다. 백양로에 흘러나오는 교내방송은 더욱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연고전은 운동 경기도 경기지만 응원전도 못지않게 재미있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에 연고대 학생들, 졸업생들과 교수진, 학교 관계자들까지 가득 모여, 본 경기 전 응원전이 먼저 치열하게 시작되었고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아카라카

70년대 정기 연고전은 첫날 동대문야구장에서 방송제와 개회식 그리고 야구경기를 필두로 포문을 열었다. 경기 시작 전에 총장님의 개회사와 선포로 화려한 개막식을 하고, 아카라카! 외치는 응원단의 함성소리를 선창으로 학생들이 후창 하며 연고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오후 장충체육관에서 농구, 동대문 스케이트장에서 아이스하키가 동시에 열렸다.

구호 Akaraka, 그 뜻에는 온갖 썰이 있는데 '우리는 승리했다'는 의미로, 음악과 즐거움 아래란 뜻으로 악하락하(樂下樂下)에서 따왔다는 얘기, 또 연세대학교의 상징인 독수리 울음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썰도 있다.

아카라카! 아카라카(아라) 칭 아카라카(아라) 쵸 아카라카(아라) 칭칭 쵸쵸쵸
랄랄라 시스붐바 연세 선수 라플라 헤이 연세 야!

연고전이 열릴 때면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연대 응원 구호다. 후배들 동영상을 보면 응원가도 세월 따라 바뀌어 왔는데, 우리 때는 '뱃놀이'와 '늴리리 맘보' 등이 주 응원가였다. 응원단장의 지시에 따라 모두 기립하여 어깨동무를 한 채, 목청껏 응원가를 떼창으로 불렀고 사이사이 수시로 아카라카를 외쳤다. 그때 의상은 지금처럼 선수들과 같이 청색, 홍색 상의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흰색 상의와 청바지 정도로 통일했다. 그 시절 대학생이라면 다들 상의 한쪽 가슴에 배지를 달고 다녀서 청색의 연대, 홍색 고대 배지로 연고대생 구분을 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응원가와 학생들만 교체됐을 뿐, 동영상과 사진 속 후배들 모습이 바로 그 당시 우리 모습 그대로이고, 열기와 열정만은 넘치면 넘쳤지 모자라지 않았다.

첫날 동대문운동장에서 응원에 전력을 다한 동기들은 야구 경기가 끝나고 농구 경기 전 식당으로 향했다. 과대표가 일행을 이끌어 오장동 냉면집으로 갔다. 한 친구는 그날 처음 비빔냉면이란 걸 먹어봤는데, 너무 매워 라면이나 먹지 뭐 이런 메뉴를 선택했지 하며 혼자 불평했단다. 그러나 맵기만 하고 맛도 모르겠어서 남겼던 그 비빔냉면을, 그 친구는 취직 후 맛집으로 일부러 찾아다녔고, 지금도 처음 먹었던 그 장면이 떠오른다며 회상했다. 연고전과 함께 한 추억의 냉면, 옛 시절을 더듬어 아직도 성업 중인 바로 그 집을 같이 찾아 간 적도 있다.

연고전 하이라이트 농구 응원전

한편, 다른 경기는 티켓 없이 모두 다 입장 가능했지만, 농구장은 장소가 한정되어 있어 미리 티켓 구입을 해놔야 했다. 거기다 농구 경기가 제일 재미있으니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자연히 입장권은 상대적으로 모자라 과대표가 인원을 파악해 구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우리 과 역시 1학년 때 티켓이 부족해, 체구가 작았던 난 과대표의 작전대로 후드 재킷 모자를 뒤집어쓰고 양쪽에 어깨동무를 한 친구들에 둘러싸여 마치 초등학생처럼 위장해 티켓 없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한 친구에게 비빔냉면이 연고전 때 처음 만난 음식이라면, 그 당시 나에게 놀라운 메뉴는 족발이었다. 연고전이 끝난 후 어두워져 과 동기들 단체로 들어간 남대문시장, 입구 테이블에 무슨 발 같은 게 가득 쌓여 있어서 너무 놀랐다. 나한테 문화적 충격을 안긴 그 괴물이 족발 더미라는 건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처음 본 족발에 뭐 저런 음식을 먹나, 미개인 아닌가 하고 놀랐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지.

둘째 날에는 동대문 종합운동장에서 럭비 경기가 먼저 열리고, 그 후 마지막 경기인 축구경기 후 폐회식을 했다. 경기가 끝나면 이긴 팀은 종로로 진 팀은 을지로로 행진을 했는데, 중간 청계천에서 혈기 넘치던 양교 학생들 간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다소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지만 모두들 신나서 스크럼을 짜고 응원가를 부르며 종로, 청계천 그리고 을지로까지 도로를 점령해, 시위 아닌 시위가 되어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그때는 매년 서울시 측에서 종로 일대로 수만 명의 인파가 쏟아져 나올 사태를 예상해, 미리 통행 차선을 막아 대비와 관리를 했다. 학생 운동이 많던 시절이라 정부에서도 학생들 스트레스와 불만 분출 및 시국에 대한 관심을 돌리는 차원에서 양일간 행사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단 소문도 있다.

마지막으로 명동에 입성한 후 도로를 점유해 여기저기 10~20여 명씩 원을 만들어 길에 주저앉아서 아카라카나 둥글게 둥글게를 목이 쉬도록 불렀다. 연고대 학생들과 동문들이 한데 어우러져 놀이마당을 펼치며 연고전을 최대한 만끽했다. 그날은 연고대생이면 모든 게 용서되던 시절로, 지나가던 차량과 시민들도 시민 축제처럼 같이 즐겼다. 젊은 우리들의 다소 지나친 모습도 이해와 용서가 될 정도로 여유와 낭만이 살아 있었다.

처음 보는 후배들에게 졸업생 선배들은 생맥주 한잔 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명동에서 연대 졸업생이라며 넥타이 맨 직장인이 맥주를 사줘 친구들이 공짜술을 얻어먹은 적도 있다. 그렇게 축제 한마당을 펼치며 명동 한복판에 둘러앉아 생쇼를 했다. 땀에 젖은 채 구호 외치느라 목이 쉬고 잠겼어도 귀갓길은 정말 상쾌했다.

스포츠 스타

여러 경기 중 야구와 농구가 가장 인기 있었기에 선수들도 상대적으로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농구선수들은 키가 크다 보니 연대 캠퍼스 내 백양로를 걸어가면 단연 눈에 띄어, 백양로 주변의 잔디밭에 앉아 쉬고 있던 여학생들의 수다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우리 때 독보적인 탑스타는 경영학과에 다니던 야구선수 최동원이었다. 77학번이었는데 경기 없이 수업이 있는 날은 정말 요즘 아이돌처럼 말끔한 사복을 입고 나타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우리 입학 후 4년 내내 연대가 정기 연고전에서 승리를 했고, 당시 최동원 선수 전성기라 마운드에선 그의 존재감은 가히 폭발적이었고 모두들 엄청나게 열광했다.

다만, 참 애석하게도 아까운 선수가 프로에 가서는 학창 시절의 화려함은 다소 사그라지고, 이른 나이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뉴스에서 전해진 최동원 타계 속보를 보고, 하얀 바지에 분홍 티를 입고 문과대학 입구 계단을 오르던 그의 풋풋한 스무 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최동원은 비록 먼저 저 세상으로 갔지만 여전히 영원한 우리들의 우상이자 스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석한 연고전은 1981년도. 이때는 연고전이 아닌 고연전이라 부르던 고대 응원석에 앉아서였다. 심리학과로 전공을 바꿔 고대로 대학원을 가며 대학원 원생들과 함께 간 자리였다. 심리학 공부를 하고팠던 난, 그 당시 연대에는 심리학과가 없어 고대로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됐다. 학부 모교가 연대인 나를 어떤 남학우, 몸은 여기 고대석에 있지만 마음은 건너편 연대에 가 있는 것 아니냐, 응원 똑바로 하라고 농담 삼아 공격을 하기도 했다. 나 역시도 고대석보다 마주하고 있던 연대석으로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연고전인지 고연전인지를 마지막으로, 직접 운동장에 앉아 경기를 관람한 적은 없어도, 멀리서나마 연고전을 응원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교훈처럼 자유, 정의 그리고 진리를 외치던 우리 젊은 날, 연고전 때가 가장 즐겁고 유쾌한 순간이었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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