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18)] 한치만 대구·경북 민주동지회 회장 "박정희 독재가 산업화로 미화돼서는 안 돼"
스크롤 이동 상태바
[民山되짚기(18)] 한치만 대구·경북 민주동지회 회장 "박정희 독재가 산업화로 미화돼서는 안 돼"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2.06.22 17: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 정도 기간 줬으면 경제 발전 충분히 이룰 수 있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주산악회(민산)에서 한치만 대구·경북 민주동지회 회장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한치만 회장은 특히 전두환 정권 당시 대구·경북 지역에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과 민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산되짚기' 18번째 주인공인 한 회장과의 인터뷰는 2012년 5월 15일 <시사오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한치만 대구·경북 민주동지회 회장은 민주산악회 회원들은 끊임없는 민주화 열망 속에서 '불고가사' '불고처자'의 희생정신으로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긍지를 갖고 있다면서 이제 분단된 조국과 겨레가 하나로 뭉쳐 평화통일이 하루 속히 이뤄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고자 한다고 했다. ⓒ시사오늘

한치만 회장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45년 전인 1967년 6·8선거를 술회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 당시 경북·영천 지역이 선거 부정이 가장 심했던 곳입니다. (집권 여당인) 공화당에서 부정선거를 한 현역의원 5명을 제명할 정도였으니까요. 야당에서는 국회 등원까지 거부하면서 부정선거를 규탄했습니다. 저는 영천지역에서 당시 개표 참관인으로 활동했는데 개표 중에 무더기 표가 나오고 해서 투표함 보전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리투표 등에 대해 선거소송을 했습니다."

한 회장은 당시 30대 초반으로 불의를 보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성격이었다. 새벽녘에 무더기 표가 나왔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대충 넘어가려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그러나 그는 선거관리위원회에 항의한 것은 물론, 투표함 보전 신청을 위해 밤새도록 투표함을 끌어안고 지킨 일화가 있다.

-그 때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맞아요. 그 때 저는 순진해서 물밖에 안 먹었는데, 선배들은 '내가 저 놈들(공화당) 때문에 왜 굶어야 하는가'라면서 계란 같은 것을 먹었어요. 하지만 저는 단식을 한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유성환 전 의원도 그런 면에서 저와 같았습니다."

유성환 전 의원은 한 회장과 함께 대구·경북 민산을 이끈 핵심인물이다. 유 전 의원은 '통일국시' 발언 으로 군사독재정권의 엄청난 탄압을 받은 이 지역의 대표적 정치인이다.

한 회장은 1979년 YH사건 때 했던 단식투쟁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다. 당시 그는 신민당 경북도지부 총무국장이었다.

▲ ⓒ시사오늘

"YH 사건이 터지고 이틀만에 대구 도당 사무실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는 단식을 저 혼자 했는데, 도당 조직이 다소 산만하기도 해서 사람들이 모이면 화투도 치고 싶어하고 대포도 한잔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것들을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단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단식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주일만에 주변의 만류로 단식을 중단했는데, 단식투쟁이 나라를 위한 것도 있지만 조직의 단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느낀 계기가 됐습니다."

단식이 화제가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으로까지 얘기가 이어졌다.

"YS의 단식 19일째로 기억하는데 잠시 면회가 될 때였습니다. 저는 그 때 연금되어 있었지만 정보과 형사를 따돌리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병원에 도착해 YS를 만났는데 그 때 방에서 냄새가 났습니다. 단식이 오래될 때 나는 그 냄새였습니다. 방에는 손명순 여사가 계셨고 윤보선, 이민우 선생 등이 다녀갔다고 하더군요."

한 회장이 단식을 하고 있는 YS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정보과 형사들은 곧바로 쫓아왔고 YS가 단식하고 있는 병실 앞에서 한 회장을 기다렸다. 그 정도로 전두환 정권의 감시가 심했다.

"YS가 단식 중인 입원실에서 특유의 냄새"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74년도 신민당 전당대회가 8월 23일 서울 명동에 있는 예술극장에서 열렸습니다. 이 전당대회를 위해 대구지역 조직원들이 대의원들을 방문해야 하는데 유성환 전 의원은 그 때 어느 선배가 하는 기업체 장을 맡고 있는 관계로 직접 못 뛰고, 박위현, 안숙제, 김종한, 한치만 네 사람이 조직요원으로 선발돼서 대의원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해 김영삼 총재를 만났습니다."

그는 YS의 총재 당선을 위해 대의원들을 만나고 설득하는 데 몸을 사리지 않았다. YS의 타고난 인복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대의원들을 몇개월 동안 최소 8번 이상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걸어가고 했는데 그해 여름에 포항에서 한 대의원을 만나고 돌아오다가 왼쪽 다리를 삐어서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전당대회가 한 달도 안 남은 촉박한 시점이어서 치료를 제쳐두고 강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보통 300m 걸으려면 30분 이상 걸릴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아직까지도 인대가 잘못돼서 좀 불편합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제가 영덕 어디를 가서 전당대회 대의원인 최병환씨를 만났는데 그 분이 제게 여비를 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이런 분들도 있더라고 보고를 했고 상도동으로서는 그런 것들에 상당히 고무되고 사기가 올랐습니다. 그해 YS가 총재로 뽑히면서 저와 인연이 됐는데 평소에 지도자로 존경했고, 그 때 보니 함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회장이 이처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키웠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은 이를 무참히 짓밟았다.

"80년 5월 국회 본청 양쪽에 기관총"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가 정치를 장악했고 곧 이어 5·18이 터졌습니다. 그 때 YS는 가택연금 됐었는데 제가 서울 동태를 살피기 위해 5월 19일인가 20일에 YS 집을 찾아 갔습니다. 때마침 YS가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아침에 상도동에 도착하니까 고인이 된 황낙주 부총무 등이 있었는데 YS가 성명을 발표하려고 하니 군인들이 회견장에 들어와서 현역의원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러다 제가 국회에 가보니 국회 본청 양쪽에 기관총 두개가 올려져 있더라구요. 국회의원들도 국회에 못들어갔습니다. 항의를 해도 소용 없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내용을 지방에 내려가서 전했습니다."

-경민산악회는 언제 만들어졌나요.

"그해 1980년 10월 27일은 군사정권에 의해 정당이 해체되고 정당 간판이 내려지는 날이었습니다. 저희 지방에서도 상당히 비통한 심정으로 모여서 당을 해체했습니다. 그 때 유성환 전 의원이 도지부 부위원장이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가 앞으로 모여서 산행이라도 하면서 자주 모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유성환 전 의원이 주축이 되어서 이대우, 이성호, 곽천순, 임차문, 이종훈 선생 등등 9명 정도로 시작했습니다. 그해 11월 27일 팔공산 기슭 식당에서 모여서 경민산악회를 출범시켰고 1981년 1월 초순에 고인 김인갑 선배가 총무를 맡았습니다. 그렇게 지내왔는데 탄압이 보통 심한게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십시오.

▲ ⓒ시사오늘

전두환이 민주세력이 모이는 걸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대구에서 그런(산악회) 모임이 생기니까, 전두환 자신보다도 거기에 과잉 충성하는 세력들, 예를 들어 도지사나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한 짝이 되어서 충성경쟁을 했습니다. 과거 신민당을 했던 간부들과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1차적으로 가해졌습니다."

"경민산악회, 독재정권 탄압으로 해체"

한 회장은 이 대목에서 유성환 전 의원이 구속된 얘기도 들려줬다.

"그 때 야당이 힘이 없을 때인데 이종훈이라는 사람이 유 전 의원에게 50만원을 줬습니다, 이걸 전두환 정권이 역으로 이용해서 '유성환이 청탁자금을 받았다'는 식으로 덮어씌운 겁니다. 결국, 유 전 의원이 강제 연행되어 구속됐습니다. 저희들은 산에서 모여 유 전 의원을 구출해야 한다고 결의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쪽에서 타협안이 나왔는데 '경민산악회를 해체하면 유성환을 풀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층에서는 도저히 해체 못한다고 했지만 연세가 많은 이대우 선생이 '2보 전진을 위해서 1보 후퇴해야 한다. 일단 유성환이 풀려나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저희도 말로만 해체하고 다시 산에서 모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유 전 의원이 구속된지 20여일 후에 석방됐습니다. 그리고 이종훈은 일종의 프락치이고 간첩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종훈은 저희들 앞에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경민산악회의 해체는 생각보다 큰 타격이었다. 산악회 복원이 쉽지 않았다.

"저희가 산악회 모임을 한두달 안 하다가 새로 모이게 되면서 2·7 산악회가 나옵니다. 그냥 경민산악회의 명칭을 바꾼 것입니다. 10월 27일이 정당 해산 날이고 경민산악회 창립일이 11월 27일이어서  2·7 산악회라고 했는데 (전두환 정권이) 또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산악회는 무조건 안 된다고 했어요. 심지어 잡아들이겠다는 협박까지 들어오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2·7 산악회 정식 간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이름을 내렸고 몇개월 동안 이름 없이 저하고 젊은 사람들 5명 정도가 공동운영을 했는데, 그 과정에 부작용이 있고 하면서 침체기에 들어섭니다."

"YS, 대구·경북 산악회 침체에 걱정"

-경민산악회와 민주산악회는 어떤 연관이 있나요.

"저희가 경민산악회 간판을 내리고 2·7산악회가 들어설 때입니다. YS가 1차 연금에서 풀리면서 4~5월 경에 저희가 초청을 해서 팔공산에 모셨는데 아마 저희들이 산악회 하는 것을 보고 좋아서…, YS가 서울에 올라가서 김덕룡, 김동영, 홍인길 등과 함께 6월 9일 (민주산악회를) 출범시킨 게 아니냐는 추측을 했고, 그래서 민주산악회가 우리(경민산악회)보다 1년 늦은 것이라고 얘기하고는 했었습니다."

YS가 대구·경북 지역 산악회에 관심이 많았던 건 사실인 듯 싶다.

"대구가 사실상 선발 주자인데 이 곳 산악회가 침체기에 빠지니까 YS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YS가 저보고 올라오라고 연락을 했어요. YS가 2차 연금에서 풀릴 때 쯤입니다. 당시 김덕룡 비서실장과는 매일 전화연락을 했는데, '한번 서울로 올라오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상도동으로 올라 갔더니 YS가 "대구 어떻게 됐노. 와 산에 요즘 안가노. 그래가 되나. 대구가 잘 나가야 한데. 빨리 해가 규합을 해라'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내려와서 선배들과 얘기를 했지만 잘 안 됐습니다."

이처럼 침체기를 겪던 대구·경북 지역 산악회가 새로운 활로를 맞게 된다.

"서울 민주산악회 3주년이 되는 해인 1984년 6월 9일, 태백산에서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 때 대구에서 정치정화법이 풀리지 않은 사람이 유성환, 임차문, 박인목(사회당), 한영애(동교동계) 등 네사람이었는데 이 분들이 서로 소속이 다름에도 독재 정권에 맞서기 위해 뜻을 같이 하자면서 민산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또, 제가 개별적으로 사람들을 접촉했고 이성호, 곽천순, 최종후, 조화영 등과 한 식당에서 만나 '오늘 우리가 결론을 내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대구에서 산악회를 할 수 없다'면서 그날 저녁에 토의를 했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 회장은 곧바로 새벽 4시 쯤 집을 나와 상도동으로 향했다.

"민산중앙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습니다. YS를 만나 '우리가 새로 결심을 하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YS가 '잘했다'며 '실무는 김덕룡 실장하고 의논하라'고 해요. 이후 (대구 민산 출범) 발표 시기를 조율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대구에 있는 식당인 '화란 동산'에, 2~3백명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예약을 하고 김덕룡 실장과 의논을 거쳐 YS와 이민우 산악회 회장이 함께 내려와서 발표했습니다. 그 자리에 250여 명이 모였고 이민우 회장으로부터 산악회기(旗)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인준을 받으면서 그 전까지는 총무체제였는데 이후 지부장제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인준 받은 이후에도 정보기관으로부터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식당 주인한테도 '밥 몇그릇이 나갔느냐', '음식 값을 수표로 치렀는지 현금으로 치렀는지' 등등 물어보면서 애를 먹였습니다."

"YS, 대구 택시기사 데모 사건 적극 지원…지지도 폭발적"

민주산악회 대구지부가 결성된 직후 대구에서 택시기사 데모 사건이 발생한다.

"그해 1984년에 대구에서 택시기사 데모 사건이 있었습니다. 5 ·25 사건으로 불리는데, 제가 대구 시내를 거쳐 시청 앞으로 오니까 택시들과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전국에서 데모를 못했던 시절인데 대구에서 처음으로 택시 데모가 터진겁니다. 제가 이 문제를 논의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유성환 전 의원과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다 6월 8일 민산 3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태백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유 전 의원에게 '택시 기사들에 대해 무료로 변론을 해주는 것을 YS에게 부탁하는게 어떨까'하고 물었습니다. 유 전 의원은 'YS가 안 그래도 어려운데'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적극 호응 하기보다는 '너가 가서 얘기하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YS 옆에 가서 대구 5·25 사건을 전했습니다. '9명이 구속됐다. 굉장히 어려운 사람들이다. 대구가 특수지역이니 이들의 변론을 맡을 사람도 없고 그 사람들은 변호사를 구할 형편도 못된다'고 하니 YS가 첫말에 '그럼 도와야지'라면서 '실무는 김덕룡 실장과 얘기하라'고 했습니다."

YS는 택시 기사들을 위해 직접 돈까지 지원했다.

▲ ⓒ시사오늘

"이후 김명륜, 박찬종, 김정두(김재규 변론했던 변호사) 등이 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고 원래 대구에 있던 목요상도 합류했습니다. 저는 변호사 선임계 때문에 택시 기사 가족들을 '맨투맨'식으로 만나서 위임장을 받았습니다. 그 때 YS가 어려운 중에 금일봉을 보내왔습니다. 택시 기사들 생계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부인이 해산을 한달 앞둔 사람도 있고, 방세가 밀려 쫓겨나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YS의 이 같은 지원은 이 지역 민심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5·25 사건 그 다음 해에 유 전 의원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택시 기사들이 유 전 의원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됩니다."

유성환 전 의원은 당시 4선 관록의 민정당 한병채와 국민당 이만섭을 압도하며 1위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YS계인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 사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연금돼 있는 YS 지시로 제가 손명순 여사와 YS의 막내 딸 혜숙 양과 함께 대구로 유성환 전 의원을 지원하러 갔습니다. 한 초등학교 운동장이 사람들로 꽉 찼는데 '제가 손 여사가 왔습니다'라고 얘기하니까 청중들이 열광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손 여사와 악수를 하려고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제가 그걸 말리다보니 입고 있던 바바리코트 단추가 다 떨어져 나갔을 정도입니다."

한 회장은 "유 전 의원이 대구에서는 사실상 민산의 지주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1983년 가을 팔공산에서 총회를 할 때 유 전 의원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YS와 이민우 회장을 모시고 300여 명의 회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염소 등을 잡아 풍성하게 대접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유 전 의원이 YS에 대해서는 각별했다"고도 전했다.

"민산 활동하다 돈 없어 식당에 붙잡히기 일쑤"

-민산 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나요.

"돈은 회비제로 했습니다. 1984년도 가을 수도회관(대구)에서 민산회원 500여명이 모였는데 저녁 식사 값으로 150여만원이 나왔어요. 그런데, 돈을 못줘서 제가 잡혀 있게 됐어요. YS와 이민우 회장은 아무것도 모르고 '왜 한치만이는 안 오나'하고 물었다고 해요. 이후에 호텔비도 제대로 치를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제가 아는 분에게 돈을 빌려서 냈습니다. 결국에는 우리 자신들이 돈을 모아서 해결했습니다."

-YS가 집권 직후 민산을 해체한 것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민산이 이나라 민주화에는 그 어느 단체보다 공헌을 했다고 봅니다. 문민정부 탄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만 조직이라는 게 쉬운게 아니죠. 이런 민산을 해체했는데, 당시 상황으로서는 해체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다만, 우리 회원들은 섭섭합니다. 민산을 사단법인체 등으로 만들어 민주주의나 국가관 확립 운동 등을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3당 합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3당 합당은 그 때 상황에서는 구국의 일념이었습니다. 만약 3당 합당이 없었다면 하나회가 척결 안 됐을 것이고 군사독재가 득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3당 합당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DJP연합은 무엇입니까. 연합이나 합당이나 비슷한 말인데 그렇게 비난할 자격이 있나요."

DJP연합은 김대중(DJ)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JP)의 자민련이 연합한 것이다. 당시 자민련에는 소위 TK민정계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박철언 등 TK민정계가 DJP연합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DJP연합 주체들이 3당 합당 비난하는 건 어불성설"

-1987년 대선에서 YS와 DJ가 분열된 것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두 분이 대권에 대한 욕심이 있었는데 정상적으로 '페어플레이'를 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통일민주당을 같이 만들었으면 그 틀 안에서 승부를 걸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떨쳐버리고 (DJ가 다른 정당을) 만든 것은 옳지 않았다고 봅니다. 정상적인 틀을 깨뜨린 건 잘못입니다."

▲ ⓒ시사오늘

-YS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를 이룩한 것을 공으로 치더라도 독재자라는 것을 면할 수 없다고 봅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로 희생된 사람이 많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보다 희생자가 많았다고 봅니다. 물론, 그 사람의 탁월한 지도력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 만한 기간이 주어졌다면 그 정도로 경제를 발전 시킬 수 있었다고 봅니다. 독재와 경제 살린 것을 상쇄할 수 없다고 봅니다. 별개로 평가돼야 하고 독재가 미화돼서는 안 됩니다."

-상도동계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는데 국회의원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1985년 2월 총선을 앞두고 1984년 말에 공천문제가 논의 됐습니다. 그 때 상도동에 갔었습니다. 저는 영천에서 조직활동도 했고 정당조직부장, 선전부장 등을 해서 나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YS와 의논 했는데 결과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장군 출신의 권오태 선생이 민추협에 가입했습니다. YS가 '우리 쪽에 '별'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권 장군이 참여하겠다는 데 어떻게 하는가'라면서 1시간 정도 설득을 했습니다. 권오태 선생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사 2기 동기입니다. 그 만큼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이후 권오태 선생은 3선을 했습니다."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민산 회원들은 끊임없는 민주화 열망 속에서 '불고가사' '불고처자'의 희생정신으로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분단된 제 조국, 제 겨레가 하나로 뭉쳐 평화통일이 하루 속히 이뤄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한 회장은 이날 1974년 12월, 대구 상이군인들이 호텔에 투숙한 YS를 포위한 사건에 대해 얘기 해줬다.

"1974년 12월 20일경 유신철폐를 해야한다며 YS를 비롯한 신민당 국회의원들과 당직자들이 광주에서 데모를 했어요. 2차로 12월 27일경 대구에서 하기로 했고 그 전날 26일 YS가 대구에 와서 금호 호텔에 투숙했는데 27일 새벽에 대구 상이 군인들 몇백명이 모여서 '병신육갑 진위를 밝히라'며 아침까지 소리를 지르고 위협을 했어요. 그러니까 경찰청장이 고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YS가 내려오도록 했는데 이는 YS를 망신시키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그러다 아침에 상이 군인들이 철수했을 때 YS가 나와서 도지부 당사까지 2km 정도 (유신철폐) 행군을 했고 제가 옆에서 모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철모라고 생각하는데 뭔가가 제 머리를 때려서 피를 흘리면서 한 시간쯤 행군을 했습니다. 13바늘을 꿰맸습니다. 저는 경찰 기동대 간부가 때린 것으로 보는데 그 쪽에서는 안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날 대구 상인 군인들이 대구 도지부 사무실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 한치만 회장은 1984년 대구에서 '민권민중의 밤' 행사 때 사용된 현수막 글자가 잘못된 사연을 들려줬다. 당시에는 독재정권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현수막 제작을 부탁할 만한 곳이 없었다.한 회장은 하는 수 없이 시골에 한 노인에게 부탁했는데 행사 당일 '중(衆)'자가 '상(象)'자로 잘못 쓰인 것을 파악하고 급하게 흰색 종이를 붙여 수정했다. 그는 독재정권의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종이가 붙어있는 게 보인다. ⓒ사진=한치만 제공


 

담당업무 : 大記者
좌우명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