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2021년, 경선 불복?…1997년·2002년 ‘후보 교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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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신문 보기] 2021년, 경선 불복?…1997년·2002년 ‘후보 교체론’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1.10.13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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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2002년 그날, 인물·신문의 평가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
이번 열아홉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97년과 2002년 ‘후보 교체론’이다.ⓒ시사오늘 김유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선거 최종 후보가 선출됐다. 그러나 이낙연 캠프가 무효표 처리와 관련해 이의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다. 이 캠프는 사퇴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전체 유효투표수에 포함할 경우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득표율이 49.32%로 과반을 넘지 못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에 민주당 내부에서 후보 교체론이 등장할 것이란 예측이 잇따랐다. 윤석열 캠프의 공보실장인 이상일 전 의원은 “대장동의 진상이 드러나면 민주당에 후회와 한탄이 가득하고, 후보 교체론이 분출할 것”이라며 “대통령 후보로 이재명을 선출한 것을 후회하고 한탄하는 이들로 극심한 내홍에 빠질 것이며, 여기저기서 곡(哭)소리가 들릴 것” 전망했다.

국민의힘 대권 후보였던 장성민 세계와동북아평화포럼 이사장도 “2002년 노무현 후보처럼 당 내부로부터 후보 교체론이 제기되거나 아니면 이재명파와 반이재명친문파로 쪼개질 것”이라며 “이낙연 후보가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이런 변수가 발생할 것을 전제로 한 판단일 것”이라 분석했다.

후보 교체론은 1997년 한나라당과 2002년 새천년민주당에서 두 차례 제기된 바 있다. 내홍은 대권 후보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지지율이 하락하며 선거 승리 가능성이 낮게 점쳐질 때면 어김없이 후보 교체론이 등장했다.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열아홉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97년과 2002년 ‘후보 교체론’이다.

 

1997년 이회창, 이인제 후보 교체론


ⓒ뉴시스
이회창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은 이인제 후보 교체론을 낳았다.ⓒ뉴시스

1997년 신한국당은 9명의 후보 가운데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른바 9룡상쟁(九龍相爭)이라 불렸던 경선은 영입파와 당내파, 민주계와 민정계, 여러 지역 기반 등이 뒤섞여 있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김덕룡·이수성·이인제·이한동 등 4인이 ‘반(反)이회창 연대’를 결성해 맞섰으나, ‘이회창 대세론’을 꺾진 못했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제기된 이회창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은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당내 경선이 끝나자,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의혹에 집중하면서 쟁점화 됐다. 장남이 179cm에 45kg, 차남이 165cm에 41kg으로 체중 미달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문제는 체중 감량에 따른 면제라는 점이었다. 최초 신검에 비해 장남은 20여kg을, 차남은 10여kg 이상 감량해 면제받았다는 공세가 쏟아졌다.

이회창은 “장남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논문 준비 등을 하다 매우 야위었고, 차남은 신경섬 위염으로 고생했다”며 몸무게 자연 감소에 의한 병역 면제라 반박했다.

그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의혹을 사실로 보는 국민들이 많았다. 8월 1일자 <한겨레>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6.5%는 ‘고의 또는 불법적인 병역기피 행위’라고 답했다. ‘합법적인 병역 면제’로 보는 응답자는 14.3%에 그쳤다. 이렇듯 병풍(兵風)으로 이회창 지지율은 20% 대로 급락하며 대권 승리에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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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兵風)으로 이회창은 대권 승리에서 멀어져 갔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대선 후보 지지율 변화 의미 ‘병역’ ‘토론’ 상승 작용

여론조사 결과는 최근의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의 두 아들 병역 문제 논란과 텔레비전 토론이 대선 정국에 예상보다 더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략) 여권 분열의 주요 변수라 할 이인제 경기지사는 신한국당 경선 탈락에도 불구하고 아직 상당한 ‘파괴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야 3당 후보와 함께 이 지사가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국민 지지도는 김대중(32.2%), 이회창(26.1%), 이인제(19.1%), 김종필(10.1%) 후보 순이었다.

이 지사가 대선에 출마할지 아직 불투명한데도 20% 가까운 지지를 얻은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이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만 놓고 볼 때 이 지사는 독자 출마할 경우 당선권에는 들지 못하되, 여야 간의 기존 대결구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잠재력만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 1997.08.01. <한겨레> 3면

지지율 하락 및 당내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신한국당에서 2위로 밀려났던 이인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인제는 9월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신한국당 탈당 및 국민신당 후보 대선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경선 불복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유린하는 처사’라고 비판 받았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YS) 또한 “당의 민주적 경선 결과를 무시하고 탈당해 출마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회고록 下권, 328쪽)”고 회고했다.

결국 1997년 제15대 대선은 김대중이 1.6%포인트 격차로 승리했다. 대선의 승패를 가른 요인으로 병역 의혹과 이인제 후보의 탈당에 따른 여권 분열이 지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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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의 승패를 가른 요인으로 병역 의혹과 이인제 후보의 탈당에 따른 여권 분열이 지목됐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野 뭉치고 與는 분열돼 ‘필승구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승인과 이회창 후보의 패인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김 당선자의 승인 중 으뜸은 이 후보 아들의 병역 시비이다. 7.21 경선 직후 50%에 육박하는 지지도로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부각한 이 후보는 두 아들의 병역 시비에 휘말려 그의 최대 자산인 ‘대쪽’, ‘도덕성’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다.

(중략) 김 당선자의 승인 중 두 번째는 김영삼 대통령과 이인제 후보의 탈당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여당 후보 경선 때나 그후 김 대통령이 보여준 모호한 태도는 이 후보와의 갈등을 낳았고, 결국 거대 여권의 분열, 이인제 후보의 탈당 및 독자 출마로 이어졌다. 개표 결과, 이인제 후보는 부산 경남 강원 등에서 이회창 후보의 표를 상당부분 잠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 1997.12.20. <조선일보> 9면

이회창은 본인의 패배 원인에 대해 “언론이나 논평가들이 내놓은 원인 분석은 대체로 ①여권 분열(이인제 탈당, 출마), ②야권 연대(DJP연합), ③병역 문제, ④IMF 외환위기”라며 “이인제 후보의 배신 행위와 DJP엽합은 결과적으로 승패를 갈랐지만 그것이 당연히 내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라고 분석하는 것은 결과에 맞춘 견강부회(牽强附會)(회고록 2권, 388~391쪽)”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병역 비리 의혹 대처에 대한 아쉬움도 표했다. 그는 “이 병풍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미숙하고 어리석었던가 하는 것”이라며 “나는 병역 면제 과정에 아무런 위법이 없었으므로 상대방이 이를 문제화해봤자 잠시 시끄럽겠지만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했다(297쪽)”고 회고했다.

이렇듯 유력 대권 주자였던 이회창은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에 따른 이인제 후보 교체론으로 발목이 잡혔다.

 

2002년 노무현, 정몽준 후보 교체론


ⓒ노무현
위태로운 노풍(盧風)에 ‘제3의 후보 영입론’으로 정몽준이 떠올랐다.ⓒ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 사료관

2002년 새천년민주당은 7명의 후보 가운데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16개 지역 경선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그는 당내에서 비주류에 속했다. 상대 당 후보였던 이회창은 “내가 보기에 노무현은 정치에 들어온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그 연륜에 알맞은 기반을 잡지 못했다”며 “변방으로 돌며 전두환 전 대통령 청문회에서 보듯이 뛰어난 언변과 돌출적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정치를 해온 것(851쪽)”이라 평가했다.

모두가 이른바 노풍(盧風)은 조만간 깨질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6·13 지방 선거에서 전국 16개 시·도지사 가운데 11개 지역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했다. 13곳에서 치러진 8·8 재보궐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참패했다. 노풍은 점차 위태로워졌고 노무현에 대한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때 당내에서 ‘제3의 후보 영입론’이 제기됐고, 그 대안으로 정몽준이 떠올랐다. 당시는 2002년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던 때로, 정몽준은 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정몽준 역시 이러한 흐름에 몸을 싣고 9월 국민통합21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은 당시를 “명색만 후보였을 뿐 당내에서 점차 고립돼 갔다”고 회고했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노무현은 정몽준에게 후보 단일화를 제안했다. 당시 노무현은 이회창과 정몽준에 이어 지지율 3위로, 승부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노무현 ‘경선 단일화’ 제안 배경

노 후보의 전격제안은 당 안팎의 후보단일화 요구를 정면돌파 하겠다는 승부수로 보인다.

(중략) 노 후보로서는 우선 단일화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단일화를 고리로 한 정 의원 쪽의 민주당 흔들기를 조기에 차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단일화 논란의 공을 정 의원에게 되넘겨 선택을 압박함으로써, 불필요한 시비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매듭짓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 2002.11.03. <한겨레>

수차례 협상의 난항 끝에 TV 토론과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 방식이 채택됐다. 두 곳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하나는 무효가 됐고 다른 하나는 노무현의 승리로 유효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단일화에 합의한 정몽준은 유세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권력 분점을 문서로 확실히 보장 받길 원했다. 노무현은 정몽준의 후보 교체론을 잠재우고 최종 문서 합의를 거치자 선거는 닷새가 남아 있었다.

ⓒ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단일화 이후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난항을 겪었다.ⓒ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단일화 이후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난항을 겪었다. 선거 전 날 명동-종로 유세에서 정몽준이 단일화 철회를 선언했다. 유세장의 ‘차차기는 정몽준’이라는 현수막 앞에서 노무현의 “너무 속도 위반 하지 말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그날 밤 노무현은 정몽준 자택에 찾아갔고, 이는 국민 정서를 건드렸다. 선거 당일 노무현은 2.33%포인트 격차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회창은 두 번째 패배 원인을 ‘이미지’라고 분석했다. 그는 “노무현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고 정몽준은 대표적인 금수저 출신”이라며 “이 대결에서 흙수저 출신이 금수저 출신을 쓰려뜨렸으니 관중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1003~1004쪽)”고 평가했다.

정몽준을 보면서 왜 이인제가 생각날까?

새천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간의 후보 단일화가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중략) 정몽준 후보는 승리자에 대한 축하 인사와 함께 깨끗하게 승복했다.

여기서 1997년 신한국당 경선을 상기시켜 본다. 기억의 주인공은 현재 민주당에서 중진으로 불리는 이인제 국회의원이다. 이인제 의원은 97년 당시 경기도지사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이회창 후보에게 석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 의원에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중략) 왜 결과에 깨끗히 승복하지 못하는가?

대통령 후보는 누구나 되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라는 자리는 단 하나뿐이다. 누군가는 패배해야 하고 또 그는 결과를 인정해야만 한다.

이인제 의원은 이 같은 진리를 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는 통째로 뒤집었고,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에서는 결과를 회피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정몽준과 이인제의 극명한 차이이다.

권력다툼에 있어 승복은 더욱 더 철저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길을 찾고 있을 이인제 의원은 정몽준 후보에게서 승복에 대한 깊은 학습을 받아야 할 것 같다.

- 2002.11.27. <오마이뉴스>

이렇듯 당내에서도 비주류였던 노무현은 지지율 하락에 따라 정몽준의 후보 교체론을 맞닥뜨렸으나, 그의 승부수로 최종 당선됐다.

대세론에서 후보 교체론으로 무너져 내린 1997년 이회창과 지지율 하락에 따른 후보 교체론에도 끝끝내 당선된 2002년 노무현. 2021년 민주당 이재명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한편 민주당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당무위원회는 13일 오후 이낙연 전 대표의 이의 제기를 수용하지 않기로 의결하고,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대선 후보로 최종 확정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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