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⑪] 가을에 떠나는 추억 여행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일상스케치⑪] 가을에 떠나는 추억 여행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1.10.24 11: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가을은 사색과 낭만의 계절이라 했던가. '시몬! 나뭇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프랑스 시인 '구르몽의 낙엽'은 많이 회자되는 가을 풍경을 담은 시다. 곱게 물든 단풍,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와 낙엽 태우는 향취, 그리고 감성을 자극하는 '이브 몽땅의 고엽'이나 '이용의 잊혀진 계절' 등이 방송에서 연일 흘러나오며 서정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계절이 가을이다.

아! 가을인가

허나 언제부턴가 가을 실종이란 말이 나오더니 특히 올 가을은 더디 와 10월 중순까지도 늦여름이 기승을 부렸다. 그러다 며칠 전 내리던 비가 그치자 금세 스산해지고, 완연한 가을 향기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한 채 곧바로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듯하다. 시골집 감나무의 감도 비바람에 거의 다 떨어져 몇 개만 달려 있으니 황량하기 그지없다. 미국 작가 '오 헨리'는 아니더라도 마지막 감나무 잎새를 볼 날이 머잖았다.

들녘엔 누렇게 익은 벼가 수확할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감사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이 떠오른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들녘엔 누렇게 익은 벼가 수확할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감사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이 떠오른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새벽 산책길에 보니 시골 들녘엔 누렇게 익은 벼가 수확할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여기저기 타작한 흔적도 많이 눈에 띈다. 정경을 보며 가을 추수를 끝내고 감사 기도하는 '밀레'의 작품 '만종'과 함께 초등학교 시절 이삭줍기 숙제가 떠오른다.

물자가 부족하고 보릿고개니 하던 어려운 시절이라, 추수가 끝난 들에 타작하고 남은 부스러기 이삭을 주워 학교로 가져가는 과제였다. 학생들이 가져온 이삭들을 모아 그 당시 학교 부족한 제정으로 충당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숙제가 난감했던 게 너른 벌판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리 둘러봐도 쉬이 눈에 띄지 않아 거의 줍지를 못했고, 결국 집에서 어떻게 구해 대체할 수 있었다. 

다 익은 곡식들이 가을 정취를 더욱 충만하게 채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다 익은 곡식들이 가을 정취를 더욱 충만하게 채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할머니는 텃밭을, 엄마는 화단을

유년 시절을 추억해 보면, 계절 따라 엄마가 가꾼 정원 가득 수많은 종류의 꽃과 할머니의 남새밭엔 야채들이 풍성했다. 한 여름엔 참깨에서 하얗게 깨꽃이 피어, 자고 일어나 마당을 보면 마음이 따스해졌다. 메밀밭처럼 넓게 펼쳐져 있어 그 시절 행복한 정경 중 하나다.

배초향(방아)꽃과 로즈마리. 가을이면 마당에 자란 로즈마리랑 방아꽃을 따서 말린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배초향(방아)꽃과 로즈마리. 가을이면 마당에 자란 로즈마리랑 방아꽃을 따서 말린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즐겨 마시는 한국 토종 허브 배초향꽃차. ⓒ정명화 자유기고가
즐겨 마시는 한국 토종 허브 배초향꽃차. ⓒ정명화 자유기고가

'영화 미나리' 속 할머니 윤여정처럼, 나도 할머니랑 함께 생활해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다. 그중 할머니의 전부에 가까웠던 텃밭, 할머니는 참깨뿐만 아니라 풋고추, 상추, 오이 등 야채를 가꿔 식탁에 올렸다. 한 번은 제법 자란 오이 한 개를 찜해두고 더 자라기를 학수고대하며 매일 확인했는데, 어느 날 그 오이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할머니한테 땄냐고 여쭤봤는데 아니라고, 식구들 모두에게 물었으나 결국 범인은 못 찾았고 그 오이는 누가 가져갔을까가 지금도 궁금하다. 그 당시 상실감이란, 담벼락 옆에 매달려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말이다.

그리곤 마당 한편엔 할머니의 닭장이 있었다. 부뚜막 까만 가마솥 안의 밥 위에 얹힌 스탠 대접의 계란찜, 푸다닥거리는 닭을 제치고 방금 난 따끈한 계란을 줍는 재미가 쏠쏠했다. 알을 품고 오랜 시간 견뎌낸 모성으로 병아리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게 준 자연학습체험장이기도 하다. 거기다 마당 맨 끝에 있던 돼지우리는 가까이 하기엔 악취가 심했지만 할머니가 무척 애착을 갖고 음식물 찌꺼기를 날라 정성 들여 돼지를 키우시던 장면도 생각난다.

무척 좋아하는 바늘꽃, 하늘하늘 여린 모양새에 비해 추위와 비바람에 강하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무척 좋아하는 바늘꽃, 하늘하늘 여린 모양새에 비해 추위와 비바람에 강하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허브티를 한잔 따끈하게 타서 시골집 마당의 가을 꽃 풍경에 취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허브티를 한잔 따끈하게 타서 시골집 마당의 가을 꽃 풍경에 취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비 갠 후 마당에 나가 얼마 남지 않은 주황빛 감을 올려다보며 어린 시절 추억과 고향에 대한 상념에 젖는다. 나의 시골 고향집은 마당이 꽤 넓어 초등 친구들이랑 잠자리 잡기와 제기차기, 공기놀이, 숨바꼭질하며 동심의 가을을 만끽했다. 마당 딸린 집이나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누구나 마당 한 구석에 심긴 감나무를 친구 삼아 놀았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비바람 그친 후 얼마 남지 않은 감나무 잎과 매달린 감, 가을 끝자락임을…. ⓒ정명화 자유기고가
비바람 그친 후 얼마 남지 않은 감나무 잎과 매달린 감, 가을 끝자락임을…. ⓒ정명화 자유기고가

만추와 감나무 향수

어린 시절 집 마당의 큰 지분을 차지한 7그루의 감나무는 여름 무렵 단감과 대봉감이 적당히 어우러져 감꽃이 떨어지면 감이 나오기 시작한다. 여름이 지나며 제법 굵어지는데 비바람에 덜 숙성된 감이 떨어지면 할머니가 모아서 장독에 담은 후 물에 삭혀 먹었다. 나는 덜 삭힌 것을 몰래 먹어 배탈이 나 고생하곤 했다.

드높은 파아란 가을 하늘과 감나무 잎새. ⓒ정명화 자유기고가
드높은 파아란 가을 하늘과 감나무 잎새. ⓒ정명화 자유기고가

그러다 가을에 감이 완전히 영글어 익으면 할머니의 손길이 바빠졌다. 손이 닿지 않는 나무 꼭대기에 앉은 감을 일꾼 아저씨들이 장대로 꺾어서 땄는데, 나는 지붕에 올라가 홍시감을 직접 손으로 따곤 했다. 할머니는 감을 부산, 서울 등 친척집에 부쳤고, 홍시가 되거나 덜 익은 대봉감은 음식물 보관 창고처럼 사용하던 방 한 칸에 두어 다 익으면 한겨울에 간식거리로 먹을 수 있었다. 광처럼 사용하던 방에는 감, 할머니가 만드신 쑥떡과 인절미를 보관해두었다가, 딱딱해진 떡을 화덕에 구워 노릇노릇해진 것을 조청이나 꿀, 홍시에 찍어 먹으면 별미였다.

감나무는 또 다른 의미의 친구였던 것이 그네를 매달아 놀게 해 주었다. 나에게 즐거운 놀이였던 그네가 아쉽게도 언젠가 사라졌는데, 감나무가 나이가 많아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고, 감도 해갈이를 한다고 하여 해체해서였다. 그리고 감나무 밑에는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신나게 널뛰기도 했다.

그렇게 마당 넓은 우리 집은 갖가지 풍경으로 가득 찼었고, 내 머릿속 넓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기억 속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할머니의 텃밭과 엄마의 꽃밭을 보고 자란 내가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내 삶 속에서 둘 다를 가꾸며 그 시절을 떠올려 회상에 젖고 한 번씩 꺼내어 음미해 보곤 한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합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주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