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땠을까]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와 현대건설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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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을까]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와 현대건설의 전설’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1.11.11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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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 정문 길 건너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삼성물산의 래미안 주택문화관. 해당 건물은 현대그룹 사옥에서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았다. 이는 마치 종로구 방향으로 진출하는 현대그룹의 기세를 막아선 듯한 모습이다. 때문에 항간에는 현대그룹의 기운이 태평로 삼성 본관에 미치는 걸 막고자 그룹 차원에서 건물을 세운 것이라는 소문이 전해진다.'

2002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던 삼성물산의 주택문화관 래미안 갤러리. 유리창에 현대건설 계동 사옥 잔영이 맺혔다. ⓒ 삼성물산
2002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던 삼성물산의 주택문화관 래미안 갤러리. 유리창에 현대건설 계동 사옥 잔영이 맺혔다. ⓒ 삼성물산

위와 같이 한때 건설업계에서는 삼성물산의 주택 홍보관인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가 현대건설의 기운을 막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과연 이 같은 풍문은 정말 사실이었을까. 호사가들이나 좋아할 만한 얘기지만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가 문을 닫은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이를 거슬러 올라가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와 현대건설'의 스토리를 들여다보는 것도 독자들에게 상당한 재미를 선사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번 '어땠을까'에서 다뤄본다.

故 이병철 회장은 1960년대 동양방송(TBC)과 중앙일보를 창립, 방송사와 신문사를 발판으로 삼아 '금배지'를 달아보려 했다. 하도 정치인들에게 당하고, 정경유착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나머지 아예 자신이 정계에 입문해야 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동양방송과 중앙일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이 회장은 유진오 신민당 총재를 방문해 '나도 정치를 하고 싶다'고 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자 유 총재는 이 회장에게 '재산과 권력 중 하나만 택해라. 권력을 택하면 열심히 돕겠다. 하지만 당신은 기업인 체질이다. 기업인으로 훨씬 대성할 사람'이라고 만류했다고 한다. 한동안 고민하던 이 회장은 결국 기업인의 길을 택했고, 1976년 동양방송과 중앙일보를 합병시켜 중앙일보·동양방송으로 통합했다.

왜 뜬금없이 이병철, 동양방송, 중앙일보를 들먹이느냐면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가 위치했던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2'의 본래 지주가 중앙일보·동양방송이었기 때문이다. 동양방송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질 때까지 해당 토지 일대를 'TBC-TV 운현궁 제3스튜디오'로 사용했다. 즉, 운니동 114-2의 땅주인은 오래 전부터 삼성가였다는 의미다. 이후 이 땅의 소유권은 삼성그룹 계열사면서도 최대주주는 일본계 경비업체 세콤인 에스원에게 넘어간다. 1999년 6월 중앙일보사가 에스원에게 토지를 매각한 것이다. 땅이 삼성그룹 친인척 기업에서 다시 그룹으로 돌아온 셈(하필 보안업체라니 삼성그룹은 정말 현대그룹의 기운을 막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이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2 등기부등본 ⓒ 시사오늘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2 등기부등본 ⓒ 시사오늘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와 현대건설의 악연이 시작된 게 바로 이때부터다. 삼성그룹이 운니동 114-2 토지 소유권을 확보한 이듬해인 2000년부터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간 치열한 경영권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다. 이 사건으로 현대건설은 현대그룹 품으로 들어갔으나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부실이 발생해 부도가 났고, 급기야 계동 사옥 본관이 현대차그룹에 팔리면서 2001년 현대건설은 별관으로 쫓겨났다. 정통 현대맨들 입장에서는 사옥 앞 운니동 114-2 땅을 삼성그룹이 소유하게 돼 이 같은 악재가 터졌다고 푸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와중에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에스원으로부터 운니동 114-2 땅을 빌려 2002년 11월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의 전신인 '삼성래미안 주택문화관'을 열고, 이를 안암동·도봉동 일대에 분양하는 래미안 아파트 모델하우스로 사용했다. 가뜩이나 화가 난 현대맨들의 마음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당시 현대건설에서 근무했던 한 업계 관계자는 "바로 턱밑에 주택문화관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 '안방'을 내준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는 건넌방 신세가 됐는데 래미안 브랜드 론칭으로 최대 경쟁 상대가 된 라이벌 업체에게 안방을 내줬으니 오죽하겠느냐"고 회고했다.

공교롭게도 이후 삼성물산 건설부문과 현대건설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1990년대 국내외 건설업계를 호령하던 현대건설은 '왕자의 난' 영향으로 2000년대 초반 급격히 흔들렸다. 시공능력평가 제도가 시행된 뒤 2003년까지 무려 42년 동안 지켰던 1위 자리를 2004년 삼성물산에게 뺏기며 2위로 밀려났고, 급기야 2005년에는 대우건설이 치고 올라오면서 3위까지 추락했다. 반면, 삼성물산은 2004년에 이어 2005년에도 1위를 수성했다. 운니동 삼성래미안 주택문화관이 오픈한지 2년 만에 양사의 운명이 엇갈렸으니, 이를 둘러싸고 '풍수' 따위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보인다.

2000년대 중반 국내 건설업계는 대우건설의 시대였다. 대우건설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시평 1위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삼성물산은 3년 연속 2위에 올랐으며, 현대건설은 2007년 GS건설에 3위 자리까지 내주는 굴욕을 경험했다.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 오픈 후 삼성물산 건설부문과 현대건설의 시공능력평가 순위 변동 ⓒ 시사오늘 그래픽= 박지연 기자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 오픈 후 삼성물산 건설부문과 현대건설의 시공능력평가 순위 변동 ⓒ 시사오늘 그래픽= 박지연 기자

그러던 현대건설이 다시 부활의 날개를 펼친 건 2009년이다. 현대건설은 그해 시평 1위 탈환에 성공했고 2013년까지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건설이 날개를 펴기 직전인 2008년은 삼성래미안 주택문화관이 대대적인 리모델링으로 인해 임시 휴관에 들어간 해다.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이 리모델링을 통해 삼성래미안 주택문화관은 기존 비즈니스 중심에서 벗어나 '북촌, 미술과의 만남', '래미안 나눔마켓' 등 문화전시와 고객체험 행사를 진행하는 오늘날의 래미안 갤러리로 본격 거듭나게 된다. 폐쇄적인 운영 방식에서 소통형, 오픈형으로 바뀌었으니 아마도 계동의 기운이 밖으로 새 나갈 통로도 늘지 않았을까나. 또한 같은 해 계동 사옥 앞에 '왕자의 난'으로 철거됐던, 범현대를 상징하는 '現代'라고 적힌 거대한 표지석이 재설치된 점도 현대건설의 기세를 강하게 만들지 않았을까나. 

악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현대건설은 2013년 별관 뒷방 신세를 접고 본관으로 재입성했다. 빈 별관은 목동에 있던 현대엔지니어링이 입주했다. 현대건설 입장에서는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와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 것인데, 이후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2014년부터 2021년까지 8년 연속 시평 1위를 달리고 있고, 현대건설은 2인자로 완벽히 밀려났다(사실 시평의 경우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잘나가서 아니라 삼성전자 등 계열사들의 주식 가치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2015년 이후 영업이익 1조 원 시대를 열었다).

2021년 11월 11일 현재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2 전경. 지난 9월부터 종로소방서가 임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2021년 11월 11일 현재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2 전경. 지난 9월부터 종로소방서가 임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제 현대건설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2019년 6월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가 완전 폐쇄됐고, 그 빈 자리에 최근 소방서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에스원은 지난해 11월 운니동 114-2를 오는 2024년 3월까지 종로소방서 임시청사 부지로 활용하는 내용의 월세 6000만 원짜리 임대차계약을 서울특별시와 맺었다. 눈엣가시 같았던 래미안 갤러리 대신 화(火)를 막아주는 소방서가 앞에 있으니 현대건설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으리라. 실제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살펴보면 현대건설은 2018년부터 최근까지 실적 부진으로 곤욕을 치렀으나 올해 들어서는 연결기준(누적)으로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1.9%, 영업이익은 무려 22.5% 증가한 성적표를 받았다. 특히 소방서가 들어선 지난 3분기에는 전년 동기보다 57.6% 늘어난 2203억6400만 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운니동 래미안 갤러리와 현대건설, 앞선 내용들처럼 억지로 꿰맞추면 그야말로 '악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풍수니, 기운이니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보다는 각 건설사 임직원들의 땀과 열정, 그리고 '인연'들이 묻어 있는 일종의 설화이지 않을까. 수연무작(隨緣無作)이라 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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