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조선의 권신 김자점과 김종인 국보위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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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조선의 권신 김자점과 김종인 국보위 전력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1.11.14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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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않았듯이 5ㆍ18도 국보위원 김종인 잊을 수 있을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기자)

효종이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않았듯이 5ㆍ18도 전두환의 국보위원 김종인을 잊을 수 없어 사진(좌) 병자호란 치욕의 현장 삼전도비 사진출처=문화재청, 사진(우)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김종인 사진출처=국민의힘 홈페이지
효종이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않았듯이 5ㆍ18도 전두환의 국보위원 김종인을 잊을 수 없어 사진(좌) 병자호란 치욕의 현장 삼전도비 사진출처=문화재청, 사진(우)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시절 김종인 사진출처=국민의힘 홈페이지

“영의정 김자점은 본래 보잘것없는 작은 인물로서 외람되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은택을 입은 지가 여러 해 됐는데, 그 공훈과 존귀함을 믿고서 사치와 방자를 멋대로 했고, 꾀하는 바는 부시(婦寺)의 충성에 불과하고 즐겼다.”

<효종실록> 효종 즉위년 6월 22일 기사 중 양사에서 김자점의 죄목을 들어 파직을 간한 내용의 시작 부분이다.

조선의 대표 간신 김자점(金自點)은 인조반정의 공신이다. 과거가 아닌 음서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이 제기되자 재야에 묻혀 이귀·최명길 등과 쿠데타를 도모했다. 광해군이 방심하고 중립외교와 영창대군 사사 및 인목대비 폐비사건 등으로 기득권 세력 서인이 돌아선 덕분에 인조반정이 성공했다.

김자점은 성공한 쿠데타의 일등공신이 됐다. 쿠데타 기여도보다는 권력 실세와의 친분관계가 작용했다. 동지 이귀의 딸과 김자점의 동생이 혼인을 해 사돈지간이 됐지만 동생이 요절하는 바람에 제수씨인 이귀의 딸 이예순은 궁중의 무수리가 됐다. 전화위복이 됐다. 이예순이  권력의 초실세 김상궁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등공신이 됐다.

김자점에게는 출세길이 활짝 열렸다. 거칠 것이 없었다. 순검사·한성판윤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인조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저질러 잠시 권력에서 멀어졌지만 정묘호란이 터졌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인조의 호종대신이 된 덕분에 도원수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청군의 급속 남하를 수수방관해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는데 일조했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에 대한 욕심에만 몰두한 탓에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에 위리안치됐다.

하지만 인조는 김자점을 잊지 않고 호위대장으로 복귀시켰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민심을 잃은 인조는 전후복구를 위한 인재보다는 자신의 권력유지에 맞는 아첨꾼이 더 필요했다. 제2의 꽃길이 열렸다.

마침 쿠데타 동지 심기원의 역모사건이 터지자 거열형을 주장해 인조의 신임을 더 얻어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당시 심기원은 김자점에게 자신과 똑같은 거열형을 맞이할 것이라는 저주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김자점은 인조가 소현세자를 극도로 경계하는 마음을 정확히 읽었다. 소현세자가 의문사하자 며느리 강빈의 사사를 주도했다. 인조에게는 김자점만한 충신이 없었다.

간신은 권력을 가질수록 욕심이 더욱 요동친다. 이참에 왕실의 외척이 되고자 했다. 손자인 세룡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와 결혼시켜 인조와 더욱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조선을 사실상 지배한 김자점은 중원의 패자인 청을 뒷배로 삼기로 했다. 삼전도의 치욕따위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왕실의 외척에 종주국 청의 후원을 얻자 노쇠한 인조보다는 김자점이 조선의 지배자로 인식됐다.

하늘은 김자점의 악행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그토록 믿었던 인조가 죽자 반전드라마가 펼쳐진다. 새로 즉위한 효종은 청을 원수로 인식해 북벌론을 추진하자 송시열과 송준길과 같은 북벌론자가 중용됐다.

친청파 김자점은 권력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김자점은 전세 역전을 꾀한다. 인조 죽던 날에도 김자점은 수하들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다. 앞선 <효종실록> 같은 날 기사를 더 보면 권력에 집착한 김자점의 행태가 상세하게 나온다.

“선왕께서 승하하시던 날에 있었던 자점의 행위는 더욱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선왕께서 명초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멋대로 밖에 있는 훈신들을 불러들여 장차 함께 고명을 받으려 했던 것은 임금으로 세우기를 희망한 자가 있어서인 듯합니다. 그래서 궁노를 시켜 옹주를 업고 큰 길을 뚫고 곧장 궁중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젊고 명망있는 원두표(, 이시방을 놓아두고 늙고 고질병이 있는 이해로 수릉관을 삼았으며 홍주원이 고부사(告訃使)를 사직해 체차된 것을 분하게 여겨 자신을 수망(首望)에 추천하고 또 홍주원을 말망(末望)에 추천했습니다.”

자신을 중용한 인조의 죽음을 앞두고도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권신의 노욕이 돋보이는 추접한 장면이다.

하지만 정국이 자신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자 김자점은 전세 역전을 꾀한다. 효종의 북벌론을 무산시키기 위해 청에게 밀고하는 역적질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하지만 김자점의 이적행위가 들통이 나자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갔다. 얼마 후 아들 김익의 역모사건이 터지자 자신이 죽인 심기원과 마찬가지로 거열형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광주 5·18 민주묘지 방문이 오월어머니회를 비롯한 5·18 단체 등의 저지 시위로 인해 20여 분간 대치한 끝에 충념문과 추모탑 사이 한가운데에서 참배하는 데 그쳐 파문이 일었다. 이번 사태에는 윤 후보의 전두환 발언과 김종인 전 위원장 선대위 배제 여론이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5·18구속부상자회 중앙회는 지난 9일 윤석열 후보에게 ‘김종인 배제’를 공식 요구했다. 5·18중앙회는 이날 광주 5·18민주묘지 천막농성장에서 5·18민주유공자들과 긴급좌담회를 통해 윤 후보에게 전달할 5개항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특히 이들 요구사항에서 주목해야 부분은 국민의힘 대선 총괄선거대책위원장으로 거론되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구체적으로 적시해 선거캠프 배제‘를 촉구한 점이다.

5·18중앙회는 김 전 위원장이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정부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전력을 문제 삼았다. 이는 성공한 쿠데타였지만 역사의 단죄를 받은 5공 세력에 참여한 김종인 전 위원장의 전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물론 김 전 위원장은 지난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된 직후와 지난해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있을 때 등 자신의 국보위 전력에 대해 사과한 바 있다. 하지만 5·18중앙회의 마음은 이를 용납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문제 삼은 김종인 전 위원장의 국보위는 유신 독재정권 붕괴 후 12·12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가 통치권 확립을 위해 만든 어용조직이다. 특히 국보위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유혈 진압된 직후에 만들어져 반민주적인 행태를 일삼아 지탄의 대상이 됐다. 국보위는 민주화를 저지하기위해 출판 및 인쇄물 제한 조치를 단행했고, 5공 인권유린의 상징인 삼청교육대를 실시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지난 1980년 5월의 참극을 겪은 5·18중앙회가 김종인 전 위원장이 국보위 전력을 용서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김 전 위원장은 1980년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았고, 전두환 정부에서 11~12대 국회의원을 거치며 신군부의 특혜를 입은 대표적인 인사다. 이후에도 보수와 진보를 오갔고,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창출에도 적극 참여해 권력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놀라운 생존력을 자랑했다. 최근에는 윤석열 대선 선대위의 전권을 요구해 갈등을 빚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효종이 북벌을 적극 추진한 이유는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청나라의 포로로 끌려가 수년간 고초를 겪은 효종으로선 북벌만이 조선과 백성의 치욕을 치유할 특효약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광주 5·18중앙회가 김종인 전 위원장의 국보위 전력을 잊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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