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⑭]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와의 만남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일상스케치⑭]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와의 만남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1.11.14 2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하는 삶과 작품 세계 새로운 조명 잇따라
파란만장한 도스토옙스키의 삶, 작품에 녹아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며 절로 머플러와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돌아왔다. 전국적으로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서울과 강원도에선 벌써 첫눈 소식을 알렸다. 11월 이른 눈 행차에 가을은 쫓겨나다시피 저만치 가고 있다. 이즈음 은은한 커피 향과 함께 구미에 당기는 책 한 권을 손에 담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위드 코로나 시대라곤 하지만 아직 사적 만남은 되도록 절제해야 하는 다소 따분한 일상 속에서 긴긴 겨울밤을 함께 할 친구로 독서가 단연 최고이지 싶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초상화(1872년작). ⓒ위키피디아
러시아 화가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초상화(1872년작). ⓒ위키피디아

유유자적 여유를 부리고 있노라니 언뜻 TV 뉴스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 탄생 200주년이란 자막이 지나갔다. 세계적인 소설가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그가 태어난 11월 11일에 맞춰 대표작 신판은 물론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연구서, 입문서와 만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관련 서적이 나오는 중이다.

헤르만 헤세와 도스토옙스키

이렇게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소식을 접하며, 읽기에 곤욕스러울 정도로 길었던 그의 작품과 씨름하던 여고 시절이 떠올랐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 세계 고전을 추천도서로 공지하였다. 관심이 많던 차에 고무된 난 학교 공부는 살짝 옆으로 미뤄두고 독서에 더 열을 올렸다. 그 중심에 헤르만 헤세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있었다.

독서든 음악 감상이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선호도나 취향은 개개인의 개성에 달린 것으로, 나는 독일과 러시아 계 작품을 더 선호했다. 음악사에서 유명하고 중요한 작곡가인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못지않게 라흐마니노프, 차이코브스키처럼 열정적이고 드라마틱한 러시아풍에 더 매력을 느낀 것처럼 말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 중에서 발췌-

위 헤세의 표상과 같은 그의 작품 데미안 속 글귀에 이끌리고 수험생이라면 헤르만 헤세 저서 정도는 읽어줘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이에 편승해, '데미안'을 필두로 '수레바퀴 아래서', '지와 사랑' '황야의 늑대' 그리고 헤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유리알 유희'까지, 나에겐 무척 난해했지만 고교시절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읽기 위해서 읽었던 것 같다.

한때 교과서보다 더 긴 시간 동안 헤르만 헤세 서적을 손에 쥐고 있었다. 헤세가 인간의 내면과 자아에 대해 가졌던, 청춘의 고뇌와 휴머니즘을 표현한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였기에 그 매력에 흠뻑 빠져 들었는지 모르겠다.

'도스토옙스키'를 제외하고 감히 문학을 논할 수 있을까

독일의 헤르만 헤세가 있다면 쌍벽으로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가 나의 구미를 당겼다. 다독은 아니어도 이런저런 고전에 손을 뻗치던 중 만난 도스토옙스키 작품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강렬했고 인상 깊이 뇌리에 각인되어 남아있다. 너무 길어서 때론 수면제가 될 정도로 지치기도 했지만 그의 암울한 주인공들과 시대적 묘사는 묘하게도 중독적이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등단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와 시대 상황의 본질을 작품에 담아냈다. 주요 저서로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19세기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사회 분위기에서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며 다양한 현실적인 철학과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해 그의 작품과 사상은 당대 내로라하는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줬고, 많은 인물들로부터 천재 또는 위대한 작가 및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가들뿐만 아니라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헤세 등 서구권 문호들 또한 그의 작품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책 이미지. ⓒ열린책들
책 이미지. ⓒ열린책들

지적인 프롤레타리아

그는 신흥 자본주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 고대 러시아 역사에 유래를 둔 가치와 제도를 바탕으로 러시아가 발전해야 한다는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였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의 폭력적 혁명을 부정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는 보수적인 성향의 작가였다.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자랐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따라서 비단 문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 사회 문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진보적 사회 운동을 하다가 사형 선고받고 형장으로 끌려가 총살당하기 직전 황제의 특사로 감형되는 일을 겪는다. 이후 도스토옙스키는 4년간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유형 생활을 지내게 된다. 석방 뒤엔 이때의 경험을 승화시켜 꾸준히 작품을 낸다. 투옥, 사형 선고까지 받았을 정도로 탄압받은 경험이 그의 문학 세계에 확연히 녹아 있다.

그는 불안정한 중산계층 출신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일컬어 "지적인 프롤레타리아"라 칭했다. 재정 문제를 오로지 원고료로 겨우 해결했기 때문에 그의 소설들은 굉장히 길다. 왜냐하면 그 시절 러시아에서는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책정했고, 소설의 길이가 늘어나면 원고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으며 생계를 위해 소설을 쓰는 생계형 작가였다. 톨스토이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내용을 많이 쓴 반면 그는 돈이 중요하고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고 봤다.

도스토옙스키는 본인이 쓴 소설들만큼이나 극적인,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던 사건,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가난, 사형 선고 후 집행 직전 특사로 풀려나 혹독한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난 일, 광적인 도박 중독 등. 그래서인지 어떤 인물이었는지 평론가들이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작품 전반에 걸쳐있는 인간의 고통을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는 삶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의 베품을 강조하고 있다. 수년간의 시베리아 수감 생활 동안 읽었던 성경이 주창하는 기독교적 박애주의가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릴 적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고 느꼈던 감정은 인류에 대한 연민이라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특유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의 소설은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을 보여주고 당대 러시아의 정치, 사회, 정신세계 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문학의 정체성

수많은 유명인들의 평론 중 특히 시선을 끌어 당기는 헤르만 헤세 평이 있다. "삶 전체가 그냥 타는 듯한 아픈 상처로 느껴질 때, 절망을 숨 쉬고 희망이 없을 때 우리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 비참함으로 고독해지고 마비되어 망연히 삶을 건너다볼 때, 삶의 거칠고도 아름다운 잔인함을 더는 이해하지 못하고 더는 삶을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작가가 울리는 음악에 마음을 연다."

작가가 남긴 어록 중에는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곁의 이웃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괴로움과 번민은 위대한 자각과 심오한 심정의 소유자에겐 언제나 필연적인 것이다. 괴로움이야말로 인생이다. 인생이 괴로움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또한 만족을 얻을 것인가?' 등이 회자된다. 

고통의 맨 밑바닥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어두운 것처럼 보이지만 희망이 남는다. 문학의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절망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영혼 구원의 선봉장에 서서 끊임없이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제시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온 고교시절, 타향살이의 설움을 도스토옙스키와 교우하며 씨름하는 사이 학교 성적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역시 그의 작품 세계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다. 누구나 하는 말로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란 정의는 시대를 망라한 바이블이다. 당대 대문호들이 설파한 철학과 세계관은 우리의 삶 어딘가에 깊은 영향을 남기고 오늘에 이르도록 기여했을 것이다. 영혼의 피난처이자 안식인 문학, 깊어가는 이 계절 열정을 탑재하여 도스토옙스키의 심오한 작품 세계로 머나먼 항해를 떠나보면 어떨까.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