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후보 영욕史] 제3지대 현실화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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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후보 영욕史] 제3지대 현실화 가능할까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1.12.26 12: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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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부터 안철수까지…계속되는 제3지대 도전
소선거구제 한계 못 넘어…정치력 부족도 걸림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대선 때마다 제3지대 후보들이 등장했지만, 거대 양당 체제의 벽을 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사오늘 김유종
대선 때마다 제3지대 후보들이 등장했지만, 거대 양당 체제의 벽을 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사오늘 김유종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Maurice Duverger)는 ‘소선거구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낳는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뒤베르제에 따르면, 소선거구제에서는 유권자의 사표(死票) 방지 심리에 의해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에게로 표심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제3의 정당’은 힘을 잃고, 거대 양당 체제가 강화된다.

사표 방지 심리는 단순 다수 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선에서도 작동한다. 대선 때마다 ‘여당도 제1야당도 싫다’며 부동(浮動)하는 유권자들을 흡수한 ‘제3의 후보’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늘 거대 양당 체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산화(散花)해야 했다. <시사오늘>은 제20대 대선을 맞아 제3지대 후보들의 명멸사(明滅史)를 되짚어봤다.

 

제14대 대선 - 정주영


확고한 지역 기반이 없었던 정주영은 득표율 16.3%에 그치며 조용히 정계를 떠났다. ⓒ연합뉴스
확고한 지역 기반이 없었던 정주영은 득표율 16.3%에 그치며 조용히 정계를 떠났다. ⓒ연합뉴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대한민국 선거는 ‘독재세력 대 민주화세력’ 구도로 치러졌다. 이 같은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제3의 길’이 등장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제3지대 후보들의 존재감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제3지대 후보가 유의미한 입지를 확보하게 된 것은 정치가 ‘선악 구도’에서 탈피한 후였다.

1992년 제14대 대선은 역대 그 어떤 대선보다도 제3지대 후보들의 돌풍이 거센 선거였다. 오랜 시간 이어진 독재 대 민주 구도가 깨지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전면에 등장했던 까닭이다. <한국정치학회보>는 “과거의 선거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녔던 민주화나 정권의 정통성과 같은 정치적 사안이 사라짐에 따라 비정치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싼 논의가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다(박경산·1993)”고 분석했다.

<한국선거연구회>가 1992년 조사한 자료를 봐도, 제14대 총선의 선거 쟁점이 ‘경제 난국’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81%에 달했다. 이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경제인’들이 공고했던 ‘양 김(金)’ 체제의 대안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14대 총선을 앞두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정주영은 기존 정치인들을 ‘구시대적이고 부패한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31석을 획득,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정주영 바람’도 공고한 양당 체제를 뚫지는 못했다. 제14대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은 아파트 반값 공급, 학생 무료급식,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며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거는 영남의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호남의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정면충돌하는 구도로 흘러갔고, 확고한 지역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정주영은 득표율 16.3%를 기록하는 데 그치며 조용히 정계를 떠났다.

(전략) 영남에서 정주영 국민당 후보가 몰락한 것은 전체 선거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은 정 후보가 영남에서 YS의 표를 크게 잠식해야만 전국적으로 박빙의 승부를 노려볼 수 있었다. 산술적으로 영남의 유권자 수는 852만여 명으로 호남의 360만여 명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정 후보의 영남 몰락은 부산 사태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국민당은 부산 모임을 도청해 폭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영남 유권자들을 크게 긴장시키고 뭉치게 만들었다. 그 이전 영남의 유대는 한결 느슨했다. 특히 대구·경북의 정 후보 세는 승부의 관건으로 떠올랐을 정도였으나, 정 후보는 부산 사태로 부산에서 박찬종 신정당 후보에도 밀려 4위로 떨어지는 등 영남에서 급전직하했다. (후략)
1992년 12월 20일자 <조선일보> ‘부동층 다수가 안정 선택했다’

 

제14대 대선 - 박찬종


사진설명2 : 박찬종은 자금과 조직의 한계에 부딪히며 제14대 대선에서의 돌풍을 이어가지 못했다. ⓒ연합뉴스
사진설명2 : 박찬종은 자금과 조직의 한계에 부딪히며 제14대 대선에서의 돌풍을 이어가지 못했다. ⓒ연합뉴스

제14대 대선에서는 또 한 명의 ‘제3지대 후보’가 있었다. 박찬종 변호사였다. 박찬종은 민주공화당 후보로 제9·10대 총선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지만, 당내에서 정풍운동을 펼치다가 제명을 당하고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장으로 참여해 학생 운동가들을 변론하는 등 ‘양심적이고 강단 있는’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이었다.

제14대 대선에서도 그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으로 상징되는 ‘보스 정치’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새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비록 YS와 DJ, 정주영이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巨木)들과 맞붙으면서 6.4%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대선 과정에서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축적한 그는 유력 차기 대권 주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TV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박찬종 신정당 대표가 현역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남양유업의 유제품광고에 출연한다.
박 대표가 이번 광고 출연으로 받게 될 출연료는 국내 광고계 최고 액수인 1억5000만 원이며 이 돈은 미화원 자녀 장학금 등 불우이웃돕기에 쓰이고 나머지는 모자라는 당비에 충당될 것으로 알려졌다.
광고대행사인 서울광고기획은 박 대표의 이미지를 고려, 상업성에 치우치지 않고 공익성을 앞세우면서 간접적으로 제품광고를 하도록 콘티를 꾸몄다고 밝혔다. 이 광고는 4월 초 방영될 예정이다.
1993년 3월 26일자 <경향신문> ‘박찬종 의원 TV광고 출연…국내 최고 1억5000만 원에’

그러나 박찬종의 ‘질주’는 여기까지였다. ‘개인기’로 제14대 대선에서 선전하기는 했으나,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마이웨이’를 걸었던 박찬종에게는 자금도 조직도 없었다. 선거자금으로 빌린 13억 원을 갚지 못해 집이 강제경매에 넘어갈 정도였다. 여전히 ‘청소년이 선정한 한국의 100대 스타’ 조사에서 마라톤 선수 황영조와 함께 16위에 오를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자금과 조직 부재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박찬종 신정당 대표의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이 오는 14일 서울 민사지법에서 강제경매 처분된다. 이는 지난해 3월 박 대표에게 선거자금 등 명목으로 13억 원을 빌려준 임춘원 씨(전 신정당 사무총장)가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하자 1월 서울민사지법 합의15부에 대여금 반환소송을 내 승소판결을 받음에 따라 채권확보 방안으로 이뤄진 것. 박 대표는 담당재판부에 강제집행정지신청을 내고 패소한 대여금 반환청구 사건을 서울고법에 항소해 놓은 상태지만 재판부에 의해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모친 등 가족 3명과 함께 5년째 살아온 집에서 쫓겨날 형편.
1993년 4월 7일자 <경향신문> ‘박찬종 씨 집 강제경매…선거 빚 13억 원 못 갚아’

자금과 조직 부족은 1995년 서울시장 선거 때도 박찬종의 발목을 잡았다. 무소속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박찬종은 높은 인지도를 앞세워 선거 40여 일 전까지도 지지율 1위를 달렸다. 하지만 민주당에 입당한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거대 정당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지지율은 금세 뒤집혔다. 이때 상황에 대해 박찬종은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돈도 조직도 없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3김 정치의 벽을 넘지 못해 졌다”고 패인을 설명했다.

결국 제3지대 후보의 한계를 절감한 박찬종은 1996년 제15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97년 제15대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지만, 취약한 당내 기반 탓에 미미한 지지율을 기록하다가 경선을 중도 포기하고 탈당했다. 이렇게 박찬종의 제3지대 정치 실험 역시 실패로 끝을 맺는다.

 

제15대 대선 - 이인제


이인제 역시 거대 양당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연합뉴스
이인제 역시 거대 양당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연합뉴스

제15대 대선에서도 제3지대 후보 바람이 불었다. 주인공은 이인제 전 경기도지사였다. 이인제는 시작부터가 제3지대였던 정주영·박찬종과는 달리 기존 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케이스였다. 제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공천을 받으면서 정치에 입문했던 이인제는 문민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고, 1995년 제1회 지방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여당 인사였다.

그랬던 그가 제3지대 후보가 된 건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서다. 노동부 장관 시절 ‘발로 뛰는 장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각인됐던 이인제는 경기도지사 당선으로 ‘체급’을 높인 후 제15대 대선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 참여한다. 결과적으로 이회창 대표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1차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하고 결선 투표까지 진출하는 등 예상치 못한 저력을 과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불거진 이회창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당내에서는 ‘후보 교체론’이 피어올랐다. 결국 대선 경선 과정에서 선전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가던 이인제는 1997년 9월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신한국당 탈당과 대선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신한국당을 탈당했던 의원들을 모아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제3지대 후보로서 제15대 대선에 출마했다.

이인제는 거대 양당에 대한 염증을 느끼던 유권자들, 특히 청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10일 <경향신문>과 <현대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31.3%의 지지율을 얻으며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35.6%)와 양강 구도를 형성했을 정도였다. 이회창은 20.7%로 3위였다. 그러나 선거일이 점점 다가오면서, 이인제의 지지율은 조금씩 양대 정당 후보들에게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전략) 경향신문사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현대리서치가 21~22일 양일간 전국의 20세 이상 유권자 159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여론조사에서 김대중 후보는 35.2% 지지율로 여전히 1위를 차지했으며 이회창 후보는 30.3%,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23.9%로 나타났다. (후략)
1997년 11월 24일자 <경향신문> ‘김대중 35.2% 이회창 30.3% 이인제 23.9%…2강 구도 재편’

결국 이인제는 초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김대중(40.3%)과 이회창(38.7%)에 이은 3위(19.2%)에 그친다. 이인제는 2016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제15대 대선 패인을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내 지지율이 상승하자) DJ의 입장이 바뀐다. 그 전까지 DJ측은 내가 출마를 그만둘까봐 겁을 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젠 주적으로 올라서버린 셈이다. 이회창 쪽은 어차피 나를 주저앉혀야 하는 상황인지라, 나는 두 사람의 공적(公敵)이 됐다. 그래서 두 진영의 합의 여부까진 내가 알 수 없지만, 전당대회를 앞두고 두 당이 동시에, 11월 2일 아침 10시에 대변인들을 시켜서 ‘내가 YS로부터 200억 원을 받았다. 내일모레 창당되는 국민신당은 YS신당이다’라는 발표를 냈다. 최고조에 올랐던 YS에 대한 반감을 이용한 거다. 나를 정치적으로 학살한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YS는 내게 돈도, 조직도, 어떤 것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심정적으로야 ‘YS 화형식’같은 것을 하는 이회창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나를 응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YS는 오히려 나를 말렸다는 것이다.”

제15대 대선 이후에도 이인제의 국민신당은 존속하며 1998년 4월 재보궐선거와 제2회 지방선거, 7월 재보궐선거에 꾸준히 후보를 냈으나 연전연패(連戰連敗)했고, 1998년 8월 29일 국민회의와 합당하면서 민주당 측 인사로 탈바꿈한다. 그렇게 이인제의 제3지대 도전은 ‘한겨울 밤의 꿈’으로 끝났다.

 

제16대 대선 - 정몽준


2002 월드컵 4강 진출에 힘입어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정몽준의 지지율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했다. ⓒ연합뉴스
2002 월드컵 4강 진출에 힘입어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정몽준의 지지율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국민에게 2002년은 잊을 수 없는, 영원히 기억에 남을 한 해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대한축구협회장으로서 한일 월드컵 유치와 월드컵 4강 진출에 지대한 공언을 했던 정몽준 의원을 일약 유력 대선 후보로 밀어 올렸던 까닭이다.

월드컵 4강 신화와 함께 유력한 대선 주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정몽준 의원(무소속)이 한 방송사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3자대결 여론조사에서 정 의원이 1위를 차지한 것은 처음으로 그의 대선행보에 더욱 탄력이 생길 전망이다.
SBS가 8일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TN소프레스 공동조사, 1200명,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8%포인트)에 따르면 정 의원은 노무현-이회창-정몽준 3자대결에서 32%를 얻어 노 후보(23.7%)와 이 후보(31.6%)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이회창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도 44.3%를 얻어 이 후보(39.6%)를 4.7%포인트 차로 앞섰다. 특히 민주당 신당 후보 선호도에서도 33.1%를 얻어 23.6%의 노 후보를 크게 앞질렀다. (후략)
2002년 8월 8일자 <오마이뉴스> ‘3자대결서 1위, 2자대결도 이회창 눌러’

이처럼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몽준은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한다. 여기에 제3회 지방선거와 8월 재보궐선거에서 잇따라 참패한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노무현 후보의 대선 경쟁력에 의심을 품고 ‘후보 교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에 민주당 내 비(非) 노무현 세력들은 탈당 후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를 만들어 사실상 정몽준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치 경험이나 탄탄한 지지 기반 없이 2002년 월드컵 성공의 성과만으로 대선에 출마한 정몽준의 지지율은 그리 공고하지 못했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이회창은 영남 중심, 노무현은 호남 중심으로 지지율을 높여갔지만, 한때 이회창과 박빙의 선두를 다투던 정몽준의 지지율은 시나브로 하락해 노무현과 치열한 2위 싸움을 벌이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정 의원 지지율은 이 후보와 박빙의 선두를 다투다가 20% 중반으로 떨어진 가운데 좀처럼 국면 반전의 소재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국민통합21 창당추진위 관계자도 “현역 의원들의 세 규합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충성도가 낮은 일부 지지층이 동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중략)
여론조사 전문가인 김형준 한국사회과학데이터 부소장(정치학 박사)은 “정 의원의 지지층에서 20~30대 여성층이 먼저 집중적으로 이탈함으로써 전체 지지율 하락을 주도하고 있다”며 ‘이미지 정치’의 한계를 지적했다. 즉 월드컵 열기와 함께 달아올랐던 ‘정몽준 붐’이 식은 대신에, 대선이라는 선택을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현실적 대안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실패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2002년 10월 29일자 <한겨레> ‘지지율 출렁 후보진영 희비 교차’

계속되는 지지율 하락에 돌파구를 찾던 정몽준은 결국 노무현과의 후보 단일화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정몽준은 거대 여당의 조직력 위에 불리한 여론조사 문항을 받아들이며 ‘통 큰 이미지’를 더한 노무현의 정치력에 밀려 고배를 마시고 만다. 그렇게 그의 ‘제3지대 항해’는 막을 내렸고, 후보 단일화 파기 후 잠행하던 그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양당 체제 속으로 편입된다.

 

제18대 대선 - 안철수


안철수는 한때 박근혜의 지지율을 추월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그 역시 거대 양당을 넘어서는 데는 실패했다. ⓒ연합뉴스
안철수는 한때 박근혜의 지지율을 추월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그 역시 거대 양당을 넘어서는 데는 실패했다. ⓒ연합뉴스

‘박근혜를 이겨라.’

제18대 대선은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에서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대선 출마가 사실상 확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야당은 박근혜에 맞설 만한 인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야권 대선 후보로 거론되던 문재인 의원, 손학규 전 대표 등 그 누구를 내세워도 박근혜의 지지율을 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다. 2009년 6월 MBC <무릎팍도사> 출연 이후 2030세대 사이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안철수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박원순 변호사를 지지하는 ‘사심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안철수는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한 9월 6일 CBS 의뢰로 <리얼미터>가 실시한 차기 대선 가상대결 여론조사에서 박근혜(40.6%)를 앞서는(43.2%) 기염을 토한다.

여기에 2012년 4월 열린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한 것은 안철수의 대선 출마를 부채질했다. 실제로 이날 이후 민주당에서는 대선을 위해 안철수를 영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략)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서 당선한 정세균 상임고문은 “(안철수 원장이) 우리 당에 들아 와서 잠재적인 대선후보들과 경쟁을 하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한다”며 “정당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당정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비친노진영의 이종걸 의원은 “안철수 원장이 한두 달 내에 어떤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사실 민주통합당과 결합해서 같이 하기는 어렵다”며 빠른 결심을 요구했다. (후략)
2012년 4월 25일자 <주간경향> ‘민주통합당, 기댈 곳은 안풍’

이에 안철수는 2012년 9월 19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민주당 입당이 아닌 ‘독자 노선’을 천명했다. 안철수 지지율의 상당수가 ‘여당도 야당도 싫다’는 정치혐오층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영남은 박근혜, 호남은 문재인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정치 경험도 세력도 없이 ‘이미지’만으로 정치에 발을 들인 안철수의 지지율은 빠르게 소진돼갔다.

MBN의 야권단일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최초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안철수 후보를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MBN에 따르면, 여론조사기관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 26~28일 사흘간 유무선 전화면접법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야권단일후보 선호도에서 문재인 42.2%, 안철수 39.2%로 조사됐다. 문 후보가 오차 범위 내이기는 하나 안 후보와의 야권단일후보 경쟁에서 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5~6일 실시한 조사에서는 안철수 43.5%, 문재인 42.1%였다. (후략)
2012년 10월 29일자 <뷰스앤뉴스> ‘[MBN 조사] 문재인, 야권선호도 안철수 첫 추월’

결국 안철수는 독자노선을 포기하고 문재인과의 단일화 협상에 착수했지만, 단일화 방식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이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안철수는 11월 23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지지자들에게 문재인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대선이 끝난 후, 신당 창당을 추진하던 안철수는 민주당과 손을 잡고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하는 데 합의함으로써 사실상 제3지대에서 이탈한다.

다만 안철수는 새정치민주연합 탈당과 국민의당 창당, 바른미래당으로의 합당과 국민의당 재창당 등으로 여전히 제3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만큼의 파괴력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제3지대 후보로서의 실험은 실패로 흘러가고 있다는 평가다.

 

제3지대 후보들이 남긴 것


제3지대 후보들의 실패는 소선거구제라는 제도적 문제에 정치력 부족이 결합된 결과라는 평가다. ⓒ시사오늘 김유종
제3지대 후보들의 실패는 소선거구제라는 제도적 문제에 정치력 부족이 결합된 결과라는 평가다. ⓒ시사오늘 이근

역대 제3지대 후보들의 명멸 과정에는 공통점이 있다. 기존 정치인들과는 차별화되는 이미지를 무기로 ‘대안 세력’으로 떠오르지만, 선거가 다가올수록 표심이 거대 양당으로 쏠리면서 지지율이 쪼그라드는 흐름이다. 이미지 좋은 후보가 돌풍을 일으켰다가 결국 양당 체제로 귀속되는 패턴은 단 한 번도 제3지대를 비켜간 적이 없다.

국민의당과 바른미래당에서 안철수와 함께 했던 김관영 전 의원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그 원인을 “내적으로는 리더십의 문제, 외적으로는 선거 제도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시대정신을 상징하면서도 폭발력을 일으킬만한 리더십의 취약’이 첫 번째, ‘사표 방지 심리라는 벽이 존재하는 현재 선거 제도’가 두 번째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제3지대 후보들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과정을 분절해 보면, 김관영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 과거 DJ는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 인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설파했다. 여기서 서생적 문제 인식은 정치인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기회는 평등해야 하고, 과정은 공정해야 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식의 당위론적 명제가 이에 해당한다. 정주영부터 안철수에 이르기까지, 정치사에 이름을 남긴 제3지대 후보들에게는 이런 문제 인식이 있었다.

문제는 ‘상인의 현실 감각’이 부재하다는 점이었다. 정치는 자신의 청사진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려면 먼저 명확한 비전과 구체적인 로드맵을 만들고,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을 모으고, 이들을 정치 세력화하는 방법론이 준비돼 있어야 했다. 거대 양당이 공고한 지위를 유지하는 건 선거제도의 이점 덕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집권 로드맵과 풍부한 자금력, 공고한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3지대 후보들 중 그 누구도 거대 양당의 대안이 될 만한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자신에게 투영된 시대정신을 현실 정치에 적용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정책도, 그 비전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규합하는 정치력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런 리더십의 부재 속에서, 단순 다수 대표제라는 선거제도의 한계는 거대 양당의 구심력을 강화시켰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소선거구제라는 제도적 문제에 지역주의와 이념갈등이 더해지면서 거대 양당 후보에게로 쏠림이 가속화되는 측면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또 박찬종과 이인제를 제외하면 정치 경력이 전무(全無)하다 보니 정치력도 부족했다”며 “정치 경험이 쌓일 때쯤에는 이미 식상한 이미지를 가진 노회한 정치인으로 변모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한계였다”고 덧붙였다.

결국 제3지대의 성공은 ‘서생적 문제 인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가진 리더십의 등장과 그를 중심으로 한 선거제도의 변화를 통해서만 이뤄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거대 양당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하는 일시적 ‘바람’을 넘어, 구체적인 방법론과 그를 실현시킬 수 있는 조직력을 가진 ‘제3지대’는 과연 현실화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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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사 2021-12-26 12:23:09
안철수의 3번째 도전, 만만.한 정치인은 아닌 듯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