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⑳] 인왕산 자락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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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스케치⑳] 인왕산 자락에 올라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1.12.26 12:19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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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수성동 계곡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창의문까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인왕산 성벽과 저 멀리 남산타워를 밝힌 서울 야경. ⓒ정명화 자유기고가
인왕산 성벽과 저 멀리 남산타워를 밝힌 서울 야경. ⓒ정명화 자유기고가

찬란한 불빛, 네온사인 반짝이며 화려한 조명의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밤 풍경은 그 도시의 위세를 표상하는 상징물이다. 날로 성장하여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는 서울의 야경, 실로 아름다운데 그 장관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는 무수히 많다. 그중 쉽게 오를 수 있는 남산이나 인왕산 자락은 야경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산 중턱에 올라 도심을 내려다보며, 수많은 불빛 속 다양한 군상들의 삶이 펼쳐지겠구나 하며 갖가지 상상과 상념에 젖는다.

서울 서울 서울

나에게 서울이라 함은 공간적 이미지가 고교 시절 처음 본 청와대 언저리와 경복궁 근처 주택가였다. 그만큼 이 지역은 지방에서 상경한 나에게 조선시대 한양의 터전 위에 자리 잡은 서울의 아우라가 진하게 풍겨질 만큼 고전적이면서도 위엄이 느껴져 인상이 매우 강렬했다. 지금은 서촌, 북촌이라 불리며 국내뿐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제2의 고향 같다고 할까. 나는 경상도 작은 읍내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속칭 경상도 가시나다. 그런 내가 출세(?) 해 서울 토박이에 가깝게 60여 평생 서울에서 제일 오래 거주했다.

여고 시절 어느 날, 경복궁 옆 삼청동길을 걷는데 한 정원 예쁜 집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미꽃과 어우러져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길 위에 선 나, 담장 하나를 두고 당장은 나와는 거리가 먼 듯한 현실 앞에 홀로 선 나 자신이 초라하기도 하고, 상대적 박탈감과 문화적 괴리감, 묘한 소외감이 들었다. 동경심에 선지 언제가 되든 나도 이 동네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됐다.

일출, 일몰의 장관을 볼 수 있는 인왕산 자락. ⓒ정명화 자유기고가
일출, 일몰의 장관을 볼 수 있는 인왕산 자락. ⓒ정명화 자유기고가

버킷 리스트 서촌살이

세월이 한참 지나고 몇 년 전 한동안 그 언저리 인왕산 자락 근처에 살 기회를 잡았다. 어쩌면 버킷 리스트에 속할지 모르는 바람을 실행한 것이다. 특별한 목적 없이 인왕산 길을 산책하며 주변 문화적 콘텐츠를 누려보겠다는 심산이 깔렸다. 맑은 새벽 공기를 들이키며 수성동 계곡길로 내려가 옥인동, 누상동을 거쳐 통인시장 경복궁 고궁박물관까지 걷곤 한다.

경복궁 왼쪽에 자리한 인왕산은 예로부터 황제가 태어날 명당이 있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돌았다고 전해진다. 도성의 정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풍경, 한양을 대표할 풍광은 모두 이곳 인왕산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러니 인왕산 자락은 주변 모습이 무척이나 정감 가고 편안하다.

수성동 계곡. ⓒ정명화 자유기고가
수성동 계곡. ⓒ정명화 자유기고가
겸재 정선의 작품 수성동. ⓒ정명화 자유기고가
겸재 정선의 작품 수성동. ⓒ정명화 자유기고가

인왕산 명물인 수성동은 인왕산에서 흘러 내려와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계곡으로, 계곡의 물소리가 크고 맑아 조선 시대에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다고 한다.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에 자리한 인왕산 아래 첫 번째 계곡이다. 수성동의 ‘동(洞)’은 지금 사용되는 도시의 행정단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 또는 계곡을 의미한다.

겸재 정선(1676~1759)이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 살던 터전인 북악산과 인왕산의 경승 8경을 그려 담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한 장소가 되었고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풍류를 아는 왕자 안평대군이 집(비해당)을 짓고 살았던 곳이기도 한데, 계곡과 돌다리 등이 2010년에 서울시 기념물 31호 문화재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여름철에 모여 휴양을 즐기던 계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일대는 조선후기 18~19세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저명한 시사(詩社)가 결성되어, 중인 서얼 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을 꽃피웠던 곳으로 문학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모임(詩社)은 당시 양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문학이 중인층을 비롯한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명화 자유기고가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명화 자유기고가

인왕산 자락을 걷다 청운공원의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마음이 서린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나게 된다. 「서시」는 인왕산 수성동아래 누상동 하숙 시절에 쓴 시다. 그는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를 나와 옥인동 아래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었다.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인왕산 주변에 자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명화 자유기고가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명화 자유기고가
윤동주 문학관. ⓒ정명화 자유기고가
윤동주 문학관. ⓒ정명화 자유기고가

윤동주 문학관은 부암동과 청운동이 맞붙어 있는 서촌의 끝에 자리한다. 서촌은 조선시대 중인들의 문학인 위항문학이 꽃핀 곳이었듯이 1930년대부터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노천명과 윤동주와 이상, 소설가 현진건 등 근대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다. 그만큼 서촌은 근대 문화예술의 중심이었다.

서촌의 문학적 상징성과 연결되어 윤동주 문학관은 시인 윤동주의 이미지처럼 하얗고 순수한 모습이다. 입구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하얀 벽에 새겨진 시인의 얼굴과 그가 1938년에 남긴 시 「새로운 길」을 먼저 만나게 된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一九三八. 伍. 十

윤동주 문학관은 우리에게 시인을 새롭게 경험하게 해주는 ‘새로운 길’ 같다. 내부에 전시된 시인 윤동주의 역사적 고통 행로는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한양 북소문 창의문 

멀리 서쪽 인왕산 잔설이 보이는 창의문. ⓒ정명화 자유기고가
멀리 서쪽 인왕산 잔설이 보이는 창의문. ⓒ정명화 자유기고가

시인의 언덕에서는 청운동과 옥인동, 누상동을 잇는 풍경이 차례로 이어진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에 이어 창의문과 부암동 계곡까지 산책로는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시대 4 소문 중의 하나로 북문 또는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창의문 동쪽은 북악산을 끼고 있고 서쪽은 인왕산 성곽을 돌고 돌아 돈의문까지 한양 서쪽 절경을 품고 있다.

의로움을 드러내는 문이라는 창의문 모습. ⓒ정명화 자유기고가
의로움을 드러내는 문이라는 창의문 모습. ⓒ정명화 자유기고가

'의로움을 드러내는 문'이란 의미로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있어 고양, 양주로 연결되고 서민들의 북행 길목이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大門)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췄다. 창의문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인조반정(1623) 때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해진다.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이제 한 해가 저문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며 한양의 어제 오늘을 둘러보자니 과거 역사와 오버랩되며 복잡다난한 현 시국이 염려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상생활은 위축되고 서민 경제는 심각한데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연일 시끄럽다. 다가오는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으로 임(壬)은 검은색, 인(寅)은 호랑이를 뜻한다. 검은 호랑이 기운을 받아 보다 안정된 내년을 기대해도 될까.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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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2-27 12:31:40
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

윤진한 2021-12-27 12:30:54
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 유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http://blog.daum.net/macmaca/3131@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

윤진한 2021-12-27 12:29:48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

윤진한 2021-12-27 12:29:02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