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YS가 '노병구'를 지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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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YS가 '노병구'를 지목했습니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2.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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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하늘의 뜻 국민의 뜻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

#1. 국민의 거센 민주화 요구에 밀려 전두환은 그때까지 부당하게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있던 대부분의 정치인들을 1984년 11월 30일자로 크게 은전이나 베푸는 양 해금 조치했다. 그때도 풀리지 않은 빛나는 정치인들을 들자면, 김영삼·김대중·김상현·홍영기·윤혁표·김윤식·김덕룡 등이었다.

1985년 2월12일로 예정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화세력이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때까지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김대중 씨를 비롯해서 적잖은 인사들이 총선참여를 반대했지만, 김영삼 총재와 더 많은 인사들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원내외에서 힘을 합쳐 민주화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 결과 마침내 1984년 12월20일, 신한민주당 창당발기인대회를 열게 되었다.

신한민주당은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창당에 임했다.
①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폐지
② 김영삼, 김대중 등에 대한 전면 해금 단행
③ 조기총선 철회와 선거실시일 연기
④ 자생적 민주정당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제도적 개혁과 국민역량 결집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민주회복을 위해 이번 총선을 대승으로 이끌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
 
이렇게 해서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식으로 빠르게 창당되었다. 총재에는 이민우 씨를 선출했고, 나는 창당대회 후 이민우 총재의 명을 받고 당의 기강을 잡는 당기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민주화운동은 돕지만 정치를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김영삼 총재는 민주화의 붐을 조성하기 위해 종로에 지역기반이 전혀 없는 이민우 총재를 우리나라 정치 1번지인 종로·중구 지구당에 입후보하도록 강권했다. 이민우 총재는 “사람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것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있느냐”며 거부했지만, 김영삼 총재의 끈질긴 강권에 굴복해 할 수 없이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다는 각오로 이를 수락한다고 하며 종로·중구에 입후보했다.

김영삼 총재와 전국에서 달려온 민주산악회 회원들의 열렬한 운동에 힘입어 지역 국회의원 선거사상 유례없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합동유세장마다 10만이 넘는 청중이 몰려와서 마치 대통령선거를 방불케 하는 붐이 일어 그 붐을 타고 전국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들이 ‘신당돌풍’을 일으켜 상상 외로 선전하면서 기존 야당인 민한당을 더블로 이겨 전두환에게 민주화의 쐐기를 확실히 박아 놓았다.
 
그때까지 미국에 있던 김대중 씨도 선거 4일을 남겨 놓고 2년 만에 귀국하여 신민당이 승리하자 신당 창당에 반대하고도 무임승차하여 김영삼 총재와 함께 신민당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12대 국회의원 선거 후 전두환은 여론에 굴복해 그해 3월 6일 김영삼·김대중 씨 등 남은 정치규제자를 모두 해금하기에 이르렀다.

선거 후 당을 재정비하기 위해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아침 일찍 전당대회장에 나갔다. 멀리서 들어오던 김덕룡 비서실장이 “선배님, 귀 좀 빌려주세요” 하면서 내 귀에다 입을 대고 말했다.

“오늘 아침 김영삼 고문께서 전당대회에서 우리 쪽 전당대회 부의장에 노 선배를 선출하도록 하라고 지목하셨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그전에 민주산악회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었을 때도 놀랐지만, 전당대회 부의장 지명은 나에게는 더욱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정당에서 전당대회는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며, 정당의 기구 중 가장 먼저 선임되는 직책이 전당대회 의장·부의장 자리이고, 그것도 계보별로 한 자리씩 돌아간다.
 
그러니 김영삼 계보에 돌아오는 한 자리뿐인 부의장 선임에 김영삼 고문이 나를 지명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너무 고맙고 황송해서 한동안 어리둥절해했다. 전당대회가 시작되고 의장선거에 들어갔는데, 의장에는 송원영 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러고 나서 부의장 두 명을 선출하는데, 이철승계로 충북 영동·옥천·보은에서 여러 번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고 있던 최극 씨와 내가 선출되었다. 전당대회 의장석에 불려 올라간 나는 입추의 여지없이 앉아 있는 전국 대의원들을 향해 의장석에 앉으면서 나를 선출하도록 지목해준 김영삼 고문과 지금 이 순간 나를 부러워할 선배, 동지들에게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새롭게 했다.

12대 국회의원 선거 후 1985년 11월 15일, 김영삼 상임고문은 민주산악회와 민추 외에 개인사무실로 ‘민족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새로이 사무실을 열었다. 나도 자동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이 되어 민추사무실로, 민족문제연구소로, 그리고 민주산악회로 돌아다니며 매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민주화투쟁에 열을 올렸다.
 
민주산악회의 지부결성과 조직활성화
 
#2. 민주산악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나는 1986년에 들어오면서 지부장 인준과 조직활성화를 위해 더욱 열성을 기울였다. 사무처는 김진억 처장을 중심으로 매일 출근해서 매주 목요일에 정기산행 준비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직현황의 실무를 파악하기 위하여 모두가 하나 되어 헌신했다.

그리고 데모에 참가하는 날은 흩어진 민주산악회 회원들에게 광범위하게 알려 수많은 회원들이 나와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전투경찰의 최루탄 세례를 마다하지 않고 싸웠다. 무장경찰의 힘에 밀려 붙잡혀서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 경찰서로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고,  멀리 수원이나 인천 또는 수도권 외곽지역까지 실려가 아무 데나 내려놓는 날에는 집에 가거나 사무실까지 가는 데 애를 먹었다.
 
강원도 춘천시 지부의 발족연혁
 
#3. 민주산악회가 발족되어 등산을 시작한 수개월 후인 1981년 말부터 춘천의 지인용 씨가 서울 민주산악회의 등산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총재가 단식투쟁을 시작하기 수개월 전인 1982년 초부터 춘천회원 지인용, 김기선, 길용화, 주석주 등 6~7명이 서울본부 산행에 참가했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이 극심해 ‘김영삼 총재의 단식에 즈음하여’ 등 민주화운동에 대한 성명 또는 투쟁에 대한 보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산악회에서 이를 등사 또는 복사해 경찰, 정보부원과 숨바꼭질을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에게 배포하며 홍보에 열중했다.
 
이 홍보물을 돌리다가 들키면 바로 압수되는 것은 물론 안기부에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지인용 회원의 집에는 6~7명의 전투경찰을 보내 불법연금을 서슴지 않았고 보통 때도 정보과 형사 2명을 보내 동태파악을 위한 감시를 계속했다.

1982년 가을경 당시 김영삼 총재 비서실장 김덕룡 씨의 부탁을 받고 민주산악회 춘천시 지부를 결성했는데, 그때 참가한 인사 중 지금은 고인이 된 고 이동희 씨와 고 성승표 씨, 그리고 김진억 씨의 도움과 역할이 켰다. 1983년 2월 22일, 춘천시 중도 길용화 동지 댁의 비닐하우스에서 12명의 회원이 모여 민주산악회 춘천시 지부의 발기 및 결성을 완료했다.
 
|안기부와의 투쟁|
1983년 2월24일 지인용 회장이 안기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1983년 2월 26일부터 18일까지 김기선·길용화·이동희 씨 등이 안기부에 연행되어 심한 고통을 받았다. 또한 1983년 3월 2일까지 전 회원이 차례로 소환되어 고통을 당하고 3월 2일에야 연행되었던 모든 회원이 귀가했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서울의 민주산악회 본부는 국제적 여론을 감안해 어느 정도의 집회를 묵인했는데, 지방조직은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고 아예 싹부터 자르려고 매수, 협박, 구속, 고문 등으로 혹심한 탄압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지인용 회장은 안기부에 6회에 걸쳐 연행, 구속되었고 보안사 연행, 가택연금 등으로 약 1년 6개월간 고초를 당했다. 그들이 붙인 죄목은 ‘불온유인물 배포 및 반체제활동, 민주산악회 헌장선포 및 산악회 지방조직 1호’였다.
 
|춘천시 지부의 인준절차|
1983년 12월 8일 서면 삼악산(654미터) 정상에서 민주산악회 헌장선포 및 춘천시 지부인준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상임고문 김영삼, 회장 이민우 두 분을 지도자로 모신 가운데 춘천시 지부장 지인용, 부지부장 김기선·길용화, 총무 주석주 씨로 결정했다. 당일 참석인원은 서울 70명, 춘천 30명, 속초 10명이었다.

하산길에 김영삼 상임고문과 이민우 회장 등 그날 참가한 모든 회원이 지인용 지부장의 초청으로 춘천시 별당막국수집에서 식사를 하고 오후 5시경 별당막국수집 앞 사거리에서 민주회복 염원 행사를 마친 뒤 서울팀은 귀경했다.

김영삼 상임고문과 이민우 회장 그리고 서울회원들이 떠난 뒤, 안기부 요원과 지인용 회장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안기부 총무계장과 요원 세 명이 지인용 회장의 양팔을 잡고 지인용 회장의 안면 및 복부를 가격하며 차에 강제로 태우려고 했고, 이에 지인용 회장이 완강히 저항하며 보도블록을 깨서 대항하다가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막국수집 주방에 들어가 식칼과 유리병(술병)을 깨서 들고 나와 약 30~40분가량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저항하던 중 속초출신의 남성 회원이 택시를 타고 서울팀을 쫓아가 의암댐 부근에서 김영삼 상임고문에게 보고했고, 상임고문과 서울회원이 현장으로 달려오자 이에 당황한 안기부 직원이 현장에서 김영삼 상임고문에게 사과함으로써 사건은 수습되었다.

이때 지인용 회장은 구타를 당해 3주간의 치료를 요하는 진단이 나올 정도였으나 도경 정보과요원의 개입으로 10일간의 치료를 요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4일 후 당시 안기부장이 직접 사과전화를 하면서 “민사상 보상을 하겠다”기에 지인용 회장은 “그런 건 다 필요 없고 이 나라의 민주화로 보상받겠다”고 대답해주었다.

그 후에도 민주화요구, 유인물배포, 그리고 민주화투쟁 등으로 6월 항쟁 때까지 끊임없이 투쟁해오던 중 극심한 탄압과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타오르는 민주화투쟁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강원도지부 결성을 다짐하고 춘천 20명, 속초 20명, 태백 20명, 삼척 20명 등이 모여 강원도 민주산악회 지부를 결성했다. 이때 지부장에 지인용 씨, 부지부장에 김진하 씨가 선출되었으며 총무에 주석주 씨가 임명되었다.

그 후 춘천시 지부의 재구성으로 임원개선을 해서 지부장에 지인용 씨, 부지부장에 김흥주·전재현·이정만 씨, 여성부장에 김순자 씨로 구성하고 해마다 12월 8일 민주산악회 헌장선포식 및 인준장소인 춘천시 삼악산 정상에 등산해 기념행사를 개최하면서 회원을 확대, 발전시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굳건히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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