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사재 털어 시작한 반도체”…이건희, 외로운 싸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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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신문 보기] “사재 털어 시작한 반도체”…이건희, 외로운 싸움의 시작
  • 방글 기자
  • 승인 2022.01.19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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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50년' 자본금 10억 회사 인수해 연매출 300조 회사로
후발주자의 불안 계속…"월반하지 않으면 기술 후진국 된다"
반도체 흑자 나자, 현대 제쳤다…88년 일어난 재계 판도 변화
미쓰비시 "삼성은 반도체 못 해" 발표 10년, 글로벌 1위 올라
"수조원 이익에 기쁘다고?…사업이 잘 될수록 더 불안했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방글 기자)

이건희와 韓반도체 50년 역사. ⓒ시사오늘 김유종
이건희와 韓반도체 50년 역사. ⓒ시사오늘 김유종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전자와 자동차 기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유학시절에도 새로 나온 전자제품들을 사다 뜯어보는 것이 취미였다. (중략) 특히 1973년에 닥친 오일쇼크에서 큰 충격을 받은 이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1974년 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시대 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핵심인 반도체 사업이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 생활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반도체 생산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고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기 때문이다.”- 이건희 에세이 모음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지금 와서 보면 반도체 사업처럼 내 어깨를 무겁게 했던 일도 없는 것 같다. 시작부터 외로운 싸움이었다. 

1974년, 한국반도체라는 회사를 인수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아버지(이병철)에게 건의했다. 아버지는 회사 규모가 너무 작다며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경영진들조차 반대했다. ‘TV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데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아버지는 회사 규모가 작은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어찌 보면 회사 규모가 작아 다행이었다. 나(이건희)는 개인 자금으로 한국반도체의 지분 50%를 인수했다. 워낙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았고, 전자회사에 반도체 사업이 없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 같았다. 자동차에 엔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3년 후에는 잔여 지분 50%까지 추가로 인수했다. 당시에는 자본금 100만 달러 규모의 회사였다. 

스스로 회사를 사들인지 5년 만에 삼성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1978년 3월 2일,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했다. 원진전자를 추가로 사들이면서였다. 

원진전자 인수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확장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원진전자를 인수하고 기존 한국반도체를 삼성반도체로 개칭, 미국의 GE, ITT 등과 기술제휴로 반도체 사업 확장에 착수했다. 15일 업계에 의하면 삼성전자는 방계인 한국반도체의 신규사업 확장을 위해 경기도 용인에 있는 원진전자의 건물과 시설 일체를 인수, 회사 삼성반도체로 개편하는 한편 자본금을 4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대폭 증자하고 기존 삼성전자 중간 간부진을 반도체 사업에서도 전보, 보강했다. 

- <매일경제> 1978.03.15

ⓒ네이버
매일경제는 1979년 9월 17일 삼성전자가 삼성반도체를 흡수합병한다고 보도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이듬해에는 삼성전자의 품에 안겼다. 

삼성전자, 삼성반도체 흡수합병

삼성전자는 지난 14일 이사회 결의에 따라 계열 삼성반도체를 흡수합병키로 했다. 

1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삼성은 전자산업의 첨단이며 전자제품의 국제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기본 목적으로 반도체 고급화가 시급하다고 판단, 삼성전자와 삼성반도체의 흡수합병을 통해 경영합리화를 기하기로했다. 

따라서 삼성은 연말까지 통합, 내년부터 전자사업 분야를 1개 사업본부로 출범케되는데 이때부터는 신규기술의 도입 및 해외 마키팅 활동을 강화키로했다.

삼성반도체는 지난 74년에 설립되어 현재 자본금 23억 원에 종업원 1천명 규모로 그동안 CMOSLSI칩과 바이폴러 TK칩 등을 생산하는 한편 조립 및 원자재 사업까지 병행해왔었다.

- <매일경제> 1979.09.17.

아버지가 반도체 사업을 공식화 한 것은 그로부터 4년가량 지나서였다. 

1983년 2월, 아버지는 일본 도쿄에서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다. 선언문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통해서다. 

하지만 외로운 싸움은 계속됐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조차 응원해주지 않았다. 내부 직원들은 “삼성 반도체로 발령되면 퇴직하겠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뱉었다.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까지 내놨다.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회사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업이 좌초될 것 등의 이유를 들었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한지 이미 10년이 지난 후였다. 

반도체 사업을 선언한 아버지조차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선언 한 달 후, 아버지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대담 기사를 통해 불안한 아버지의 마음을 확인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외채 갚으려면 절약 운동 펴야”

오늘 아침에도 회사에서 반도체 회의에 들어가봤습니다. 삼성도 반도체에 손댄지가 10년이 넘었지만 발전이 별로 없습니다. 일본 도시바에서는 1년에 컴퓨터 반도체 개발사업에 1천억 엔을 쏟아 넣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는 3천억 원이 넘는 돈이지요. 기술자만도 5천~9천명이 매달리고 있어요. 수십 년을 그렇게 해도 미국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독 10억 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반도체사업 계획서를 봤더니, 일본 기술을 몇 년 안에 따라잡겠다고 되어 있더군요. 비장한 각오가 아니고는 어렵겠습니다.

-<조선일보> 1983.03.05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큰 목표를 갖고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일에 착수하면 물고 늘어졌다.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했고 △서적을 읽고 자료를 뒤지고 기록으로 남겼다. △철저하게 습득하고 지시하고 확인했고, △항상 생각하고 확인해서 신념을 갖는 연습을 했다. - 삼성 <반도체인의 신조 10가지> 中

아버지가 반도체 진출 선언을 한지 10달 만인 그해 12월, 국내 최초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세계에서 3번째로 거둔 쾌거였다. 

삼성전자가 1983년 12월 64K-D램 개발에 성공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삼성전자가 1983년 12월 64K-D램 개발에 성공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64K-D램 국내 개발 양산
반도체 첨단기술 제품…세계 3번째
미-일과 기술 격차 크게 좁혀

반도체의 첨단기술 제품인 64K-D램(RAM)반도체가 국내에서 처음 개발,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삼성반도체통신은 1일 현재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첨단반도체제품인 64K-D램의 자체생산에 성공, 미국 및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양산체제를 갖추었다고 발표했다. 

(중략)

64K-D램 반도체의 국내개발로 미국 일본과의 반도체 기술격차가 10년 이상에서 2~3년으로 단축됐으며, 컴퓨터 자동사무화기기 등 국내산업의 급속한 기술혁신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조선일보> 1983.12.02

사실 우리는 후발 주자였다. 미국의 중소 반도체업체인 코미(KOMY)사가 간단한 트랜지스터 생산을 위해 반도체 합작사를 국내에 설립한 게 한국 반도체산업의 시작이었다. 외국회사와 협업하거나, 그나마도 조립사업에 집중하는 수준에 그쳤었다. 그렇게 10년을 홀로 내달린 결과, 10년의 격차가 2년으로 좁혀졌다. 

하지만 격차를 좁혀갈 뿐 앞서갈 수가 없었다. ‘월반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이 될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아버지 아래서 반도체에만 몰두해있었다. 1987년 11월 19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식. ⓒ삼성 제공
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식. ⓒ삼성 제공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성 회장 직에 앉았다.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다행히도 성장은 계속됐다. 이 해, 반도체 분야에서 처음으로 흑자가 났다. 이듬해에는 삼성이 현대를 제쳤다고 세상이 떠들썩했다.

88연대 재계 판도 큰 변화

10년 전인 79년 그룹 매출 3위였던 삼성은 84년 럭키금성을 제치고 88년 현대를 앞질러 재벌 정상을 차지했으며 89년 실적으로도 수위자리를 지킬 전망이다. 삼성그룹의 89년 추정매출 23조원은 지난 79년(1조4천8백60억원)의 무려 15.5배로 국내 20대 재벌 중 최고의 매출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삼성은 지난 85년 그룹총매출 10조 원을 돌파한 뒤 3년만인 작년 20조원을 넘어서는 고속성장을 지속했다. 

창업자인 이병철 씨가 지난 87년 11월 작고, 후계경영체제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없지 않았으나 3남인 건희 씨가 곧바로 경영대권을 승계해 재벌 아성을 더욱 단단하게 쌓고 있다. 

-<동아일보> 1989.12.18.

1990년대 들어 PC가 대중화됐다. 그간 PC는 기업에서 대형 컴퓨터로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개인용 PC가 나오면서 D램의 크기가 줄고 가격이 저렴해져야 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D램으로 가격 경쟁력을 높였다. 시장 점유율을 좁히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제 일본에서 당한 설움을 털어낼 차례였다. 

1992년, 삼성은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1993년에는 5라인을 6인치 웨이퍼 라인으로 건설하지 말고, 당대 최대 사이즈인 8인치 라인으로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월반을 시도한 그 해, 메모리 시장 글로벌 1위에 올라섰다. 미쓰비시가 ‘삼성은 반도체를 할 수 없다’고 공개처형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삼성전자, D램 시장 장악 일사 제치고 13.6% 점유

삼성전자가 지난해 세계 D램 시장을 석권했다.

국제공인 조사기관인 데이터퀘스트가 26일 발표한 세계 반도체 업계 매출 순위에 의하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D램 매출은 전년 대비 35% 증가한 11억9천2백만 달러로 세계 D램 시장의1 3.6%를 점유해 세계 1위에 올랐다. 반면 91년 9억5천7백만 달러의 D램 매출로 1위를 차지했던 일본 도시바사는 지난해 11억 1천4백만 달러에 머물러 삼성전자에 1위 자리를 내놓았다. D램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57%를 차지하는 핵심 품목으로 현재 국내업계는 반도체 수출의 90%를 이 품목에 의존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또 S램 시장에서도 전년 대비 83% 늘어난 1억 7천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 91년 10위에서 지난해 7위로 3계단이나 뛰어올랐다. 

-<경향신문> 1993.04.27.

회사는 거침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불안했다. 세계적인 변화, 그 속의 삼성. 어떤 날은 그 희망과 기대에 흥분이 돼 기다릴 수 없었다. 어떤 날은 부담감에 짓눌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기대와 위기감을 함께 느꼈고, 흥분과 불안이 동시에 엄습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마누라-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세계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었다. (중략) 92년 여름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해외에서 사장단회의를 잇따라 가진 끝에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건희 에세이 모음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 모습. ⓒ삼성 제공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 모습. ⓒ삼성 제공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극에 달했던 그 때, 회사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단이 섰다.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거였다.

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주요 임원들을 프랑크푸르트로 긴급 소집했다. 

신경영 전파를 위한 회의와 교육을 이어갔다. 6월 24일 보름이 넘는 기간동안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 등에서 직접 회의를 주재했다. 7월 4일부터는 일본에서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를 오가며 한달간 회의와 특강을 계속했다. 근 두달간 삼성 전반의 DNA를 바꾸기 위한 대장정이 이어졌다. 

임직원과 나눈 대화시간만 350시간에 달했고, 그 회의를 풀어쓰면 A4 8500매가 나온다고 했다. 

말만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부터 보여줘야했다. 삼성 내부에 긴장감이 필요했다. 연말 인사를 통해 내 의지를 확인시켜야 했다. 

삼성 젊은사장 대거 발탁
창사 이래 최대규모 인사…세대교체로 '질 중시 경영' 추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발목잡는 5%' 솎아내기 인사가 속도를 높이고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달 비서실 인력을 대폭 줄인 데 이어 5일 그룹 창립 이래 최대 규모의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삼성은 김정상 호텔신라 사장 등 원로급 사장 5명을 퇴진시켰으며, 25개 전계열사 사장단 34명 중 대부분인 27명을 승진 또는 이동시켰다. (중략) 삼성그룹은 "신경영은 인사개혁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이 회장님 방침에 따라 국제 감각있는 젊은 인재를 발탁한 지난달 비서실 인사와 같은 맥락에서 이번 인사가 단행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삼성은 또 "이 회장의 위기론과 변화론을 뒷받침할 수 있고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춘 인물을 발탁했다" "변화의지가 뚜렷하고 유능한 인물을 최고경영진에 포진시켰다"고 강조함으로써 앞으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라"는 이 회장의 질경영이 더욱 강력히 추진될 것으로 관측했다. (중략)

- <한겨레> 1993.11.06

 94년에는 국내 제조업체 사상 처음으로 매출액이 10조 원을 넘어섰다. 

삼성전자, 작년 매출 11조5천억
순익은 9천4백억…1년새 6배 증가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조5천1백81억원의 매출을 올려 9천4백5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고 25일 밝혔다. 하루 매출액으로 환산하면 웬만한 중견기업의 1년 매출액과 맞먹는 3백15억5천6백만원이다. 

(중략)

사업분야별 매출 실적을 보면 가전에 4조3천3백44억 원, 정보통신 분야가 1조8천3백5억원, 반도체‧컴퓨터 분야가 5조3천5백32억 원 등이다. 

삼성전자는 94년 국내제조업체로는 처음 매출액이 10조 원을 넘어섰으며 95년에도 제조업 매출 1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 <경향신문> 1995.02.26.

자본금 100만 달러, 그러니까 10억 원이 조금 넘는 회사를 인수한지 20년이 된 해, 매출액은 10조 원을 넘어섰다. 회사의 성장이 피부로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한해 한해 성장하는 만큼, 하루하루 전쟁같았다. 

사업이 잘 되고 있지만 계속 불안했다. 그 다음이 걱정됐다. 1997년, 1998년이 되면 기본 경쟁력이 안 돼서 진짜 불경기가 올 것이었다. 지금 반도체가 잘 되고, 이익이 몇 조원씩 나니까 다들 내가 기분 좋아하고 들떠 있는 걸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더 불안해 하고 있었다. -<이건희의 말 188p 참조>

1995년에는 256M D램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했다. 그 날이 8월 29일. 경술국치일이었다. 미쓰비시에 당했던 수모를 이렇게 되갚았다. 두번 째 복수를 마치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반도체 신화' 재현 제2도약 일군다

(중략) 새해를 맞는 삼성전자의 각오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반도체분야는 기술력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손톱만한 크기의 반도체 칩에 얼마만큼의 정보량을 담고 정보처리 속도를 얼마나 빨리 가져가느냐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83년 64K D램 개발 당시 일본에 4년이나 뒤졌던 삼성전자는 1메가 D램에서 2년으로 격차를 좁힌 뒤 92년 64메가 D램에서 일본을 따라잡았다. 94년 256메가 D램에서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시장을 장악했다.  (중략) 삼성전자가 당시 256메가 D램 개발을 발표한 날은 8월 29일. 구한말 우리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준 경술국치일이다. 당시 개발을 담당했던 엔지니어들은 1910년 일본에 당했던 수치의 일부를 갚았다는 기쁨에 가슴이 뿌듯했다. 

- <경향신문> 1998.01.01

신년 구상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있었다. 2000년 경영전략 키워드는 '1등'으로 정했다. 1등이 될 가능성이 없는 사업은 버리고 가야 했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과거의 성공에 도취해있다가는 정상의 자리를 내어주게 될 판이었다. 5년, 10년 뒤에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선두 사업은 끊임 없이 추격을 받고 있고, 부진한 사업엔 시간이 없었다. 

삼성 '2000년 경영전략' 내용·의미 신규 인력 2배 늘려 8000명채용

삼성이 24일 발표한 2000년 경영전략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1등주의'다.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도 "삼성의 전략은 '넘버원(No.1)이 아니면 포기한다'는 1등 전략"이라며 "디지털을 중심으로 한 전자·반도체·통신·금융 분야에서 세계 최고기업이 되겠다"고 말했다. 

(중략) 삼성은 이 같은 투자 확대를 통해 핵심사업의 경쟁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세계 1위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품목을 현재 12개에서 2003년에는 30개로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 <매일경제> 1999.12.25

한편, 삼성전자의 2021년 매출은 역대 최대 규모인 279조400억 원으로 집계됐고, 영업이익은 51조6000억 원을 기록했다. 이 중 반도체 부문 매출은 94~95조 원, 영업이익은 30조 원 규모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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