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㉕] 2022년 설날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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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스케치㉕] 2022년 설날 단상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1.31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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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설날'과 유년기 설 명절의 그리움
설날 대표음식 떡국, 장수와 재복 기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설날, 윤극영 작사·작곡)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이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세밑 풍경을 그리자면 몸은 현실에 있으나 머릿속은 온통 과거로 회기해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까치 까치설날을 부르던 동요가 입안에서 맴돈다.

몇 해 전 꼬까옷 입고 세배하는 해맑은 어린 손자들. ⓒ정명화 자유기고가
몇 해 전 꼬까옷 입고 세배하는 해맑은 어린 손자들. ⓒ정명화 자유기고가

유년기를 돌이켜 보면 방학 다음으로 설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다. 때때옷이라 불리던 색동저고리 한복 설빔과 세뱃돈에 대한 기대가 커서였다. 요즘은 물자가 풍족해 아쉬울 게 없지만 예전엔 명절이나 돼야 새 옷을 얻어 입던 시절이다.

설이 다가오면 할머니와 엄마의 손길이 바빠졌다. 씻어 불린 쌀을 집 앞 방앗간에 맡겨 뜨끈뜨끈한 긴 떡가래를 뽑아 커다란 대야를 머리에 이고 오는 정경이 펼쳐진다. 그리곤 꾸덕꾸덕 말려서 어슷하게 떡국떡을 썰어 떡국 끓일 채비를 서둘렀다.

떡국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설에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 단연 떡국이다. 언제부터 설에 떡국 먹는 풍속이 생겼을까. 1819년 서울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김매순의 ‘열양세시기’와 1849년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 떡국은 설 차례와 세찬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으로 시장에서 팔기까지 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볼 때 그 역사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설날에는 떡국을 먹을까. 장수와 재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떡국의 재료는 쌀로 빚은 긴 가래떡이다. 이처럼 가래떡을 다른 떡과 달리 끊어지지 않도록 길게 늘여 만드는 것은 장수를 상징한다. 엽전처럼 둥글게 써는 것은 돈을 상징하고 길게 늘인 가래떡처럼 재산이 쭉 늘어나라는 의미다.

쌀은 우리 민족에게 식량이기 이전에 신앙의 대상물이었다. 그래서 흰쌀로 빚은 가래떡이나 백설기는 순수하고 깨끗해 부정이 들지 않는다고 믿었다. 새해 첫날인 설에 흰 떡국을 먹음으로써 일 년 열두 달을 아무 탈 없이 보내려고 한 것이다.

차례상. ⓒ연합뉴스
차례상. ⓒ연합뉴스

신정과 구정

우리 민족에겐 오랫동안 신정과 구정이라는 두개의 설이 존재했다. 삼국시대에 이미 차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설을 쇤 것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다. 음력설은 우리 최대의 명절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수난의 역사가 시작됐다. 일제는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우리 명절을 부정하고 일본의 명절 양력설인 ‘신정(新正)’을 쇠도록 강요했다. 이때부터 양력설과 음력설을 모두 쇠는 이중과세(二重過歲) 풍속이 생겼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사라질 뻔했던 음력설은 해방되고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도 이 같은 풍속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중과세 금지, 신정단일과세(新正單一過歲) 정책을 펼치며 신정을 권장했고, 신정은 3일 연휴를 부여한 반면, ‘구정(舊正)’은 공휴일로 지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정부는 1985년이 돼서야 음력 1월1일을 ‘민속의 날’로 정하고 하루 공휴일을 부여했다. 우리가 ‘설날’을 되찾은 것은 1989년의 일이다. 이후 신정 휴일이 1월1일 하루로 줄어들면서, 음력 1월1일이 명실공히 설날이 됐다.

그렇다고 신정이 갖고 있는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이제 한해의 새로운 다짐을 위한 시작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새 출발을 다짐하며 년초에 일출보러 정동진 겨울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추억의 할머니표 밤양갱

신정 구정 구분에 헷갈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유년기의 명절은 많은 추억이 서린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다.

우리집에서는 기본적으로 떡국과 함께 쑥떡과 인절미를 준비했다. 방앗간에서 커다란 떡 뭉텅이를 뽑아와 너른 나무 떡판에 올려 적당한 크기로 썰어 콩고물을 묻히면 된다.

할머니께서 떡 만드는 모습은 지금도 바로 옆에서 보이는 듯 생생히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떡판옆에 앉아 만들어진 떡을 집어 먹는 것은 내 몫이다. 떡은 집안의 대표 간식으로 창고방에 넣어 두고 마른 쑥떡을 화로에 구워 조청이나 연시 대봉감에 찍어 먹었다.

여기에 다양한 전 종류와 온갖 나물 준비 외에 설을 기다리며 집에서 만드는 음식 중 가장 기대되는 것은 할머니의 작품 밤양갱이다. 편육 등 명절에만 특별히 만들어 먹는 음식들이 있었는데 차례 지내기 전 먹지 말라는 할머니의 령이 떨어졌음에도 나는 주변에서 맴돌다 몰래 미리 집어 먹곤 했다.

유년시절, 설이 다가오면 내 고향 시골 동네 시장이나 방앗간, 마을의 좁은 골목들에 온통 활기가 돌았다. 설 연휴가 시작되면 타지에서 살던 가가호호 가족들의 귀향 행렬로 조용하고 한산한 마을이 모처럼 북적였다. 고요한 동네에 모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어린아이들은 새로 장만한 설빔 입어보기를 반복하고 그믐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속설에 허벅지를 꼬집으며 잠을 쫓았던 기억이 난다.

2022년 긴 연휴, 이제 할머니로

온갖 음식 준비로 할머니와 엄마의 설날은 명절 내내 고단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몰랐다. 그 고충을 이해하기보다는 즐거움에 신나 하는 유년기였다. 어른이 되어 명절을 맞아 대사를 준비하고 주관하는 입장이기에, 어린 시절 그저 어른들의 손끝으로 준비된 명절을 받아 즐기기만 했던 그 시절 명절의 풍광이 그립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아련한 추억의 설날은 어디로 가고 핵 가족 시대에 코로나로 그다지 설 기분이 나지를 않는다. 가족이 설빔을 입고 세배를 드리며 한 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기쁜 날이건만, 올해 설은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의 여파, 오미크론의 급속한 확산으로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명절이 될 듯하다.

상황이 이러니 가정마다 설날을 맞아 귀향길은 선뜻 내키지 않는다. 코로나 때문에 귀향을 포기한 가정이 많다. 자식과 손주 걱정에 부모님 또한 좌불안석이다. 마음과는 달리 "차라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2년 가까이 보지 못한 손자와 손녀가 왜 안 보고 싶겠는가.

먼 훗날이 되면 우리의 자손들은 과연 설날이 되어 어떤 형태로 지낼까.

어쨌든 예전 우리의 할머니가 만든 설 명절의 추억을 내가 60대 할머니가 되어 어린 손주들에게 만들어줄 때다. 귀한 손님 손주들 맞이 하느라 대청소와 이부자리, 음식 준비로 내 손길이 바쁘다. 이 나이가 되어도 유년기 할머니를 그리는 것처럼 우리가 떠난 후에도 손자들에게 최고의 추억이 되길 기대하면서….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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