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고 어느덧 설날도 지났다. 고3이던 딸아이는 지난해 치른 수능 결과가 몹시 아쉬웠던 모양이다. 아예 재수를 결심하고는 일찌감치 학원생활에 돌입했다.
학원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딸아이는 내게 산을 한번 데려가 달라고 했다. 사람도 많지 않아야 하고, 대중교통이 아닌 아빠 차를 타고 가야 된다는 게 전제 조건이었다. 학원에서도 작금의 코로나19 상황이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는지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생활지침을 꽤 자세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주 한파는 무척 매서웠다. 우리나라에서 겨울 한파로 유명한 곳이 철원 일대다. 예전에는 그쪽 산들은 군부대가 많아서 민간인에 대한 통제가 심했지만 지금은 길도 좋아지고 산길도 제법 좋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와의 오랜만의 산행지로 경기 연천과 강원 철원 일대에 걸쳐 있는 고대산을 택했다.
고대산은 철원의 금학산과 함께 겨울 눈 산행지로 널리 알려진 산이다. 워낙 기온이 낮아서 한번 내린 눈이 잘 녹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철원평야와 어우러져 만들어낸 산세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사시사철 아름다운 곳이다. 딸아이에게 고대산을 가자고 했더니 우리나라 명문 사립대 중 한 곳을 연상했는지 "산 이름이 왜 그래? 무슨 의도라도 있는 것 아냐?"라며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수험생의 심기는 변화무쌍해서 항상 조심스럽다. 딸아이의 오해와는 달리 고대산의 '고대'(高臺)는 골이 깊고 산도 높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침 일찍 우리 부녀는 짐을 챙겨 연천으로 향했다. 아직은 낯선 학원생활을 하면서 말없이 조용하게 지내왔던 탓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이제 막 말문이 터진 것처럼 새로운 친구들이며 선생님들 이야기 등등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런대로 새로운 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됐다. 이윽고 우리 부녀는 고대산 주차장에 도착하며 산행을 시작했다.
고대산 등산로는 세 개 코스가 있다. 그중 우리는 3코스로 올라가기로 했다. 명절이 지난 후 기온이 뚝 떨어진 데다가 서울에서도 한참 북쪽에 있는 산이다 보니, 불어오는 바람의 강도가 아래쪽 바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지만 산행을 시작하자 이내 열이 났다. 그리고 곧 표범폭포에 도착했다. 폭포수가 흐르던 궤적이 그대로 깡깡 얼어붙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딸아이는 겁도 없이 미끄러운 비탈 바위를 지나 폭포 아래까지 성큼성큼 걸어가 거대한 얼음이 된 폭포수를 손으로 직접 만져보기도 했다.
고대산에는 진지며 벙커나 초소와 같은 군 시설들이 군데군데 있다. 또한 가파르고 험한 비탈길에는 그 무거운 폐타이어를 옮겨다가 흙을 다져 만들어놓은 계단 길도 많다. 군대를 다녀온 우리나라 성인 남자라면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애잔하리라. 분단의 아픔이 어쩌고 하는 거창한 것보다는 '진짜 뺑이 쳤겠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것은 나뿐일까?
아무튼 이곳도 바위가 많은 산이다 보니 눈 덮인 산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딸아이는 어릴 적부터 큰 산을 제법 경험해본 탓에 그런대로 여유롭게 산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차디찬 산바람을 피해 평지를 골라 비닐 쉘터를 뒤집어쓰고 라면과 요기 거리를 먹으며 점심을 때웠다. 까탈 부리지 않고 해주는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맛있게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야전을 즐기는 나를 닮은 것 같아 왠지 모르게 흐뭇하다.
드디어 고대산 정상에 도착했다. 햇살이 그대로 내리 쬐어서인지 정상은 오히려 포근했다. 탁 트인 시야는 상쾌하기까지 했다. 딸아이도 철원평야와 마을 그리고 산세가 어우러진 모습을 보며 “예쁘다~”라며 그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리고 정상에 있는 안내지도와 실제 풍경을 번갈아 보며 대조해보더니 북한의 노동당사며 백마고지를 알아보고는 '저기 저거 책에서 봤다'며 무척 신기해 했다.
우리는 멋들어진 풍경에 취해 한참을 머무르다 정상과 이어진 능선 길에 있는 삼각봉과 대광봉을 들렀다가 2코스로 하산 길을 잡았다. 2코스는 몹시 가파르고 위험하지만, 칼바위 능선과 말등바위 등 어디에 서던 전망대인 것처럼 멋진 조망을 볼 수 있고 그만큼 볼거리도 많다. 그렇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던, 한적하고 오붓했던, 딸과의 고대산 등산을 마쳤다.
요즘 애들을 보면 짠하다. 나의 졸업식 때면 밀가루를 서로에 뿌려대고 온 가족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이제 그런 풍경은 '그때 그 시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요즘 대입 전형은 뭐가 그리도 다양하고 복잡한지…. 하지만 꽃이 떨어졌다고 비바람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딸아이는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돼 가고 있었고, 나는 그저 다시 한 번 아이를 믿고 응원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다만 공부하다 힘들 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에 부칠 때, 산을 찾아 오늘처럼 위안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돌아오는 길, '아빠가 운전하다가 졸릴지 모르니 잠들지 말고 계속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건만 출발하자마자 딸아이는 꾸벅꾸벅 졸더니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차 안에서 잠든 딸아이의 모습은 여전히 응석받이였던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어느새 고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 다 큰 처자가 됐다. 그만큼 나의 세월도 흘러 있었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