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테러] 진실 못 밝힌 역사, 네거티브 잉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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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테러] 진실 못 밝힌 역사, 네거티브 잉태하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2.02.2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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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이념 대립에 희생된 송진우·여운형·김구
군사독재정권에 탄압 받은 ‘민주화투사’ YS·DJ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지독한 네거티브전의 늪에 빠진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주요 정치 테러를 되짚어봤다. ⓒ시사오늘
지독한 네거티브전의 늪에 빠진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주요 정치 테러를 되짚어봤다. ⓒ시사오늘

최악의 대선이다. 선거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미래를 향한 비전과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날까지도 공약집이 나오지 않았을 정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비전과 정책 부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래가 사라진 자리는 진위(眞僞)를 알 수 없는 네거티브가 채웠다. 어떤 후보는 ‘조직폭력배’와 연루돼 있다고 하고,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무속신앙’에 기대 국정을 운영할 거라고 한다. 진실이야 어떻든 일단 상대 후보 표만 깎으면 그만이라는 태세다.

그렇다면 ‘아니면 말고’ 식의 네거티브는 어디서 왔을까.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그 기원을 ‘정치 테러’에서 찾는다. 송진우와 여운형부터 김영삼·김대중에 이르기까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수차례 정치 테러가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배후(背後)가 밝혀진 적은 없다.

이처럼 “정치 지도자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을 뻔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진범(眞犯)을 찾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우리 역사가 ‘일단 뱉고 보는’ 식의 네거티브를 잉태했다”는 게 정 평론가의 통찰이다. 이에 <시사오늘>은 지독한 네거티브전의 늪에 빠진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주요 정치 테러를 되짚어봤다.

 

신탁통치 둘러싼 갈등의 희생자 송진우


해방 직후 한반도는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격랑에 휩싸였다. ⓒ한국역사연구회
해방 직후 한반도는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격랑에 휩싸였다. ⓒ한국역사연구회

해방 후 이념 갈등이 극심해지고 있었던 1945년 12월 27일. 한반도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사들이 ‘합동통신 워싱턴발 25일자 보도’를 근거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막사과(莫斯科·모스크바)에서 삼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가고 있다. 즉 번즈 미국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십팔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명백한 오보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합의된 실제 내용은 △한국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 미국과 소련이 미·소공동위원회를 2주일 이내에 구성하며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안을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사들의 오보로 인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는 ‘새로운 식민통치’에 대한 결의로 와전됐다.

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내세우며 우익의 독자 세력화를 이끈 인물이었다. ⓒ고하송진우기념사업회
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내세우며 우익의 독자 세력화를 이끈 인물이었다. ⓒ고하송진우기념사업회

당연히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신탁통치 반대는 독립운동 구호가 됐고, 찬탁(贊託)은 매국(賣國)과 동일시됐다. 12월 30일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 전문이 보도됐지만, 이미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좌익 진영은 신탁통치를 빠른 독립을 위한 지원으로 규정하면서 신탁통치안 수용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은 좌우 이념 갈등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벌어진 사건이 송진우 암살이었다. 송진우는 조선건국위원회가 박헌영·여운형의 주도 아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내세우며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우익의 독자 세력화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익 정당의 특성상 한민당에는 일제 강점기 상층 계급이었던 사람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고, 때문에 민중들과 괴리될 수밖에 없었던 한민당은 세력 확대를 위해 미군정의 정치적 파트너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한민당은 해방 직후의 사회상황을 반영해서 여러 세력이 다양하게 참여하였다. 한민당에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 한민당은 8·15 이전의 민족개량주의를 계승하였으며, 일제시기에 지주·부르지아지로 상층계급에 속했던 일종의 지배 엘리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민당의 등장은 식민지적 경제·사회구조의 재현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웠고, 식민지적 경제·사회구조의 잔존을 피부로 느끼게 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문제는 임시정부가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현실주의자였던 송진우는 자신이 반탁(反託) 입장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신중론’을 폈다. 그러나 12월 29일 밤 경교장에 모인 사람들은 송진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 고하(송진우)는 찬탁파요?”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반탁으로 국민을 지나치게 흥분시킨다면 뒷수습이 곤란할 것이니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서 시국을 원만히 수습해야 하지 않겠소?”
“무슨 소리요. 짚신감발을 하고라도 전국 방방곡곡에 유세를 펴서 찬탁하는 미국을 반대하고 군정을 배척해 당장 독립을 쟁취해야 하오. 반탁 뒤에 오는 모든 사태는 우리가 맡지.”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독립을 향한 집념 : 고하 송진우 전기>

이 일이 있은 직후인 1945년 12월 30일 새벽. 송진우는 자택에서 한현우 등의 저격을 받고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송진우 암살범으로 밝혀진 한현우는 송진우·여운형·박헌영을 민족 분열을 초래한 파벌적 인물로 지목하고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미군정은 김구를 지목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이렇게 해방 후 최초로 일어난 정치 테러는 미궁에 빠진 채 역사에 남았다.

 

극한 좌우 갈등에 희생된 ‘통합파’ 여운형


여운형은 평생을 좌우 합작에 힘썼지만, 정국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여운형은 평생을 좌우 합작에 힘썼지만, 정국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1946년 12월 4일. 해방 이후 극한 갈등 속에서도 좌우 통합의 길을 찾아 헤맸던 여운형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지만 이념에 의해, 각 정파 지도자들의 권력욕에 의해, 국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였다. 이맘때쯤 여운형의 정치적 위상은 추락해 있었고, 좌우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신세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합작운동은 전 민족통일을 의도함이요, 좌당 합동은 혁명 역량을 단일화하려 함이다. 그러나 현상은 근본 의의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난국에 처해 역량 없고 과오 많은 내가 이 중임을 지려다가 일보도 전진 못 하고 넘어져 이를 그르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민중 앞에 사죄해 이 중책에서 물러남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혁명전선에서 이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서는 것이요, 나의 여생을 민주 진영의 한 병졸로서 건국 사업에 바칠 것을 맹세한다.
1946년 12월 5일자 <조선일보> ‘여몽양 정계은퇴…여생을 졸병으로’

정계 은퇴 후 여운형은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 은거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가 ‘병졸’로 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선 좌익들의 복귀 요구가 컸다. 김일성부터가 여운형의 정계 복귀를 지원했다. 김일성은 남로당이 포함하지 못한 좌익 세력을 여운형이 묶어내 혁명의 지지 세력으로 남겨두기를 바랐다. 또 박헌영과 대립해온 여운형이 미국과 손을 잡을 경우 좌익이 입을 타격도 걱정했다.

미국도 여운형을 불러냈다. 1947년 3월, 미군정은 인도에서 열리는 범아시아회의를 앞두고 여운형을 한국 대표로 위촉했다. 좌익 세력들의 만류로 인도에 가지 못한 탓에 이 일로 여운형은 미국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됐지만, 어쨌든 여운형은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를 앞두고 근로인민당을 창당하며 정계로 돌아왔다.

미소공위 재개는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던 ‘중도파’ 여운형과 김규식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미소공위의 목적 자체가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좌우와 남북을 오가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여운형과 김규식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터였다. 이승만조차 초대 수반은 김규식, 부수상은 여운형과 김두봉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을 정도였다.

미소공위가 성공적인 분위기로 흘러가자, 좌우 극단파들은 여운형의 입지 강화에 위기감을 느꼈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미소공위가 성공적인 분위기로 흘러가자, 좌우 극단파들은 여운형의 입지 강화에 위기감을 느꼈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그러나 이 사실은 극좌와 극우에 위치한 야망가들을 자극했다. 오랜 기간 ‘중도좌파’ 여운형과 대립해왔던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남한만의 단일정부 수립이나 임시정부 법통론에 의한 정부 수립을 추구해왔던 우익들도 위기감을 느꼈다. 이런 와중에 중도 세력이 미군정청과 경찰조직 내에서 친일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다. 심지어 미군정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John Reed Hodge)는 이승만에게 아래와 같은 경고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귀하의 정치기구의 상층부에서 나온 줄로 짐작되는 보도에 의하면, 귀하와 김구 씨는 공위 업무에 대한 항의 중단으로서 조속한 시기에 테러 행위와 조선 경제 교란을 책동한다 합니다. 고발자들은 이런 행동에는 몇 건의 정치암살도 포함하기로 되었다 함을 중복 설명합니다. 이러한 성질의 공연한 행동은 조선 독립에 막대한 방해를 끼칠 터이므로 이러한 고발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1947년 7월 2일자 <조선일보> ‘테러 계획 운운은 몰이해’

이에 이승만은 “경계자 김구 씨와 내가 테러급 암살계획에 간여하고 있다고 치의하는 6월 28일부 귀함은 귀하가 한인들과 지도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던 바를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한 것”이라는 답신을 보냈다. 하지가 어떤 이유로 이승만과 김구를 의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일은 여운형이 얼마나 신변에 위협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17일이 지난 1947년 7월 19일. 아침 일찍 재미조선사정협의회 회장인 김용중과 만나고 돌아오던 여운형의 스튜드베이커 승용차 앞에 경찰차 한 대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경찰차의 등장에 놀란 여운형의 차가 급히 속도를 줄이자, 한 사내가 뒤쪽 범퍼로 뛰어올랐다. 탕탕탕.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경호원이 공포를 쏘며 도망가는 사내를 뒤쫓았지만, 모퉁이에서 동대문경찰서 소속의 한 경찰관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여운형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뒤였다. 향년 61세. 대한민국의 대정객은 그렇게 불귀(不歸)의 객(客)이 됐다. 며칠 후 경찰은 범인으로 19세의 우익 청년 한지근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부실한 경찰의 수사로는 공범이나 배후 관계를 밝혀낼 수 없었다. 좌우 극단주의자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던 만큼 좌익 배후설과 우익 배후설이 모두 제기됐지만, 지금까지도 여운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반공주의-민족주의 충돌의 희생자 김구


우익의 대표 지도자들이었던 이승만과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이전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백범김구기념관
우익의 대표 지도자들이었던 이승만과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이전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백범김구기념관

여운형 사후 통일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이끈 사람은 김구였다. 사실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여운형의 반대파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민족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던 김구는 좌우를 아우르는 여운형의 노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승만과 함께 우익의 대표 지도자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협력과 견제를 반복했을지언정, 장덕수 암살사건이 있기 전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을 때조차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장덕수 암살사건을 기점으로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1947년 12월 2일, 한민당 정치장관 장덕수가 피살되자 경찰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다. 우파 정당들의 통합 운동 당시 김구와 장덕수가 반목했던 일이 있었고,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도 두 사람 사이에 고성이 오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암살 용의자들인 박광옥과 배희범이 자신들을 ‘김구의 추종자’라고 밝히고,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한 것’을 암살 동기 중 하나로 언급하면서 김구에 대한 의심은 커져갔다. 이에 김구는 자신이 법정의 증언대에 서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이승만에게 요청했지만, 결과적으로 김구는 미군정 재판에 소환당해 4시간 반이나 심문을 받는 등 ‘말할 수 없는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일을 계기로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론을 철회하고 남북협상론을 들고 나왔다. 이는 사실상 김구가 그동안 고수해왔던 임시정부 법통론을 포기하고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대단결 노선으로 선회했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정적(政敵)이 된다. 한때 호형호제(呼兄呼弟)했던 두 사람이 원수가 된 셈이다.

김구 씨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고 제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요지의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중략) 나의 유일한 염원은 천만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설하련다. 삼팔선을 메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1948년 2월 11일자 <경향신문> ‘염원은 통일독립, 군정의 연장은 절대반대’

5·10 단독선거가 임박한 4월 19일, 김구는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규식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 ⓒ백범김구기념관
5·10 단독선거가 임박한 4월 19일, 김구는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규식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 ⓒ백범김구기념관

이때부터 김구는 적극적으로 북한과의 협력에 나섰다. 5·10 단독선거가 임박한 4월 19일에는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규식과 함께 북행길에도 올랐다. 그러나 김구의 북한행은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김구가 임시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우익 노선을 걷는 동안 북한은 이미 체제를 공고화하고 있었고,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을 그저 이용하려 할 뿐이었다.

8·15 해방은 일찍이 김구가 개탄했듯이 한민족의 주체적 힘으로 달성한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연합국의 힘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므로 한반도 문제 해결은 한민족의 발언권에 의해서보다 연합국, 특히 미·소의 입김이 절대적으로 강하리라는 것은 2차대전 후의 극동정세를 어느 정도 통찰하는 정치인이라면 당시 누구나 간파할 수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에의 길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르는 길이 가장 확실하고, 만약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경우 통일의 가능성이 쉽지 않다는 정도는 간파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여 통일에의 여건을 크게 악화시켜 놓고, 즉 스스로 묘혈을 파놓고서 그 위에서 남북협상으로 통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자기모순의 길을 걸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송건호 <8·15의 민족사적 인식>

김구의 이 같은 ‘한발 늦은’ 행보는 반공이 종교화된 당시 상황에서 적잖은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었다. 철저한 반공주의를 채택한 대한민국에서 이념보다는 민족을 중시했던 ‘민족주의자’ 김구는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을 여지가 컸다. 실제로 <동아일보>는 김구와 김규식을 향해 “이제 임정의 수뇌부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자기의 정권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적도(敵都) 평양에서 공산파에 야유하고 소련에 국궁(鞠躬)하고 있는 것을 본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여운형이 세상을 떠난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사저(私邸)였던 경교장에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 안두희가 찾아왔다. 군복 차림이었던 안두희는 비서진에게 문안인사차 김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비서진은 아무런 의심 없이 안두희를 서재로 보내줬다. 이때 김구는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비서는 붓글씨를 쓰던 김구에게 포병장교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보고했다. 잠시 후 서재로 들어선 안두희는 권총을 꺼내 김구에게 발포했다. 총성을 들은 비서진이 서재로 달려가 보니 김구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 스러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김구의 나이 74세 때였다.

노련한 우익정치가인 김구 씨 암살에 관한 경찰당국의 최초의 발표에 의하면 김구 씨가 영도하는 야당에 속하는 3명의 국군이 26일 정오 김구 씨를 방문하였다 한다. 당시 경비 중인 경관도 단지 좌익 측으로부터의 암살 기도를 두려워하였으며 국군은 의심도 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3명 중의 한 사람인 안 모라는 소위는 김구 씨와 사담을 하기 위하여 2층으로 올라갔었다. 그러자 약 5분 후 4발의 권총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나머지 2명은 2층으로 뛰어올라갔으나 그때는 이미 손에 권총을 쥔 채로 탄에 쓰러진 노정치지도자 옆에 서있었다. (후략)
1949년 6월 29일자 <조선일보> ‘김구 씨 저격사건 AP통신 보도’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 달 후 15년형으로 감형됐다. 심지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잔형이 집행정지되고 장교로 복귀했으며, 1951년 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전역했다가 1953년 완전 복권됐다. 암살범에 대한 이 같은 처우를 보며 사람들은 안두희의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보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고, 김구 암살 사건은 시간 속에 묻히게 된다.

 

‘3선 개헌’ 반대로 ‘초산테러’ 당한 YS


박정희의 3선 개헌 의지가 노골화되자, 김영삼은 앞장서서 저지 투쟁에 나섰다. ⓒ김영삼민주센터
박정희의 3선 개헌 의지가 노골화되자, 김영삼은 앞장서서 저지 투쟁에 나섰다. ⓒ김영삼민주센터

박정희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후반기로 접어들던 1968년 12월 17일. 민주공화당 의장서리였던 윤치영이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서 윤치영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이 같은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조항을 포함한 현행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9년 1월 6일에는 공화당 사무총장 길재호가 “헌법 개정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흘 뒤인 1월 9일에는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백남억이 당무회의에서 3선 개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1월 10일. 마침내 박정희가 직접 입을 열고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내 임기 중에는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라면서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꼭 있다 해도 연초부터 왈가왈부 하는 것은 좋지 못하며,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특유의 아리송한 화법이었지만, 이때부터 야당 인사들과 언론인들은 박정희가 3선 개헌에 나설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화당 내 개헌 반대파가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4·8 항명’이 일어나자 주동자들을 찾아내라고 중앙정보부에 지시했다. 결국 4월 15일, 김달수·박종태·양순직·예춘호·정태성 등 국회의원 5명과 당원 93명이 공화당에서 제명됐다.

이처럼 박정희의 3선 개헌 의지가 노골화되자 신민당 원내총무이자 대변인이었던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나섰다. YS는 제70회 제2차 국회본회의에서 “3선 개헌 음모는 제2의 쿠데타다, 5·16 쿠데타에 이은 제2의 쿠데타다, 이렇게 단언한다”며 “만에 하나도 이런 일은 없겠지만, 설사 3선 개헌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나라는, 이 정권은 망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 비판했다.

또 “중앙정보부는 우리 국민의 원부(怨府)요, 증오의 대상”이라면서 “위로는 장관으로부터 밑의 말단 면서기에 이르기까지 공무원들은 물론 우리 국민들 전부가 중앙정보부 때문에 못살겠다고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박정희 정권을 ‘쿠데타 정권’으로 규정하며 정통성을 부정했음은 물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를 ‘원한의 대상’으로 치부하는 발언이었다.

3선 개헌을 반대하던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 앞에서 괴한들로부터 ‘초산 테러’를 당했다. ⓒ김영삼 자서전
3선 개헌을 반대하던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 앞에서 괴한들로부터 ‘초산 테러’를 당했다. ⓒ김영삼 자서전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6월 20일 밤.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YS를 향해 괴한들이 초산이 든 유리병을 던지는 ‘테러’를 가한 것이다. 이 초산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차체의 철판이 녹아내리고 콘크리트 바닥에는 구멍이 패여 부글부글 끓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저 박정희 정권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1969년 6월 21일자 〈경향신문〉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20일 하오 10시 5분, 서울 상도동 7의6 앞 골목에서 국회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41)이 서울 자2-2347호 크라운(운전사 김영수·36)을 타고 집으로 가다 괴한 1명으로부터 초산병(길이 13cm)으로 피습을 받았으나 인명피해는 없었고 차의 뒷문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졌다. 이날 밤 김 의원이 탄 차가 피습지점에 이르렀을 때 후리후리한 키에 흑색작업복을 입은 청년 3명이 길 가운데서 옥신각신하다 차를 세우고 그 중 1명이 차 뒤로 돌아와 김 의원이 타고 있는 차 뒷문을 열려고 했다. 문을 안에서 잠근 김 의원은 이상한 예감으로 차를 급히 몰라고 운전사에 지시, 1m50cm가량 달려갔을 때 이 청년이 주머니에서 꺼내 던진 초산병이 차 오른쪽 뒷문과 뒤창 사이의 철판에 맞으며 병이 박살났다.
1969년 6월 21일자 <경향신문> ‘김영삼 의원 차에 초산 뿌려’

생명에 위협을 받은 아찔한 사건이었지만, YS는 위축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21일, YS는 국회 본회의 신상발언을 통해 “(초산 테러는) 중앙정보부에서 했다. 김영삼이를 죽이기 위해 중앙정보부에서 음모한 것”이라며 “이게 민주주의 국가인가. 독재자가 통치하는 독재국가다. 박정희는 독재자”라며 더 강하게 박정희 정권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서슬 시퍼런 독재정권 하에서 야당 지도자에 대한 테러의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3선 개헌은 통과됐고, 대한민국은 더더욱 깊은 독재의 수렁에 빠져든다.

 

해외에서 반유신 투쟁 벌이다 납치된 DJ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김대중평화센터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김대중평화센터

하지만 3선 개헌으로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여망(輿望)을 꺾을 수 없었다. 1972년, 세 번째 대선에 도전한 박정희의 상대는 DJ(김대중 전 대통령)였다. 1970년 치러진 신민당 대선 경선에서 YS에게 극적인 승리를 거둔 DJ는 일약 박정희를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비록 관권(官權)의 조직적 개입에 밀려 95만여 표 차이로 석패했지만,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한 결과였다.

1971년 대선에서 DJ에게 패할 뻔했던 박정희는 1년 후인 1972년 유신(維新)을 단행한다. 아예 국민들에게서 투표권을 빼앗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자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DJ는 해외 망명을 결정,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기자회견과 연설을 통한 반유신 투쟁에 나섰다. 이 같은 DJ의 행보는 가뜩이나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렸다.

해외에서 반유신 투쟁을 하던 김대중은 일본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해 생명을 위협받았다. ⓒ김대중평화센터
해외에서 반유신 투쟁을 하던 김대중은 일본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해 생명을 위협받았다. ⓒ김대중평화센터

1973년 8월 8일. 여느 때와 같이 도쿄 힐튼호텔 방을 나선 DJ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로 가 민주통일당 양일동 총재를 만났다.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민주통일당 김경인 의원이 합류했다. 셋은 함께 점심을 먹었고, DJ는 오후 1시쯤 자민당 기무라 토시오(木村俊夫) 의원을 만나기 위해 김경인과 호텔 방을 나섰다.

그때 어디선가 건장한 사내 대여섯 명이 뛰쳐나와 DJ와 김경인을 각각 다른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DJ를 승용차로 끌고 가 뒷좌석에 태운 뒤 어딘가로 향했다. 호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서 김강수가 약속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DJ를 찾아 객실로 올라갔지만, 텅 빈 방에는 약품 냄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DJ를 태운 차는 한참을 달려 어느 빌딩 주차장에 섰다. 사내들은 DJ를 방으로 데려가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힌 다음 끈으로 몸을 묶고 강력 테이프로 완전히 고정시켰다. 그렇게 두 손과 두 다리를 모두 묶인 DJ는 다시 차로 옮겨져 30여분을 달렸다. 도착한 곳은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해안이었다. DJ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매일 기도를 올렸고, 납치되어 이동 중에도 하느님을 찾았다. 그런데 이 마지막 순간에는 기도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바다 속에서 맞이할 최후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중략) 그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살려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 주십시오.” 나는 세례를 받은 후 처음으로 예수님께 살려 달라, 구해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자 순간 눈에 붉은 빛이 번쩍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엔진 소리가 폭음처럼 요란하더니 배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내달렸다.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DJ의 기도에 누군가가 응답한 것일까. 배 위에서 비행기가 한 대 나타났다. 이 비행기의 정체는 알 수 없다. DJ는 CIA가 개입해 자신을 살린 것이라고 주장했고,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공작원들이 차마 DJ를 죽일 수 없어서 실행하지 못한 것일 뿐 미군 비행기는 없었다고 분석했다. 어쨌든 이 일이 있은 후 DJ는 납치 엿새째인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집 근처 골목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DJ가 돌아온 지 10분 쯤 지나자 기자들이 거실로 몰려들었다. 기자회견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범인을 찾으려는 노력도 계속됐다. DJ가 귀환한 지 20여 일이 흐른 9월 5일. 일본 수사본부는 ‘범행 현장에서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지문이 나왔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고 밝히고 김동운의 출두를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 대사관은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이 일로 일본 정부는 가을로 예정됐던 한일 각료회의를 무기한 연장했지만, 두 달 후 박정희가 JP를 통해 나타카 총리에게 유감을 표하면서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됐다. 이 사건은 2007년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조사 결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 지시로 중앙정보부 요원이 납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 후에야, DJ가 ‘승자’가 되고서야 드러난 진실에는 힘이 없었고 책임질 사람도 없었다.

 

새로운 선거문화 만들려면 ‘선거적폐’ 청산해야


김대업 사건으로 이회창은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지만, 피해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연합뉴스
김대업 사건으로 이회창은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지만, 피해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연합뉴스

정치는 죽고 죽이는 싸움의 문명화된 형태라고들 한다. 그래서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정치 테러’라는 단어에 익숙지 않다. ‘대통령’ YS와 DJ도 잊혀가는 시대에, 1969년 YS가 당한 초산 테러와 1973년 DJ의 납치 사건은 ‘옛날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정치가 물리적 다툼의 고도화된 결과라면, 과거의 흔적은 남았을 터다. 그런 의미에서 네거티브는 정치 테러의 ‘현대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네거티브는 칼 대신 글과 혀로 경쟁자를 다치게 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정치 테러가 남긴 나쁜 교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듯하다.

1997년과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이회창 전 국무총리는 두 아들의 병역 면제가 ‘비리’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에 휩싸였다. ‘대쪽’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이회창은 이 논란으로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다. 두 차례 대선에서 모두 패한 원인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대선이 끝난 후 이회창의 두 아들이 불법적으로 병역을 면탈했다는 의혹은 완전히 해소됐고, 사건의 핵심 증인이었던 김대업은 명예훼손과 무고 등의 혐의가 모두 인정돼 구속 수감됐지만 이회창에게 남은 건 패배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수십 년 전 정치 테러의 결말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선거 때만 되면 나오는 ‘아니면 말고’ 식 네거티브를 없애려면 끝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배후를 찾아내는 풍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연합뉴스
선거 때만 되면 나오는 ‘아니면 말고’ 식 네거티브를 없애려면 끝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배후를 찾아내는 풍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연합뉴스

이번 대선도 마찬가지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정도의 온갖 네거티브가 오가고 고소·고발도 이어지고 있지만, 대선이 끝나면 승자는 권력의 힘으로, 패자는 승자가 베푼 ‘아량’으로 진실과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봤듯, ‘아니면 말고’ 식 네거티브는 끝맺음이 확실치 않았던 과거의 나쁜 교훈이 남긴 흔적일 수도 있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지금의 극심한 진영갈등은 지역주의나 이념갈등 못지않게 네거티브 선거도 큰 원인”이라며 “진실 여부를 알 수 없는 네거티브전이 진영갈등을 극대화시키는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선거전에서 네거티브가 격화되는 건 지난 한국 정치사에서 테러의 배후가 밝혀지지 않고 일단 승자가 되고 나면 모든 걸 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새로운 선거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 있었던 정치 테러의 배후를 밝혀내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그는 “비단 정치 테러뿐만 아니라 김대업 사건과 같이 선거 승패를 뒤바꾼 네거티브의 진실을 파헤치고 배후를 밝혀내 끝까지 책임을 묻는 문화가 정착돼야 ‘일단 뱉고 보자’는 식의 네거티브가 사라질 것”이라면서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진영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선거의 적폐청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정 평론가의 이 말처럼, 어쩌면 끝끝내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풍토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네거티브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아닐까.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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