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경제난국 극복한 지도자 …당선자가 복습해야 할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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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신문 보기] 경제난국 극복한 지도자 …당선자가 복습해야 할 과제
  • 곽수연 기자
  • 승인 2022.03.09 09: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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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병자였던 영국…다시 떠오르는 대영제국으로 활력 불어넣은 마거릿 대처
구두닦이 출신 경제학자 에르네스토 세디요…"95년 -9.2% 경제성장률→97년 8.8%"
부존자원 없어서 물도 사야 했던 싱가포르를 항공, 금융중심지로 탈바꿈시킨 리콴유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곽수연 기자)

대선후보 이재명과 윤석열 ⓒ연합뉴스
대선후보 이재명과 윤석열 ⓒ연합뉴스

지난달 20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정부가 2년간 100조 원이상의 통합재정수지 적자를 냈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코로나19 사태 첫 해인 2020년 71조 2000억 원의 적자, 지난해에는 30조 원의 적자를 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적자의 결과로 중앙정부의 국가채무는 240조 원이 불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6년 말이 되면 한국의 일반정부 국가채무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66.7%로 올라갈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에 국회에서 논의되는 추가경정예산 규모만 고려해도 올해 70조 원 상당의 재정적자, 100조 원이상의 국가채무가 증가할 것으로 예고됐다. 때문에 국회 예산정책처는 지난 1월 기준 국민 1인당 국가채무는 1861만 원이고 올해 2000만 원 돌파가 확실시된다고 말했다. 채무증가 속도도 매우 빨라서 재정건전성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경고음도 울렸다. 한국 국가채무비율 증가속도는 35개 선진국 중 1위에 달한다고 IMF는 전했다.

암울한 전망으로 위기에 선 한국 경제. 3월 대선을 통해 집권하게 되는 차기 대통령은 큰 부담을 안고 시작해야 한다. 20대 당선 대통령이 경제난관을 해결하는데 혜안을 제공하고자, 난국을 극복한 해외 지도자들의 사례를 정리해봤다.

 

유럽의 병자였던 영국…다시 떠오르는 대영제국으로 활력 불어넣은 마거릿 대처


1970년대 영국은 엄청난 복지비용 부담으로 나라가 내리막길을 걸었고, 희망 없는 국가로 불리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영국을 '희망 없는 국가'라고 혹평했다. 당시의 영국 국민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보살펴주는 보호막 아래에 있었고, 국가전체가 무기력에 빠졌다. 일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었다. 

반면 국가는 복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비합리적인 세금을 부과했다. 예컨대 개인과 기업이 100원을 벌면 최고 83원까지 세금을 내야 할 정도였다. 과도한 세금 부담으로 인해 근로의욕은 상실됐다. 따라서 생산성 저하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기업들은 도산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는 올랐고, 국가의 재정부담은 천정부지로 늘어갔다.

그러나 노조는 클로즈드숍이란 제도에 힘입어 막강해졌고, 툭하면 파업을 했다. 클로즈드 숍이란 조합가입이 고용의 전제조건이 되는 제도다. 다른 말로 노동자가 조합을 탈퇴하거나 제명되면, 사용자는 그 노동자를 해고시켜야 한다. 노조는 '국가 속의 국가'로 묘사될 정도로 강했다. 1979년 영국의 연간 파업 횟수는 2800회에 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탄광노조는 1974년 히스 정권을 몰락시킨 최강 노조였다. 영국은 파업으로 날이 새고 저무는 나라로 낙인이 찍혔고, 1980년대 초 유럽의 병자로 불리었다.

파업으로 병든 영국을 경쟁자로 여기는 유럽 국가들은 없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은 재정이 파탄 나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기 시작했고, 강력한 리더자를 갈망했다. 파업이란 영국병을 반드시 고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마가릿 대처는 1979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며 집권했다. 그는 말보다 행동을 먼저 보여주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개인과 기업에 대한 중과세를 축소했다. 세율은 최저 30%, 최고 60%로 완화했다. 복지의 몫도 과감히 줄여나갔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해 자율경쟁을 유도했다. 공직사회도 개혁했다. 

또한, 대처 총리는 클로즈드숍을 폐지했고, 1983년 적자를 기록했던 석탄 채굴회사의 문을 닫아버렸다. 아울러 그는 노조의 비밀투표를 보장했고, 만성적인 파업 척결에 나섰다. 그 결과 1979년 2800회에 달하던 연간 파업 횟수는 90년대 중반에 들어서 200회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의 노력에 사회 전체에 활력이 돌았고, 지는 대영제국을 다시 떠오르게 만든 원동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영국 국민들은 1983년과 1987년 두 차례 총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보내, 대처 총리는 윈스턴 처칠에 이어 3 연속 집권이라는 영예를 차지했다.

 

대처 총리는 집권하자마자 지나친 평등과 복지, 노조의 파업 만능주의가 영국병을 낳은 근원이라고 규정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대처 총리는 집권하자마자 지나친 평등과 복지, 노조의 파업 만능주의가 영국병을 낳은 근원이라고 규정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대처리즘으로 표현되는 대처의 정치이념은 철저한 개인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옹호, 능력본위의 경쟁, 엄격한 도덕과 질서의 강조로 요약된다. 70년대 말 영국은 두 자릿수의 인플레와 낮은 경제성장률, 잇따른 노조 파업 등으로 노동당 정부의 무능을 드러냈다.

대처 총리는 집권하자마자 지나친 평등과 복지, 노조의 파업 만능주의가 영국병을 낳은 근원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정책과 제도를 전면 개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대처의 경제정책은 △만성적인 노동쟁의 척결 △작은 정부에 의한 긴축재정 △복지지출 대폭 삭감 △국영기업의 과감한 사유화 △개인과 기업의 세금 감면을 위한 세재개혁 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노조와의 필연적인 충돌을 가져왔으나, 대처는 80년에서 84년까지 4차례에 걸쳐 고용법을 개정하고, 부당한 파업에 따른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노조에 배상책임을 묻는 등 강경책으로 맞서 노조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한겨레> 1990.11.23

 

사라진 영국 노조들의 목소리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사라진 영국 노조들의 목소리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 대단하던 영국 노동조합들은 다 어디 갔나. 이번 영국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대승을 거뒀지만, 노동당의 대주주인 노동조합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영국 언론들은 영국 노조의 이 같은 침묵에 대해 현실적으로 목소리를 낼만한 세력도 못되고 또 영국병의 근원이란 원망을 들어온 노조로서는 과거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줘야 할 필요성도 있어 당분간 노동당에 지분을 요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20년 동안 영국의 변화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노조의 급격한 세력 약화다. 1979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 총리 집권 이후 타기업 조합원들이 동조시위를 벌이는 2차적 피켓팅이 불법화됐고, 노조의 불법 파업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 노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쉬워졌다. 그 결과 노조원 수는 1979년 1300만 명에서 현재는 800만 명으로 3분의 1 이상 줄어들었다." <조선일보> 1997년 5월 5일

 

구두닦이 출신 경제학자 에르네스토 세디요…"95년 -9.2% 경제성장률→97년 8.8%"


1994년 3월 당시 멕시코 여당인 제도혁명당(PRI)의 대통령 후보인 루이스 콜로시오가 유세중 암살됐다. 대신 그의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에르네스토 세디요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세디요는 유세에서 노동계급 출신임을 부각시켜 빈민층의 지지를 얻었다. 전기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구두닦이로 학비를 벌며 미국 예일대학교 경제학 박사를 딴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세디요는 구두닦이 출신으로 국민들의 어려움을 모르겠냐며 유권자를 설득했다.

그 결과 그는 8월 대선에서 승리했고, 12월 1일 취임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가 멕시코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멕시코 정치·사회 곳곳에 불안적 요인이 존재하는데, 선출직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경제관료 출신이 어떻게 잘 운영해낼 수 있냐는 의심이다.

세디요 대통령 취임 후 20일만에 위기가 다가왔다. 바로 멕시코 통화인 페소화의 폭락이다. 그는 페소화의 폭락을 막기 위해 환율 변동폭을 15.3%로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일주일 사이 페소화는 64.7%나 평가절하됐다. 주식시세도 44%나 폭락했다. 2만5000개의 기업들이 도산 또는 위기에 몰리면서 한해 동안 100만 명가량의 실업자가 생겼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대와 반군들이 실업자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세디요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272억 달러를 차관하며 급한 불을 껐다. 이후 자유주의적 개방경제의 기조를 유지하며 멕시코 경제의 조타수 역할을 했다.

아울러 정치개혁도 과감하게 단행했다. 집권여당의 일당독재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인지하고 있던 세디요 대통령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일당경제는 함께 가지 못한다"는 신념 아래 일당독재를 정리해 나갔다. 또한, 그는 야당 의원을 검찰총장에 기용했고, 사법부를 독립시키고, 선거관리위원회를 중립화했다. 독립적인 권한을 부여받은 검찰팀은 전임 대통령의 형인 라울 카를로스를 부패와 살인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기존정치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은 세디요 대통령에게 갈채를 보냈다. 

경제위기 극복 관련해, 세디요 대통령은 야당, 시민단체, 그리고 국민들에게 동참해달라고 목소리 높였다. 최악의 경제위기로 불리던 1995년 10월 25일, △기업 △근로자 △정부 △중앙은행 대표 등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경제회생을 위한 연대선언'에 서명토록했다. 선언문을 통해 근로자와 시민은 경제회복의 고통분담을 감수하고, 기업과 정부는 상황이 호전대로 고용증가와 실질임금 인상, 가격안정을 이룰 것을 약속했다.

기업, 근로자, 정부, 중앙은행의 연대노력에 힘입어 경제는 호전되기 시작했다. '경제회생을 위한 연대선언' 이후 수출이 늘어나고, 물가가 잡히면서 95년 2분기 -9.2%였던 경제성장률은, -7.0%(95년4분기) -0.4%(91년 1분기)로 회복세를 보였다. 96년 2분기부터는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 6.4%의 성장률을 보이며 상승세를 타더니 97년 2분기 8.8%라는 최고 성장률을 기록했다.

 

멕시코 세디요 대통령 인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멕시코 세디요 대통령 인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고 있는 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멕시코의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이 인기다.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고있는 역내 지도자들에게 비슷한 위기를 극복한 그의 지도력은 탐구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는 요즘 도움을 구하려는 아시아 지도자들에게 '단호하게 행동하고, 헛되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전임자 살라나스가 남긴 경제 빈사상태를 물려받은 세디요는 국제통화기구(IMF)에 지원을 요청하고 단·중·장기 경제계획을 발표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다. 정부의 예산절감, 정부기관 고용동결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대외 신인도를 회복하기 위해 매주 경제지표를 발표했다. 국민들은 물가상승률보다 낮은 임금인상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2년후 95년 마이너스 6.2%까지 떨어졌던 성장률은 플러스 5.1%로 돌아섰고, 연간 52.0%였던 물가상승률은 8.3%로 떨어졌다. 국민들의 자신감도 회복했다.

세디요는 24일 정상회담에서 94년말~95년 멕시코 상황을 공포라고 고백했다. 그는 그러면서 '경제현장에 직접 파고들어라. 정부가 노력하면 국민들도 따라온다. 그러면 문제는 수개월 내 풀린다"고 말했다. 최저의 인기도에서 멕시코 최고 인기 대통령이 된 세디요가 아시아국 지도자들에게 준 충고의 핵심이다. 

<경향신문> 1997.11.25

 

부존자원 없어서 물도 사야 했던 싱가포르를 항공, 금융중심지로 탈바꿈시킨 리콴유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인들은 2년 전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 합병됐다가 분리 독립됐다. 당시 싱가포르는 부존자원이 없는 협소한 도시국가로, 물조차 말레이시아에서 사 와야 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400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한 초대 총리로 취임해 1990년 퇴직할 때까지 26년간 총리로 재직하면서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작지만 강하고, 잘 사는 나라로 탈바꿈시켰다. 

집권 후 그는 재정안정화, 서민주택보급, 공직비리 조사국 설치, 해외투자 유치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싱가포르 항만공사를 설립해 세계 일류 수준의 컨테이너 항구와 창이 국제공항을 건설했다. 이러한 투자로 싱가포르를 물류 중심지, 항공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아울러 세계 유명 금융기관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금융중심지로 일으켰다.

그 결과, 리콴유 총리가 퇴직하던 1990년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 2750달러를 달성했다. 이후 계속 상승하며 2014년 싱가포르 1인당 GDP는 5만 6113달러로 세계 8위, 아시아 1위를 기록했다. 더불어 세계경제포럼(WEF) 조사 국가경쟁력은 세계 2위, 국제투명성기구 조사 국가청렴도는 세계 5위를 달성했다. 이같이 싱가포르가 발전·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리콴유가 있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때문에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아버지, 국부(國父)라고도 불린다.

 

싱가포르 경제 기적 불러일으킨 리콴유 전 총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싱가포르 경제 기적 불러일으킨 리콴유 전 총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리관유 전 싱가포르 수상이 지난 23일 폐막된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자문단 회의 마지막 날 자유토론에서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는 일본식 경제발전 모델을 추구해온 한국은 이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리콴유 전 총리는 "한국과 대만이 일본 모델을 따라 경제발전을 했기 대문에 위기를 대응하지 못했다"며 "대만은 그나마 중소기업이 튼튼하고, 벤처기업들이 많아 외환위기를 모면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한국처럼 중소기업이 재벌 통제 아래 있으면 위험하다"며 "급속하게 이뤄지는 기술, 정보혁명을 따라갈 수 없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규제개혁, 기업 지배구조, 정보투명성 확보 등을 지적하고, 무엇보다 가격에 대한 정부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노조에도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리콴유 전 총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경한 노조는 한국에 있는 것 같다"며 "파업보다 위기 극복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1999.10.25

 

경제난국을 극복한 리더들의 명언


"단호하게 행동하고, 헛되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경제현장에 직접 파고들어라, 정부가 노력하면, 국민들도 따라온다. 그러면 문제는 수개월 내 해결된다"

<에르네스토 세디요>
 

"진짜 중요한 일은 타협하지 않는다"
"총리는 외로운 직업이며 어떤 점에서 그래야만 한다. 군중 속에서 나라를 이끌 수는 없다"
"선과 악이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정치에 몸을 담고 있다. 종국적으로 선이 승리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마거릿 대처>

"지도자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적이지 않은 비전은 자칫 우리 모두를 파괴할 수 있다."
“부패방지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생존의 문제이다. 반부패정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굴복시켜야 한다.”

<리콴유>

 

담당업무 : 경제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정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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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희 2022-03-09 13:16:24
우리나라가 배워야할 문제들이네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