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㉝] 나의 이야기②-지리산과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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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스케치㉝] 나의 이야기②-지리산과 나그네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3.27 21: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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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이라 불린 아버지
외도로 가정불화 심했다
상처, 아버지와 화해 못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내면의 상처 없는 인생이 있을까. 누구나 삶에서 예상치 못한 트라우마를 떠안게 될 수 있고, 때때로 그 기억이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완화되어 점차 회복되기도 해, 큰 아픔을 겪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내적 성숙이 이뤄진다.

영국에서 공감 능력과 트라우마의 연관관계에 대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유년 시절 트라우마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높은 공감 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 부모의 이혼이나 폭력 등을 겪은 트라우마에 대한 경험이 있는지를 조사했을 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트라우마의 강도가 높을수록 공감 능력이 높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외도와 폭력의 상처

다만 트라우머의 기억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런 트라우마 기억을 덮어두려는 습성이 있지만 이 같은 습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을 수면 밖으로 꺼내 직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분명 그 감정의 강도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한 고백이 줄을 이었다. 행복한 가정환경이 아니었다고 토로한 배우 한가인, 자우림의 가수 김윤아 등은 연예인이기에 더욱 털어놓기 어려웠을 어두운 과거를 용기 있게 고백했다. 또 배우 이경진은 아버지가 가출을 해 비혼주의자가 되었다며 가정사를 털어놓았다.

그들 아버지의 외도와 알코올 문제, 폭력의 가슴 아픈 지난 상처를 담담히 꺼내 그간 얼마나 많은 고통을 혼자 삭이고 삼켰을지 애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족함 없이 자랐을 것 같은 유명인들의 성장기 상처를 접하며 충분히 공감되었고 동병상련을 느꼈다.

지리산 노고단 입구. ⓒ정명화 자유기고가
지리산 노고단 입구. ⓒ정명화 자유기고가

영원한 방랑자 아버지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것…. 무한 책임이 요구된다. 사랑해서 아니면 남들이 하니까 한 결혼은 때로 이런 비극을 낳기도 해 가정불화가 잦은 경우 가족 전체가 고통의 한가운데 놓인다.

이젠 주인공 모두 세상을 떠나 역사의 뒤안길로 묻힌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지만, 한때 저변에 깔린 내 정서의 어두운 실체 중 한 축이 아버지의 외도였다. 과거 가부장적 시대엔 흔한 일로 치부되었고 드라마의 주 테마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 보니 아버지 엄마 간 부부싸움이 잦았다. 거기다 할머니까지 삼자 간 삼각관계가 더해지면서, 우리 형제들에겐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한번은 초등학교 시절, 며칠째 외박한 아버지를 찾아 나서자는 엄마를 따라 늦은 시간에 집밖으로 나간 적이 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어디로 가서 찾는단 말인지. 지리산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면 너른 백사장에 바늘 찾는 꼴이라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지리산 골짜기로 숨어들면 빨치산도 잡기 어려운데 눈에 쉽게 띄었겠는가. 나는 그냥 아버지가 들어오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엄마는 속이 타고 그게 안 되었던 것 같다.

이에 맏이긴 하지만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큰일이 많았고 어느 누구 편들기도 어려웠다. 내가 나선다고 부모님간의 갈등이 해결되지도 않아 모두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은 모두 내버려 두고 멀리 달아나는 수밖에, 그게 나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동 송림에서 활 쏘는 아버지. 날 25세에 봤으니 30대 초중반 시절. ⓒ정명화 자유기고가
하동 송림에서 활 쏘는 아버지. 날 25세에 봤으니 30대 초중반 시절. ⓒ정명화 자유기고가

호인과 한량

아버지와 좋은 시절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아버지 담배 심부름도 하며 잘 따라 다녔다. 내 친구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굉장히 젊고 멋졌다는 것이다. 인물은 어디다 내놓아도 호감을 주며 안 빠지는 배우 뺨치는 마스크였다. 날 자랑스러워했고 가까이 잘 지내길 바랐지만 난 용납이 안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별 사건사고 없이 무난하게 자랐다. 그러나 외도 등으로 엄마와 불화를 일으키는 집안의 뜨거운 감자였던 아버지가 제일 문제라고 인식했다. 못마땅하게 여긴 나는 왜 자식이 아닌 부모가 자식 속썩이냐고 악악거리며 성질을 있는 대로 내곤 했다.

점점 성장해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 때 집에 가면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엄마는 각자의 공간에서 날 불러댔다. 그동안 쌓인 일들을 얘기하며 불만을 털어놓곤 하는데 나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난들 어쩌라고 하는 볼멘소리를 하다 결국은 성질내며 그 현장을 떠나버린.

사람들이 아버지를 평할 때 두 단어로 압축된다. 호인과 한량. 사람 좋기로 정평이 났고 근본적으로 선한테 역마살이 있었는지 그게 문제였다. 아버지가 우리 몸에 손끝하나 대기는커녕 큰소리로 호통을 치거나 아버지로부터 야단맞은 기억은 거의 없다. 사춘기가 되면서 도리어 내가 아버지를 비난하며 점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자식들에 대한 애정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아버지의 무책임하고 밖으로 나도는 모습에 나는 점점 아버지를 외면했고 멀어졌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엄밀한 의미에서 화해를 못했다. 왜 그렇게밖에 못살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원망이 진했다. 점술인은 아버지를 한마디로 한량이라고 했다. 운명이 란게 있는지….

아버지는 왜

자녀양육이란 이거다 하는 왕도가 있을까 만은, 너무 귀하게 키우기보단 적당히 고생도 시키고 강하게 키워야 긴 인생길에 자립심과 강단도 생긴다. 과연 나의 할머니는 어떠셨을까. 딸만 내리 낳다 뒤늦게 얻은 두 아들이니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을지 미루어 짐작된다. 그저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노심초사하며 키운 게 원인이었을까.

나이가 들어 아버지를 이해해볼라치면, 집안의 기둥이었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장님인 큰아버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집안에 남은 막 고교를 졸업한 아버지가 장남처럼 뭔가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할머니께서 홀로 직원과 일꾼 아저씨들이랑 꾸려가던 가업에 아버지가 대학에 적만 두고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아버지, 어린 나 역시도 답답하다며 일찍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나갔는데, 젊은 나이에 고향에 짱박혀 살아야했던 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기도 하며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 그리곤 집안 살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할머니의 주선으로 23세 젊은 나이에 동갑인 엄마와 결혼했다. 25세에 내가 태어나 아버지라는 멍에까지 지게 되었다.

실상 아버지가 삼 형제 중에선 제일 현실감이 없다. 그런 아버지가 집안의 가업을 이어받은 것이니, 야금야금 할아버지께서 남긴 재산을 팔아 잡수며 가계를 꾸려 나가 여러 가지 무리수가 많았다. 물론 검소하고 알뜰하기로 유명한 할머니가 계시고 하니 그리 마냥 허투루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 후 깐깐하고 나름 경제 감각이 있던 엄마의 견제와 잔소리로 충돌이 많았음은 안 봐도 알 수 있다.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엄마 간 수많은 갈등의 지점이다.

결혼은 필수 아닌 선택

한편, 지난해 혼인건수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MZ세대가 자발적·비자발적으로 비혼(非婚)을 선택하는 지표들이 나타나고 있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 변화와 더불어 현실적 제약들이 이유로 꼽힌다.

23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 건수는 19만 3000건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최근 10년 동안 연속 감소세를 보였고 전년도 대비 9.8% 줄었다.

MZ세대가 비혼을 선택하는 이유는 가정을 책임지는 것보다 개인의 발전과 행복을 더 추구하는 경향 때문이라는 목소리들이 있다. 주변의 비혼 주의자들은 '삶이 버거워 결혼을 외면하는 사람과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고 한다.

또한 '결혼해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더 많이 보면서 결혼이라는 형식이 굳이 내 인생에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 인생 나 하나 잘 살아가고 싶다'라는 젊은 세대의 추세에 따른 결과다. 이와 더불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부양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만약 결혼해 아이를 낳고 제대로 부양할 수 없다면 아이도 나도 불행해진다. 돈 없이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는 인식도 팽배해서 나온 것이다.

비혼주의자였던 나

현대 시대적 흐름과 달리 우리 시대 필수였던 인륜지대사 결혼, 가정환경 때문에 자연 나 역시 한때 비혼 주의자였던 적이 있다. 대학 졸업이 다가오자 그 당시는 결혼 적령기로 간주되었다. 지금이야 여성들은 자기 계발과 개성으로 결혼은 이제 필수가 아니라 선택인 시대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때 명동성당 뒤 수녀원 담벼락을 기웃거리며 수녀가 되면 어떤 삶이 펼쳐질까 하며 상상해보고 공부나 계속할까 꿈꾸기도 하면서 나의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결혼은 나의 길이나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방황이 계속되자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결혼이란 굴레로 들어가며 또 다른 삶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었지만.

아버지가 던진 화두 '행복이란'

그 시절 나만의 고통이려니 마음속 깊이 간직한 상처는 성장해보니 주변에 꽤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둔 친구는 결국 비혼주의자로 역시 독신인 언니와 함께 살며 늙어간다.

이에 반해 끝없는 반목의 시간을 가졌지만 엄마의 임종을 유일하게 지킨 사람은 아버지였다. 엄마가 투병하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 정도 꼬박 병석을 지킨 아버지, 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용서를 비는 마음에서 병간호를 했다'고 나에게 한마디 건넸다. 그랬다면 마지막 가는 길에 두 분은 화해를 한 셈이다. 2년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면서 영욕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이제 묻었다. 음주와 음식을 즐긴 아버지, 이젠 스스럼없이 대접할 수 있으련만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아쉽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대학교 입학 후 아버지는 왜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글쎄 그때까지 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고 했더니 '행복하기 위해서 아이가' 하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행복했을까. 위암을 앓으면서도 줄담배를 놓지 않았던 아버지는 한 잔의 술잔에서 행복했을까 궁금하다. 역마살 가득 음주가무를 즐겼던 나그네의 삶이 진정 편했을까. 진정 하늘나라에서라도 행복하시길….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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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옥 2022-03-28 16:21:41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