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㉞] 나의 이야기③-엄마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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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스케치㉞] 나의 이야기③-엄마라는 이름으로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4.03 1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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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엄마 나 여인 3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세상 인연에서 부모 자식 간은 혈육으로 맺어진 불가분의 관계로, 사람은 태어나 가장 먼저 엄마와 관계를 맺는다. 모태에서 열 달을 지내다 나온 핏덩이는 생명의 전부를 전적으로 엄마한테 의존한다. 그만큼 태어나 초기 성장기까지 엄마는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그중 동성인 엄마와 딸의 관계는 더욱 특별하고, 딸은 주로 아들보다 더 엄마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맏이로 태어나

나는 경남 산청, 외가에서 태어났다. 유난한 난산으로 오랜 진통 끝에 첫째인 내가 태어나 엄마의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이에 외할머니는 '여식이 태어나면서…'라며 산고의 고통을 치른 딸이 그 대가로 딸을 얻은 걸 무척이나 섭섭해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갓 태어난 신생아인 내가 두 발을 비비며 벌겋게 되도록 멈추질 않아, 마치 외할머니의 말을 알아듣는 듯 심통을 부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엄마의 해석처럼 과연 그래서일지는 모르겠다.

지금이야 출생 전에 남녀 성별을 알 수 있으나 과거엔 태어나기 전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출산을 앞둔 가정에선 아들 자손이 태어나길 오매불망하던 게 그 시대상 인지상정이었다. 그만큼 남존여비 사상이 뚜렷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내가 딸이라 아들보다 차별 대우를 받은 기억은 전혀 없다. 도리어 맏딸이다 보니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를 지나치게 받고 자랐다 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식에게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엄마는 외가 경제 사정이 어려워 대학을 못 간 것에 대한 한이 많아 그 보상심리로 나에게 온통 집중했다.

엄마 유품에서 나온 나의 초등 성적표. 문예부였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엄마 유품에서 나온 나의 초등 성적표. 문예부였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초등학교 2학년 성적표 중 가정통신문이 눈에 들어온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고 기록한 엄마의 가차없는 캐릭터가 보인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초등학교 2학년 성적표 중 가정통신문이 눈에 들어온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고 기록한 엄마의 가차없는 캐릭터가 보인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엄마의 치맛바람

엄마는 교육열이 대단해 맹모삼천지교 못지않게 치맛바람 꽤나 휘날렸다. 나는 이를 귀찮게 여겨서 제발 날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 동네에서 눈에 띄게 차려 입고 학교로 자주 방문하는 것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물론 애정을 쏟은만큼 엄마의 훈육도 철저했다.

어릴 때 받은 엄마의 교육 원칙은 3대 불가, 거짓말과 비속어 사용, 도둑질은 제일 엄격히 단속한 문제였다. 그와 관련하여 혼난 기억 세 가지가 떠오른다.

한 번은 엄마 지갑에서 동전 하나를 몰래 가져다 쓴 일로 호되게 매질을 당했다.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것 같다. 집 앞 구멍가게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은 게 딱 걸렸다. 삼각 비닐봉지에 든 색소를 넣은 주황빛 음료였는데 엄마는 먹지 못하게 해 사줄 리 만무했다. 먹고 싶어서 결국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댔고 먹는 모습을 들켜서 돈 출처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지갑을 터는 일은 그때 된통 혼나고 그걸로 끝이 났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내가 학교에서 친구랑 싸웠던 모양이다. 집에 왔더니 엄마가 어떻게 알았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회초리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친구들이 하굣길에 우리 집 앞을 지나다 엄마한테 일렀던 것이다. 엄마의 지적 사항은 내가 싸우면서 욕설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같이 싸우던 친구가 나한테 욕해 나도 따라 한 건데 그 친구가 아니라 나를 혼냈다. 억울했지만 그때 한번 사용한 비속어는 정말 근절될 정도로 야단을 맞았다.

세 번 째는 시험지 사건이다. 초등 4학년 때인가 싶다. 엄마는 내가 시험지를  받아오면 모아서 집게로 집어 벽에 걸어뒀다. 근데 한 번은 70점대 점수를 받은 것이다. 가슴이 철령 내려앉았다. 나로서는 혼날까 봐 엄마한테 내놓을 수 없어 다른 시험지 사이에 슬쩍 끼워뒀다. 근데 시험지를 받은 걸 안 엄마는 왜 안 갖고 오나며 내놓으라는 것이다. 겁이 난 나는 창문을 넘어 친구 집으로 도망을 가 숨어 버렸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지 엄마가 멀리 친구네로 찾아오면서 나의 도피 사건은 미수로 종결되었다.

모성은 강하다

예전 '엄부자모'라며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뜻으로, 아버지는 자식들을 엄격히 다루는 역할을 주로 하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깊은 사랑으로 보살피는 역할을 주로 함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우리집은 반대로 아버지는 모든 것에  너그러운 편이었다. 엄마와 부부싸움하는 경우만 제외하고 어릴 때 아버지의 나를 향한 시선은 항상 미소 짓는 모습만이 남아있다. 이에 반해 엄마가 엄격하게 훈육을 하는 입장이라 악역을 자처했다. 엄마가 다리 걷으라며 장딴지를 맞는 날은 지옥인 셈이다.

우리 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6학년 2학기가 되자 엄마는 담임선생님과 모의(?)를 하여 더욱 가열하게 공부를 시키며 날 몰아세웠다. 입학시험 날짜가 나가 오면서 급기야는 새벽 4시까지 담임 선생님 댁으로 가서 과외공부를 했다. 그리고 낮에 학교 생활 후 저녁에 선생님 댁에 다시 가서 공부 후 밤 12시에 그 당시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귀가하는 빡센 스케줄이 이어졌다.

엄마는 새벽 3시 40분이면 어김없이 날 깨웠고 우윳가루를 뜨거운 물에 개어 계란을 넣은 음료를 새벽마다 들이밀었다. 잠든 지도 얼마 안 된 나는 겨우 다시 깨어 눈을 비비며 억지로 마시고 또 선생님 댁으로 초겨울 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향했다.

이때 막내 동생을 임신해 만삭이었는데도, 그리고 막 출산을 하고서도 어찌 그리 날 뒷바라지를 했는지 지금도 대단하다 생각된다. 나 같으면 못할 것 같은데 엄마의 철저함과 열의는 존경스럽다.

아버지의 외도와 불화로 마음 둘 곳이 없었던지 엄마 시선을 온통 우리 삼남매 교육에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의 백년지대계 교육열 덕에 우린 지방에 머무르지 않고 도시로 나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운행하던 순환열차라 칭하던 밤 열차를 타고 수시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엄마의 열정을 자녀교육에 온통 바쳤다.

할머니와 엄마의 고부 갈등

그런데, 부부와 자녀관계 못지않게 대가족으로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니 엄마와 할머니간 갈등 또한 생기기 마련이다. 어쩌면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자연 엄마는 날 붙들고 집을 비운 날이 많았던 아버지 뿐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불만을 호소했고,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나한테 하소연을 했다. 그녀들은 어린 나를 향해 자신들이 살아온 삶을 넋두리처럼 늘어놨다.

할머니는 딸 다섯 중 막내인데, 그래서 아들처럼 학교를 보내줬다고 한다. 아들 같은 막내딸이어서인지 할머니도 한 근성 했다. 물론 8남매를 다 키우고 공부시킨, 부지런하고 알뜰하며 억척같이 강인한 여인의 삶을 살았다. 역시나 막내딸인 엄마는 위로 오빠 둘인데 외가인 친정에서 존재감이 만만치 않았다. 

강한 캐릭터인 여인 둘의 불협화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동지애로 변해갔다. 할머니는 가까이 사는 자식과 며느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할머니의 여생은 엄마가 거의 자리를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우리 형제들이 일찍이 다 서울로 유학을  떠나왔고 아버지는 밖으로 나도는 날이 많았으니, 너른 우리집에 덩그러니 할머니와 엄마 둘만 남았기 때문이다. 

전날 까지 아무 일 없이 잠자리에 들었던 할머니가 아침에  뇌사 상태로 돌입한 것을 발견한 사람도 엄마였다. 친 모녀간 못지않게 애증관계였던 할머니와 엄마는 40년 이상을 같이 살며 희노애락 속에서 한 가족이 되어갔다.

무뚝뚝한 딸이었던 나

엄마와 딸은 서로 너무 가까워서 만만하고, 서로가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만큼 상처를 주고 가까운 만큼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장녀인 나는 동생들과 나이차가 많아 장남 같은 위치에서 가족의 문제에 늘 깊이 관여할 책임이 있고 엄마의 정서적인 배우자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한 경향이 있었고 고마움을 몰랐다. 엄마가 엄마 아닌 인간으로서의 인생을 생각하지 않고 날 낳았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자기중심적인 딸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엄마의 결혼생활을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동지, 한편으론 객관적 평가자겸 비평가로 오랜 세월을 자리매김해 지냈다.

엄마는 뜨개질에서부터 양재 편물 등 손재주가 많아 우리 옷을 거의 만들어 입혔다. 게다가 세월이 흘러 내가 결혼해서 아이들 그러니까 엄마 손주들 겨울 점퍼까지 손수 떠서 줬다.

그런데 딸이 배우면 써먹게 되고 팔자(?)가 사나워진다며 가르치지 않았다. 집안 일도 결혼하면 다 하게 되어 있다고 배우길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집안의 대소사간 큰 문제에 대해선 알리며 상의하며 나의 판단과 결정을 요구했다. 절대적인 영향력이 컸던 엄마를 이길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생각해 결정적인 순간에 아버지도 날 찾았다. 때론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이 내 어깨 위에 짊어졌다. 자연 곰살맞기보단 수시로 부모님께 비난의 화살을 보내며 한 목소리를 냈다.

여성 상위시대

지금은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여성의 지위는 하늘을 날 정도다. 과거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라는 남존여비 사상의 구시대적 발상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만큼 우먼파워가 거세지고 있다. 정치권만 보더라도 여성 대통령을 배출하고 여성들의 정치권 진출은 이제 당연한 일이다.

배움을 바탕으로 한 여성들은 전문직에도 적극적으로 도전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간단히 수치로도 알 수 있지만 전후 세대로 자란 어머니 세대와도 확연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요즘 현대 여성들이다.

과거 결혼이 필수이던 시절, 여자들은 결혼하면서 아이가 생기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구속이랄까,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얽매이게 된다. 마치 동화의 선녀와 나무꾼에서 날개옷과 같은 아이들 때문에 오랜 세월을 떠나지 못하고 살았다. 엄마는 이혼을 수시로 입에 올리며 우리를 불안에 몰고 갔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그 한 많은 세월 동안 참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기같은 여자

나이가 들수록 엄마들은 친구 같은 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딸을 찾고, 필요한 것이 있어도 딸을 찾는다. 딸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인류인 엄마의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다. 엄마의 말, 행동, 태도는 딸의 우주가 되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기준점이 된다.

엄마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니다 해방을 맞았다. 두뇌가 명석했던 터라 초등학교 때까지 배운 일본어를 잊지 않고 있어 일본어도 나름 능숙했고 한자 가득 일본 잡지를 즐겨 읽었다. 일본 여성지 부록 속 뜨개질이나 양재를 보곤 게이지를 내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은 직접 뜨거나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 책 속의 글들을 읽고 얘기들을 들려준 적이 있는데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게 이 "공기 같은 여자" 대목이다. 엄마는 그 책에서 여자는 모름지기 공기 같은 여자이어야 한다고. 한때 일본 여자는 세계적으로도 공인된 브랜드였었다. 그만큼 오랫동안 일본 여성은 남자에게 헌신적이라고 알려졌다.

그렇담 공기 같은 여자란 뭘까? 엄마 왈 공기는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나, 없으면 큰일 나는 물체이니 그렇게 처신을 하고 남편에게 대해야 한다고 책에 나와있다고 했다. 어쩌면 과거 여성의 지위가 현대와 같은 시절이 아니기에 일방적으로 여성의 희생이 강요되던 시절 이야기다. 공기 같은 여자가 아니라 공기 같은 사람이 더 인간의 우선 가치일지도. 어디서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명제에 해당된다.

엄마의 공기같은 여자 운운에 반감을 표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엄마의 가르침이 나의 어느 한쪽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나곤 한다.

성장해 온갖 풍파를 겪으며 이제서야 부모 세대를 이해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엄마가 나를 그렇게 열과 성의를 다해 키웠는데 난 당연시하고 고마움을 몰랐던 철부지적 모습이 후회와 회한으로 다가온다. 이젠 그저 나의 여생을 마무리 잘하고 바람직한 인간으로 거듭남으로써 밖에는 보상할 방법이 없다. 자식을 염려하고 희생 헌신한데는 부모를 따를 수 없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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