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풍광, 최대 사찰 순천 송광사 [일상스케치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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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풍광, 최대 사찰 순천 송광사 [일상스케치㉟]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4.1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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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국사 배출한 승보 사찰
'목조삼존불감' 등 국보 보유
법정스님 다비식이 열린 곳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이제 봄의 전령사 매화, 산수유는 떠나고 연분홍 벚꽃이 만개해 꽃비를 휘날리고 있다. 시골집 마당엔 부쩍 자라 무성해진 쑥, 보랏빛 제비꽃, 흰꽃 민들레가 봐달라는 듯 반기며 손짓한다. 바야흐로 산천이 기지개를 켜며 푸릇푸릇 초목들이 존재감을 뽐내니 어디로든 가고 싶은 계절이다.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갇혀있던 심신을 해방이라도 시킬 듯 활기찬 곳으로 달려 나가는 대신 고즈넉함을 선택했다. 잊고 있던 산사의 봄은 어떤 모양새일지, 또 '무소유'를 일갈했던 법정 스님도 떠올라 천년 고찰 순천 송강사로 봄나들이 떠났다.

혜린 선사와 보조 국사 지눌

대한민국 삼보사찰 중 하나인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서쪽에 자리 잡은 참선 도량으로,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16 국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절이다. 불의 통도사, 법의 해인사, 승의 송광사를 우리나라 삼보 사찰이라 하는데, 송광사는 '승보사찰'(僧寶寺刹: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함으로써 얻어진 이름)로 일컫는다.

통일신라 말기에 혜린 선사 체징이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후 고려 명종 때 보조 국사 지눌이 크게 고쳐 지었다. '송광'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도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그 후 절 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송광산은 도리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송광사 진입을 위해 처음 만나는 '청량각'을 통과하면 계곡을 끼고 측백나무와 잡목숲이 길게 이어진다. 그렇게 숲길에 취해 무념무상 걷다 보면 송광사 입구인 일주문에 이른다.

송광사 전각들이 펼쳐져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송광사 전각들이 펼쳐져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대승 선종 조계산 송광사

송광사의 입구 조계문, 일주문이라고도 한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송광사의 입구 조계문, 일주문이라고도 한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일주문의 '대승 선종 조계산 송광사'라는 편액이 눈에 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것은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니 가능한 행동과 마음가짐을 경건히 해야 한다.

송광사는 크게 청량각에서 천왕문까지의 진입 공간, 종고로에서 대웅보전에 이르는 중심 공간, 대웅보전 뒤의 수선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일주문 측면에서 바라본 우측 임경당의 모습. ⓒ정명화 자유기고가
일주문 측면에서 바라본 우측 임경당의 모습. ⓒ정명화 자유기고가

계류에 걸쳐 있는 임경당은 그 이름처럼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건물로 기둥 두 개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어 선경을 자아낸다.

송광사 유명처 삼청교와 우화각

삼청교, 능허교라고도 불린다. 내를 건너는 다리 구실도 하고, 다리 위에 우화각이라는 건물을 세워 건물 구실도 하는 특이한 다리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삼청교, 능허교라고도 불린다. 내를 건너는 다리 구실도 하고, 다리 위에 우화각이라는 건물을 세워 건물 구실도 하는 특이한 다리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에 진입하기전 먼저 만나는, 송광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네모난 돌 19개로 만든 홍교(무지개다리)인 삼청교다.

삼청교 위에 세워진 우화각. ⓒ정명화 자유기고가
삼청교 위에 세워진 우화각. ⓒ정명화 자유기고가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려면 능허교(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 위에 놓인 우화각(羽化閣)을 통과해 계류를 건너야 한다. 계류와 능허교, 우화각이 삼박자를 이루는 풍광은 경치 좋은 송광사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절경이다.

스님들의 학습공간 사자루

삼청교위 우화각, 천왕문, 사자루가 나란히 보인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삼청교위 우화각, 천왕문, 사자루가 나란히 보인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계류가 흘러내려가는 쪽으로 임경당(臨鏡堂)이, 계류가 흘러오는 우화각 우측으로는 침계루(枕溪樓)가 자리한다.

개울앞에서 바라본 사자루 뒷 모습. ⓒ정명화 자유기고가
개울앞에서 바라본 사자루 뒷 모습. ⓒ정명화 자유기고가

우화각 우측 사자루, 일명 침계루라 불린다. 침계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20세기 초에는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연극을 공연한 무대였다고 한다. 그 화려하고 독특한 외관에 나의 시선을 강하게 붙들었다.

'시내를 베고 누워 있다'라는 뜻처럼, 계류에 세워진 침계루가 활짝 핀 벚꽃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시내를 베고 누워 있다'라는 뜻처럼, 계류에 세워진 침계루가 활짝 핀 벚꽃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벚꽃이 화사하게 산사의 방문객을 반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벚꽃이 화사하게 산사의 방문객을 반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그리고 삼청교를 지나면 바로 천왕문이 등장한다. 천왕문은 정면, 측면 각 3칸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초창되었다고 전해지며 숙종 44년(1718)에 중수되었다.

영산전과 약사전

송광사 경내에 들어서면 사방이 전각들로 빼곡하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종고루를 기준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사전, 영산전, 지장전, 대웅보전, 승보전, 성보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영산전과 약사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영산전과 약사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영산전과 약사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영산전과 약사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경내 첫번째로 만난 영산전과 약사전. 대웅보전 앞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축물들이지만, 건축적인 가치가 커 각각 보물 제302호, 제303호로 지정돼 있다. 약사전은 송광사 경내에서 가장 작은 법당으로, 영산전과 더불어 제일  오래된 불전이라고 한다.

지장전 측면. ⓒ정명화 자유기고가
지장전 측면. ⓒ정명화 자유기고가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주불로 세운 전각으로, 송광사 지장전은 한국 4대 지장 성지 중 한 곳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위풍당당 대웅보전

송광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 대웅전 좌측에 승보전, 우측에 지장전이 자리한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송광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 대웅전 좌측에 승보전, 우측에 지장전이 자리한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송광사는 고려 명종 때 80여 동의 건물이 꽉 들어찬 전국 제일 가는 절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난리를 거치면서 30여 동이 불타 없어져 지금은 5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제일 큰 절이다.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 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 대사(浮休大師, 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대웅보전은 본래 승보전 자리에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것을 중건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대웅보전은 본래 승보전 자리에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것을 중건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이후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승보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좌측 정경. ⓒ정명화 자유기고가
승보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좌측 정경. ⓒ정명화 자유기고가

대웅보전은 정면도 웅장하지만 측면에서 봐도 장엄함에 장엄함을 더한다. 지금의 대웅보전은 1951년 소실 후 1988년도에 다시 지어졌다는데, 108평 규모의 대웅보전은 독특한 건축형태와 단청으로 현대 한국 전통건축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대웅전 문의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대웅전 문의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승보전과 비사리 구시

승보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승보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에는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신 전각이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대웅전을 송광사 7차 중창 당시에 복원하면서 지어졌으나 송광사 8차 중창때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승보전 측면. ⓒ정명화 자유기고가
승보전 측면. ⓒ정명화 자유기고가
나무 밥통 비사리 구시. ⓒ정명화 자유기고가
나무 밥통 비사리 구시. ⓒ정명화 자유기고가

승보전에 있는 비사리 구시는 느티나무 고목으로 만들었다는데 용량이 2,600리터나 되니 쌀 7 가마, 약 4천 명 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흔히 송광사의 3대 명물로 이 비사리 구시와 능견난사, 천자암 쌍향수를 들기도 한다.

이처럼 전각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렇게 사격(寺格)이나 규모 면에서 우리 불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대표적인 전각 외에 나라를 빛낸 16국사의 덕을 기리어 세운 국사전,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었던 설법전 등이 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여느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석탑이 송광사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연유가 있을까.

문화재 보고 송광사

유서깊은 승보사찰이란 송광사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소장 중인 문화재가 많다는 점이다. 국가지정문화재 36건과 시도지정문화재 10건 등 지정문화재 46건을 보유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중에서도 국보가 4건, 보물이 27건에 이른다.

국보 제42호 '목조삼존불감'. ⓒ대한불교조계종 제공
국보 제42호 '목조삼존불감'. ⓒ대한불교조계종 제공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위 '목조 삼존 불감'은 나무로 만든 불감(佛龕)인데, 불감은 작은 불상을 모신 집을 뜻한다. 이 불감은 높이가 13㎝, 문을 열었을 때 너비가 17㎝에 불과하다.

송광사의 문화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국사전과 목조 삼존 불감(木彫三尊佛龕, 제42호) 그리고 고종 제서(高宗制書, 제43호)이다.

건물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앞서 살펴본 약사전·영산전이 있다. 그 외 능허교 및 우화각, 보조국사 비, 자정 국사 사리함, 능견난사(能見難思), 금강저(金剛杵), 고봉국 사주 자원 불(高峰國師廚子原佛), 팔 사파 문자(八思巴文字) 등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5불도의 귀환

50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송광사 오불도(五佛圖)는 도난당했다가 미국에서 발견됐다. 기증자 로버트 마티엘리(左 둘째), 도난당했던 18세기 불화 '송광사 오불도'를 1970년대 초반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구입해 소장해오다 2016년 12월 송광사에 기증했다.

53불도. ⓒ정명화 자유기고가
53불도. ⓒ정명화 자유기고가

송광사 불조전(佛祖殿) 〈53불도〉는 조선시대 후기 화승(畵僧) 의겸(義謙)이 1725년 제작한 작품으로 〈7불도 1폭, 9불도 2폭, 13불도 2폭, 5불도 2폭〉 등 7폭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오불도〉 2폭은 1969∼1970년 진행된 송광사 불조전 보수공사 과정에서 다른 전각(殿閣)으로 옮겨졌다가 1970년대 초반에 사라졌다. 이 가운데 1폭을 미국인 로버트 마티엘리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구입해 1985년 미국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관음전과 백목련

대웅전과 승보전 뒤에 위치한 관음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대웅전과 승보전 뒤에 위치한 관음전. ⓒ정명화 자유기고가

수많은 다양한 전각을 돌다 지칠 즈음에 만난 관음전. 관음전 마당에서 속절없이 지고 있는 백목련 가는 모습에 슬픔이 묻어난다. 그래도 어김없이 다음 해에 꽃을 맺으리라. 자연은 피고 지고 환생할 수 있어서 부럽다. 그들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데 한번 간 인생은 돌아올 길 없다. 자연보다 못한 인생인가.

송광사와 법정스님

지난 3월 11일이 12주기였던 법정(1932~2010) 스님은 송광사 뒷산 불일암(佛日庵)에서 1975년부터 1992년 봄까지 17년간 머물렀다. 불일암은 원래 송광사 16 국사 중 제7대 자정 국사가 창건한 자정암 폐사 터에 법정스님이 1975년에 중건하여 편액을 걸었다.

스님은 이곳에서 '무소유' 등 주옥같은 서적들을 집필했고 2010년 3월 11일 서울 길상사에서 열반해 이곳에 잠들었다. 불일암 앞에는 스님이 가장 아꼈다는 후박나무가 서있는데 이곳에 스님의 사리를 안치했다. 생전 스님이 걷던 대나무 숲을 2016년 재정비한 ‘무소유 길’을 따라 오르면 암자에 닿는다.

법정스님의 다비식 광경. ⓒ연합뉴스
법정스님의 다비식 광경. ⓒ연합뉴스

법정 스님은 송광사 뒤 작은 암자 불일암에서 오랜 수행을 했기에, 많은 불자들이 지켜보는 가은데 송광사에서 다비식이 거행됐다.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가 보기 좋고, 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가 볼만하다. 또 복사꽃은 멀리서 바라볼 때가 환상적이고, 배꽃은 가까이서 보아야 그 꽃의 자태를 자세히 알 수가 있다.'는 생전 법정스님의 꽃에 대한 묘사가 떠오른다.

돌아나오는 송광사 편백나무 숲길. ⓒ정명화 자유기고가
돌아나오는 송광사 편백나무 숲길. ⓒ정명화 자유기고가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나오는 발길은 가벼웠다. 마음은 비워져 하늘을 날듯했다. 누구나 떠날 때는 말이 없지만 살아온 발자취의 영향력에 따라 이름을 남기도 하고 그저 한 줌 흙으로 잊힐 수 있다. 우리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거늘, 무어래 사연도 많고 탈도 많을까. 공수거 공수래인 인생이지 않나.

그래도 봄이 되니 꽃이 핀다. 산야에는 초록이 줄을 이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이 좋다.

맑은 편백나무 숲을 걸어나오며 이날 시간상 직접 가보지는 못해 다음엔 '무소유' 법정스님의 흔적을 찾아 불일암에 들려 봐야겠다 다짐했다. 가을 송광사와 불일암을 기대하며….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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