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 이렇게 살어리랏다…순천 낙안읍성 [일상스케치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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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 이렇게 살어리랏다…순천 낙안읍성 [일상스케치㊱]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4.1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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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유물로 가득찬
살아 있는 민속박물관
과거로의 시간 여행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과거 시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일은 무척 흥미롭다. 그중 주거형태의 옛 모습은 더욱 관심거리다. 20세기 들어 현대화가 되며 가옥의 모습은 급변해왔다. 다양한 형태의 주거공간이 편의와 개성에 따라 각양각색이라면, 예전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주거는 기와집과 초가가 전부에 가까웠다.

그동안 온통 콘크리트 속에서 잃어버렸던 고향을 찾아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평소 궁금했던 지난날 민초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확인하러 조선 시대 지방 계획도시인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향했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살던 마을을 현재까지 잘 보존하고 있는 낙안읍성 민속 마을 정경. ⓒ연합뉴스
조선시대 백성들이 살던 마을을 현재까지 잘 보존하고 있는 낙안읍성 민속 마을 정경. ⓒ연합뉴스

선인들 삶의 터전

읍성은 지방의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서 쌓아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과는 구별된다.

고창 고창읍성, 서산 해미읍성, 순천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3대 읍성이다. 그중 순천시 낙안면에 자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400여 년이 된, 조선 시대 성곽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전통적인 주거형태와 생활상, 민속놀이 등 옛날 양식이 그대로 전해 내려와 생생한 과거 시대 모습을 가늠케 한다.

잦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읍성 축조. ⓒ연합뉴스
잦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읍성 축조. ⓒ연합뉴스

낙안읍성은 마한 시대부터 선인들 삶의 터전이었다. 백제 시대에는 파지성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분령군으로, 고려 시대에 양악, 낙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낙안읍성이 현재와 같은 역사 마을로 등장하는 계기는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처음 태조 때 잦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낙안 태생 김빈길 장군이 토성으로 축조한 것이 수차례 붕괴가 있었고, 인조 때 돌로 다시 쌓아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100채에 가까운 초가로 이루어진 낙안읍성. ⓒ연합뉴스
100채에 가까운 초가로 이루어진 낙안읍성. ⓒ연합뉴스

읍성의 역사

언제쯤 읍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삼국시대 지방의 주요한 도시를 둘러싼 읍성이 산성과 같이 산을 의지한 위치에 있었던 흔적이 차츰 밝혀지는 중이다. 통일신라 때에는 9주(州)와 5소경(小京)이 지방의 큰 도회지였고, 신문왕 때 읍성이 축조되었던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의 주요 지방도시에도 읍성이 축조되었고, 고려 말기까지는 규모가 작은 토축(土築)의 읍성들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이들 고려시대의 읍성들은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차츰 석축(石築)으로 고쳐지거나 호구(戶口)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세종 때부터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바다가 가까운 지역의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개축하며 중앙정부에서 감독하였다. 지방의 수령들에게는 근무기간 중에 지켜야 할 근무지침으로 성을 보수하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읍성을 쌓고 나서 5년 이내에 무너지면 죄로 간주되었고, 견고히 쌓으면 상을 준다는 규정도 마련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런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읍성은 부, 목, 군, 현 등 행정 구역의 등급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있었고, 크기는 주민의 수와 관계있었다. 조선 시대 내륙 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읍성이 있었고, 해안 근처에는 거의 모든 고을에 읍성이 있었다.

이들 읍성은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으나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읍성 중 대표적인 것은 정조 때 세운 수원읍성이다. 또 낙안읍성, 해미읍성, 동래읍성, 보령 읍성, 진도 읍성, 경주읍성, 거제 읍성 등이 있는데, 낙안읍성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총독부령 제1호를 통해 조선 역사의 상징인 관아와 성곽들을 헐어버리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했다. 낙안 객사는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헐리는 것은 면했다. 그러므로 1986년 학교를 이전하고 내부를 보수해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동헌 입구와 안마당 모습. 당시 죄인을 다스리던 모습을 재현한 동헌 앞마당이 기념 촬영 장소로 인기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동헌 입구와 안마당 모습. 당시 죄인을 다스리던 모습을 재현한 동헌 앞마당이 기념 촬영 장소로 인기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읍성의 구성

낙안읍성은 1983년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행정 구역상 3개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85여 가구의 약 300여 명이 100여 채의 초가집에 거주하고 있다. 이는 관광용으로 세트화한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 남도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석성과 동헌, 객사, 초가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객사, 동헌, 내아가 나란히 자리한다. 객사는 한양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묵는 숙소를 일컫는다.

동헌은 조선 시대 지방 관아의 핵심 건물인데 행정과 송사 등 지방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군청이나 면사무소에 해당한다. 내아는 지방 관아의 안채로 내동헌이라고도 한다. 정면은 ㄱ자형이며 7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안쪽에 고방이 있으며 부엌과 창고가 함께 설치되어 있다.

특히 낙안읍성 안에는 특이한 관청 건물이 있는데 죄인들을 가두던 옥사다. 다른 고을의 경우 관아 옆에 옥사가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관아와 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담장은 2.5미터 높이로 여타 담장보다 높게 쌓았으며, 주변에 연지(늪)를 두어 죄수들의 탈주를 막는 장애물로 이용했다. 옥사가 굳이 주거지 속에 있는 이유는 주민들을 상대로 교육장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느티나무와 낙민루. ⓒ정명화 자유기고가
느티나무와 낙민루. ⓒ정명화 자유기고가

낙안읍성 동헌 앞에 있는 낙민루는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 1986년 낙안읍성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기존 초석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집으로 삼문이 있다. 2층은 중앙에 낙민고가 설치되어 있고, 낙민루 앞에 4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 곳을 구정 뜰이라고 한다.

토담집. ⓒ정명화 자유기고가
토담집. ⓒ정명화 자유기고가

민초들의 주거 형태 초가

낙안읍성에서 보이듯이 대부분의 백성들이 초가집에서 살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옛날에는 집을 보면 그 지역의 기후, 환경은 물론 사는 사람의 신분까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건축양식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에 뚜렷하게 달랐고, 권위적인 건물은 기와지붕이었지만 대부분은 초가였다. 이러한 경향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헌강 왕대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경주지역에 있던 민가들은 거의 기와집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시대 역시 전통 가옥은 크게 초가집, 기와집, 너와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지붕의 재료에 따라 나눈 것이다. 농사를 짓던 평야 지역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이 많았고, 양반이나 부자들은 기와를 얹은 기와집에서 살았다. 또한 나무가 많은 산간 지역에는 나무를 이용해 지붕을 만든 너와집이 많았다.

동헌이 바라다 보이는 돌담집. ⓒ정명화 자유기고가
동헌이 바라다 보이는 돌담집. ⓒ정명화 자유기고가

초가삼간

초가는 신석기시대에 움집[竪穴住居]이라는 인공적인 주거공간이 형성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채취한 풀이나 나뭇가지 등으로 지붕을 만들다가 농경생활이 시작된 신석기 후기부터는 짚을 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초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구당서 舊唐書〉 동이전에 "고구려 백성들은 산골짜기를 의지하여 살았는데 대개 띠로 지붕을 만들었다. 다만 절·궁궐·사당·관아만 기와지붕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초가의 가장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초가삼간(草家三間)이라고 부르는 부엌 1칸, 방 2칸으로 구성된 일(一) 자형이다. 이것은 일자집이라 하여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초가집 이엉얹기.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짚을 이어 지붕을 새로 얹는다. 이엉얹기는 매년 9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다. ⓒ연합뉴스
초가집 이엉얹기.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짚을 이어 지붕을 새로 얹는다. 이엉얹기는 매년 9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다. ⓒ연합뉴스

초가는 재료적인 특성으로 인해 불에 약하고 썩기 쉬우므로 매년 갈아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촌과 서민 계급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예로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한 지붕형태였다. 더욱이 짚은 매우 가벼우므로 건축구조의 목재 단면이 기와집에 비해 월등히 작아도 되며, 단열성이 뛰어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또한 구조가 간단하여 농민들이 직접 집을 지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대나무 대문, 어릴 때 시골 고향 동네에서 자주 보던 모습이라 반가웠고 향수에 젖게 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대나무 대문, 어릴 때 시골 고향 동네에서 자주 보던 모습이라 반가웠고 향수에 젖게 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낙안읍성의 특징

다시 본류인 낙안읍성으로 돌아가 보자. 그 기본은 행정 도시다. 세조 12년(1466) 낙안군이 편제된 이래 1910년 폐지될 때까지 군 청사가 있는 고을로 현재의 벌교읍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낙안읍성의 인구는 1,000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일반적인 전통 마을 인구의 4배 정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일반 마을에 비해 밀도가 상당히 높다.

전통 마을의 경우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뚜렷한 위계질서를 이룬 데 반해 낙안은 양반들보다는 관에 출입하는 아전들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살았다. 양반들이 낙안읍성 안에서 살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관과 관속이 있는 고을에서 벗어나 향촌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낙안읍성의 출입구는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낙풍루, 남문은 쌍청루 또는 진남루, 서문은 낙민루라 부르며 북문은 폐쇄했다.

이곳의 특징 중 하나는 깊은 우물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전통 마을 중 여러 곳이 풍수지리에서 성내에 깊은 우물 파는 것을 금했는데, 낙안읍성도 그런 예다.

우물이 없다면 낙안읍성 사람들은 식수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다행히 마을 중앙에 1미터 정도의 낮은 천연 샘이 있어 식수 공급은 걱정 없었다. 풍수에서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은 금지했지만 천연 우물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다행히도 천연 우물은 물이 깊지 않은데도 가뭄 때나 우기 때나 마르거나 넘치지 않고 별 차이 없이 본래 수위를 유지했다.

돌담집. ⓒ정명화 자유기고가
돌담집. ⓒ정명화 자유기고가

초가집은 특유의 수수함과 소박함이 느껴진다. 낙안읍성에서는 돌로 쌓은 담과 흙으로 쌓은 건물 외벽이 맞대어 이어지며 두 종류의 거친 재질감이 어우러진다. 낙안읍성은 다른 전통 마을보다 정겹게 느껴지는데, 건축 소재를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해 집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낙안읍성에는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一자형 가옥으로 방과 마루,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부엌, 큰방, 작은방 등 3칸이 나란히 배열된 초가삼간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다른 지역에 있는 3칸 집은 부엌에서 방 3개를 동시에 난방하도록 구들을 놓으나 낙안읍성의 몇몇 집에서는 작은방 앞에 아궁이를 따로 두고 큰방과 별도로 난방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여름철에 부엌에서 밥을 하더라도 작은방은 난방되지 않아 모든 방이 한증막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낙안읍성에서 초가삼간 다음으로 많은 주택이 4칸 집이다. 3칸에 대청을 하나 추가한 것으로 큰방과 작은방 사이에 들어간다. 4칸 집에서 작은방, 즉 건넌방은 사랑방과 같은 위상을 갖는다.

기타 낙안읍성 구시대 유물

잊혀져 가는 모습. 소가 수레를 끌며 짐을 옮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잊혀져 가는 모습. 소가 수레를 끌며 짐을 옮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흔하지 않은 풍경, 처음본 낙안읍성내 목화밭. ⓒ정명화 자유기고가
흔하지 않은 풍경, 처음본 낙안읍성내 목화밭. ⓒ정명화 자유기고가

장승과 솟대

장승. 낙안읍성의 각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편에는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세워져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장승. 낙안읍성의 각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편에는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세워져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낙안읍성의 각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편에는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세워져 있다. 장승을 마을 입구에 세우는 이유는 장승이 마을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승이 서 있는 곳은 장승배기라고 부르며 배기란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다.

오른쪽은 남장승으로 천하 대장군, 왼쪽은 여장승으로 지하 여장군이 세워져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오른쪽은 남장승으로 천하 대장군, 왼쪽은 여장승으로 지하 여장군이 세워져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이와 함께 대부분 길 양편에 세워진 천하 대장군과 지하 여장군. 오른쪽은 남장승으로 천하 대장군이라 하고 왼쪽은 여장승으로 지하 여장군이라고 한다. 대개 서낭당이나 선돌, 솟대 등과 함께 세웠으며 돌무더기 위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 고즈넉한 마을 풍경을 느긋하게 조망할 수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성곽을 따라 걸으면 고즈넉한 마을 풍경을 느긋하게 조망할 수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그 외 낙안읍성에는 여러개의 고인돌과 임경업 장군을 기리며 세운 선정비, 봄·가을에 제사 지내는 충민사·대성전·명륜사 등의 향교건물과 1,407m의 성곽 등이 있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풍등제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과거 역사의 흔적을 돌아보며 미래는 어떤 모습일 지 자못 궁금해진다. 후손들에게 수백 년 후 현재의 모습은 어떻게 기억될 지 그리고 미래의 주거 형태는 어떨 지. 역사는 시대를 관통하며 유유히 흐르겠지만 다음은 어느 누구도 예단키 어렵다. 달나라로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갈 지, 다른 행성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 지 그저 유추해 볼 뿐이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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