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현 “김상현 공로…국민 지지, DJ 있었기에 가능” [민추협 되짚기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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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현 “김상현 공로…국민 지지, DJ 있었기에 가능” [민추협 되짚기⑨]
  • 윤종희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2.04.25 15: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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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민추협 기획위원)
“학생운동하다 군대, 연청 활동 후 민추협으로”
“DJ와 굴비 면접, 30대 나이 비서관 하게 돼”
“동교동, 상도동 50대50이 민추협의 핵심 정신”
“자리 나눠 먹기만 잘해도 훌륭한 정치라 생각”
“윤석열, 민추협 선배들과 자리 마련했으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종희 기자, 윤진석 기자)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맡고 있는 이석현 전 부의장은 동교동계와의 인연은 1980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맡고 있는 이석현 전 부의장은 동교동계와의 인연은 1980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동교동계와의 인연은 1980년부터 시작돼요.”
“아, 그런가요.”
“10‧26 박정희가 사망했고 서울의 봄이 왔었지 않습니까.”

이석현 민주평화통일(민주평통) 수석부회장(이하 이석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4월 6일 꽃이 필 무렵이었다. 서울 장충동 소재의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실을 찾았다. 산등성이 밑자락이어서인지 아직 찬 기운이 감돌았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출범 후 그는 김상현(6선 역임)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보좌했다. 민추협 기획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김대중(DJ) 공동의장이 귀국하면서 DJ 비서관을 맡았다. 

 

1. 민추협으로 가기까지


이야기는 동교동계 인연으로부터 시작됐다. 시계태엽을 거꾸로 돌리듯 서울의 봄이 복기 됐다. 1979년 10월부터 1980년 5월까지가 서울의 봄이다.

“뭐가 있었느냐면 민주연합청년동지라고, 우리가 줄여서 연청이라고 했어요.” 이 기간 연청은 DJ 당선을 위해 모인 조직이었다. 12명의 중앙운영위원을 중심으로 전국 시‧군구에 꾸려졌다. 

그는 최연소로 참여했다.

“김홍일(DJ 장남) 형, 송창달 선배, 국회의장을 지낸 문희상 선배, 고려대 학생회장을 지낸 최정진, 국민대 학생회장 출신의 배기선 동지 등이 있었어요.” 각 대학교에서 학생운동 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석현도 학생운동을 했다. 195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언문을 깨우친 외할머니는 표현법이 풍부했다. 이석현도 문학적 소질이 뛰어났다. 전북 익산에 위치한 남성고를 졸업하고 1969년 서울대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삼선 개헌 반대가 화두로 떠올랐다. 시대상에 눈뜨면서 무보수 야학 운동을 했다. 엄동설한에 사과 파는 할머니, 그에 대비되는 높다랗고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은 삶의 부조리함을 안겼다. 

공학자로서 사는 게 의미 있나. 회의감이 밀려왔다. 71년 동대학교 법대로 다시 입학했다.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대학가 전역으로 교련 교육 반대 움직임이 일었다. 학교 안으로 탱크가 들어왔다. 골수분자로 찍혀 군대 영장이 발부됐다. 이석현은 그 길로 DJ(당시 국회 국방위원)를 찾아가 부당함을 알렸다. 첫 만남이었다. 

하루는 행정 소송을 준비하던 중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병역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한 달 뒤 유신이 선포됐다. 1972년 10월이었다. 서울법대 지도교수이던 양승규 교수가 발 벗고 나서줬다. 

덕분에 선고유예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입대했다. 사실 군대 갈 체중이 아니었다. 47kg에 불과했다. 골칫거리만 모아뒀다는 12급 양대 소속으로 배치됐다. 노동 업무가 맡겨졌다. 71년 교련 반대 사건 이후 위수령으로 군에 간 이들을 일컬어 ‘71 동지회’로 불렀다.

제대 후 복학했지만, 유신 체제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판사가 된들 뭐 하냐는 회의감이 들었다. 1978년 봄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정주영 회장도 만났다. 10·26이 터졌다. 신군부 반란부터 서울의 봄까지 어수선한 시간이 지나갔다.

연청에 가입하기까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이석현은 현대건설 다니던 중 선배들과 활동하면서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다음날(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도 수사 대상이었다.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나는 두 팔을 잡힌 채 1km에 달하는 진흙 길 내내 끌려갔다. ‘너는 이제 죽었다. 살아나오지 못할 거야.’ 내게 권총을 겨눈 채 그들은 연신 겁을 주었다. 내가 아무 말도 않자 그들은 재차 물어보았다. ‘너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내가 다 안다. 옛날에 일제 강점기 때 항일운동 하던 사람들이 형사한테 끌려가는 그런 장면 생각하는 거지? 네가 애국자라도 된 것 같아? 너희들 때문에 나라가 지금 이러는 거 아냐.’(중략) 차로 옮겨타면서 그들은 내 눈을 가렸다. 시간상으로는 아마 남한산성 쪽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 내려서 보안사에 들어가자마자 맞기 시작했다. 나 말고도 그 당시 계엄령 이후 보안사로 잡혀간 사람들은 정말이지 가혹하게 맞았다. (후략)”
-이석현 <힐러리 행진곡> 중-

 

“문희상 선배는 매를 많이 맞았어요.” 

문 전 국회의장은 DJ한테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으로 두 번이나 잡혀가 곤욕을 치렀다. “두 번 끌려갔어요. 돈이 많은 집안이니 자금을 다 댔을 것이다, DJ한테 얼마나 줬냐. 자백하라. 통닭구이까지 당하고 왔다더라고요. 선배가 수염이 있으면 산적처럼 보이거든요. 끌려가 며칠 지나니까 수염이 자란 거예요. 지나는 놈들마다 죄다 때렸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말하면 끝이 없는데….” 멋쩍은 듯 웃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요.”
“보안사에서 풀려나 현대건설 현장으로 복귀했어요. 몇 년이 지나 교육보험(현 교보생명)사로 스카우트 됐죠.”

 

2. 이협 찾아와 민추협 제안


이석현 수석부의장은 학생운동을 하면서 교련에 반대하다 군대 영장을 받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석현 수석부의장은 민추협 대변인 이협 선배의 제안으로 가담하게 됐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본격적으로 민추협 얘기로 넘어왔다. 
“교보를 그만두고 민추협을 하게 된 거잖아요?”
“아. 네.”
“고민이 많이 됐을 텐데요.”
생계와 민추협이라는 갈림길에서 갈등이 많지 않았냐는 질문이었다. 
“현대건설 4년 다니다, 교보생명 다니는 선배들이 청년 임원을 시켜준다고 해서 간 거거든요.”
봉급도 넉넉했고 촉망받는 위치였다. 

- 당시 얘기 좀 해 주죠.

“눈앞에 임원 자리가 아른거릴 때인데 한 번은 이협(동교동계‧민추협 초대 대변인 역임) 선배가 찾아왔어요.” 

서울대 법대 선후배 간이다. 1984년 5월 경. 

“석현아. 저기 말이야. 민추협이라는 게 생긴다.”
“네?”
“동교동계와 상도동이 손잡고 뭘 만들고 있는데, 그것 좀 같이했으면 좋겠다.”
“동교동과 상도동이 손을 잡아요?”
김대중 세력과 김영삼 세력은 민주 진영이긴 했지만 라이벌 관계가 강했다. 이들이 모여 정치결사체를 만든다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교보 그만두고 함께 하자.”
이석현은 장남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이 그가 번 돈으로 먹고 살 때다. 민추협을 들어가자니 징역 갈 것보다 먹고 살 게 더 걱정이었다.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 결심하게 된 계기는요?

“선배의 말이 자극을 줬어요.”

어떤 말인지를 물었다. 

“‘이 사람아. 나라가 지금 이 모양인데 자네 혼자 잘 먹고살려고 회사 다니는가.’ 결국, 그만두고 민추협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1984년 5월 18일 민추협이 출범했다. 신군부가 야당을 해산시키고 국회의원들을 가택연금하고 정치규제로 묶어놨지만, 독재에 맞선 새로운 정치결사체가 탄생했다. 

“처음 김상현 공동의장 권한대행 보좌역과 기획위원을 맡았어요. 민추협 기획실장이 지금의 김덕룡 이사장입니다.”

- 민추협 하면서 다들 어려울 때잖아요? 

“다들 돈이 없었어요. 선배들이 있는 사무실에 놀러 가면 더러 돈을 받거든요. 보통은 2만 원이나 3만 원 주는데, 교통비하고 자장면 먹고…. 특별히 10만 원 주는 날이면 무슨 명절날이나 된 것 같았어요(웃음).” 

버스표가 없어서 청량리 집에서 광화문으로 걸어갈 때도 있었다.

“서울법대 다닐 때 형법 교수였던 이수성 전 총리가 그 모습을 봤나 봐요. ‘바싹 말랐고 눈두덩이 휑한데 민주주의 한다고 눈이 반짝반짝한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해요.’”

- 가족 생계는 누가 책임졌나요. 

“영등포에서 오락실을 하던 황준규 선배라고 계세요.”

연청 활동을 함께한 선배였다. “밥은 안 굶냐며 묻더라고요. 네가 좋은 일을 하니까, 도와주고 싶다며 비밀리에 아무도 모르게 30만 원씩 도와줘서 그걸로 먹고살았어요.” 교육보험 한 달 봉급에 달했다. 

- 기간은 얼마나 됐나요. 

“12년간 도와줬어요. 고마움은 말로 다 못하죠.”

 

3. 김상현 앞장섰고, DJ가 양해해줘


궁금한 질문들을 이어나갔다. 

- 故김상현 의원에 따르면 민추협 할 때 DJ 쪽에서는 선뜻 나서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맞는 얘기입니다. 민추협 만들 때 김대중 선생은 미국에 있었거든요. 망명 중이었기에 김상현 권한대행이 공동의장을 맡았어요. 동교동계를 설득해나갔죠. 그뿐 아니라 YS한테도 민추협을 해야 한다며 많은 자극을 줬을 겁니다.”

- 동교동계는 의견이 반으로 나뉘었잖아요.

“민주헌정연구회(민헌연) 소속의 김종환, 예춘호, 박종태 선생 등은 반대했어요. 김상현, 조연하, 김녹영, 박종률 이런 분들은 민추협을 찬성했고요. 찬성파 중에서는 김상현 대행이 나이가 제일 적었지만, 선배들을 잘 모시고 설득해 가면서 꾸려나갔죠. 누가 옳고 그른 게 아니라 상황을 보는 판단이 달랐던 겁니다.”

- 만들었던 게 옳았던 거잖아요? 

“김상현 대행이 현실 감각이 뛰어나요. 동교동, 상도동이 손을 잡는 방법밖에 없다. 전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 DJ는 초반에 소극적이었는데 왜 그랬다고 보나요. 

“한국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으니까 반대하는 쪽과 찬성하는 쪽이 상반된 거예요. 참여하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판단이 안 선거죠. 초기에는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에 있던 김대중 선생(꼬박꼬박 선생이라고 했다)이 최소한으로 양해해 줘 출범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모았다고 생각해요.”

DJ 존재감을 역설했다. “김대중 선생이 공동의장에서 빠진 채 김상현이라는 이름으로만 갔다면?” 고개를 저었다. 전국적 지지를 얻지는 못했을 거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도 “앞장서 민추협을 만들어준 김상현의 공이 굉장히 크다”고 덧붙였다. 

- 권노갑, 한화갑 등 가신그룹도 뒤늦게 참여했잖아요. 

“비서를 하던 선배들은 처음에는 이쪽저쪽 서기 곤란하니까 가만히 있었던 것이죠. 나중에 김대중 선생이 귀국하면서 공동의장을 맡으면서 참여들 했죠.”

 

4. 신민당 승리의 확신


 

이협 수석부의장은 12대 총선 승리를 예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총선을 교두보로 신민당이 야당으로 활동하며 국민의 지지를 모아야 한다는 쪽이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협 수석부의장은 12대 총선 승리를 예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총선을 교두보로 신민당이 야당으로 활동하며 국민의 지지를 모아야 한다는 쪽이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85년 12대 총선으로 넘어왔다. 

- 큰 승리를 했잖아요.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 및 총선 참여를 놓고 민추협 내에서도 갈등이 있었다던데요.

“제도권으로 들어가야 하냐, 아니냐. 어느 시대나 있을 수 있는 시각의 차이라고 봐요. 다만, 국회라는 교두보를 갖는다면 국민을 상대로 스피커가 커질 수 있다는 현실론이 우세했던 거죠. 실제로 총선에 참여했고 대승을 했고 말에요.”

- 찬성파였나요. 어땠나요. 

“(끄덕이며) 민추협에서는 대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았죠.”

- 총선에 참여하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요. 

“그런 확신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국민 여론이 완전히 마른 가지처럼 말라 있었어요. 불이 붙으면 확 번질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우리가 정치에 뛰어들면 당선될 거다.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봤어요.”

신민당 창당을 처음 제안했다고 알려진 김덕룡도 선거 승리를 확신했다고 전한 바 있다. 

 

“초반에는 정권이 무서워 얼어붙어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근데 시간이 갈수록 다른 거라. 전단지 전달할 때 표정 보면 알잖아요. 한 장 더 달라는 분도 있고 수고한다 격려하고. 전화 역시 중앙정보부나 경찰에서 뭐라 할까 봐 ‘그만 끊으셔’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어떻습니까’‘괜찮습니까’ ‘잘 됩니까’ 물어오기도 하고. 민심이 변하고 있구나. 이 선거, 우리가 이기겠구나. 선거가 임박할수록 확신이 들었지요.”
-2022년 4월 2일 <시사오늘> 김덕룡 인터뷰 증-

 

승리에 대한 예감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다. 창당 2개월 만에 69석을 얻고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DJ는 12대 총선 사흘 전에 돌아왔다. 

- 비서가 됐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8월의 어느 날 동교동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김대중 선생이 보자고 한다는 거예요. 집으로 와 밥을 먹자고 하대요.”

개인적 유대감이 없었던 터다. 청년들을 여러 명 부른 건가 싶었다. “동교동 집은 수리 중에 있었어요. 큰길 건너편 임춘원 전 의원 집에 계시길래 갔더니 나 하나만 초대된 거였어요. 웬일인가 깜짝 놀랐죠.” 

평소 굉장히 단호하게 말하는 위엄있는 모습을 보고, 좀 겁이 나던 차였다. 하지만 어려워하는 마음은 ‘굴비 식사’로 인해 녹아내렸다. 

“굉장히 자상한 거예요. 굴비 살을 직접 발라 밥숟가락에 올려주며 먹어보라고 하는데 마치 아버지 같았어요. 실제 김홍업(DJ 차남) 씨와 내가 동갑입니다.”

DJ는 시국 상황을 물었고, 이후 이석현은 군부, 재벌, 재야, 대학 등으로 나눠 각 분야를 진단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전달했다. 일종의 면접과도 같은 거였다. 30대 나이로 DJ의 비서가 됐다. 

- 당시 최연소 비서였나요. 

“동교동에서는 그랬지만 상도동에서는 김영춘·이성헌 등이 저보다 어렸어요. 동년배로는 박종원이라고 있었어요. 당시 김대중 선생은 가택 연금돼 있었잖아요. 비서들인 우리가 바깥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어요.”

이석현은 주로 신민당과 국회 등을 돌며 동향을 파악했다. 사람들 만나는 게 일이니 저녁 술 모임까지 이어졌다. 

“어제저녁에는 누구누구와 만나 소주도 한잔하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

당시 상황을 전하며 이석현은 자신의 말을 듣는 DJ의 표정이 우울해 보였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더 밝게 웃으며 보고했더니 뜻밖의 말을 하더라고요.”

- 무슨 말요? 

“‘자네는 좋겠네.’ 그래요.”
“아….”
내가 ‘예’ 했더니….”

DJ와의 대화가 회상됐다. “자네는 밖에 다니면서 노래도 할 수 있고, 사람들도 만날 수 있잖나.” 순간 이석현의 코끝이 찡해졌다.

보안사, 국정원, 경찰 치안본부 등 정보기관들이 동교동 집 앞을 지키던 때였다. “세상이 다 감시하는 유리 상자 같은 곳에 사는 거잖아요.” 훗날 이석현은 DJ와 나눈 대화를 소재로 <너도 밤나무 아래서 쓴 나도 밤나무 이야기>라는 에세이를 썼다. 

화제를 돌렸다. 

- DJ 비서로 활동하면서는 용돈 좀 받았나요. 

“김대중 선생께서 귀국하고 나서 그때 처음으로 월급을 비서들에게 조금씩 줬어요. 사모님(이희호 여사)도 그러더라고요. ‘자네는 복도 많다(웃음).’”

- 상도동계에서는 용돈 등을 나눠 가졌다던데 동교동계는 분위기가 어땠나요. 

“다들 힘들게 살던 때잖아요. 선배들께서 큰돈은 아니어도 적은 돈이나마 주려고 한 것 같아요.”

고마웠던 시절이었다. YS에 대한 일화도 꺼내졌다. “김영삼 선생 선친이 거제에서 멸치 어장을 했단 말이에요. 그 멸치가 굉장히 좋았어요. 때 되면 한 포대씩 나눠줘 먹었던 기억이 나요.”

문득 상도동계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의 말이 떠올랐다. ‘정치인의 돈은 오른쪽 주머니로 들어왔다가 왼쪽으로 나가는 거다. 머무르는 게 아니다.’ 탐욕을 부리면 안 된다는 지론이었다. 

“김상현 권한대행도 늘 하던 얘기가 그거였어요. 정치인 주머니는 정거장이라고 했어요. 누가 돈 주면 바로 나눠주고 한곳에 머무르게 하면 안 된다고요.”
이 말도 물었다. 

- DJ, YS와 많이 접했을 텐데 두 사람 스타일은 어떻게 차이 나는지요. 

“두 분은 참 대단한 분들이었습니다. 아주 초인적인 분들이었어요. 김대중 선생은 상당히 신중하게 결정하고는 했어요. 김영삼 선생은 실천이 빠른 분이었어요. 장단점이 있었지요.”

 

5. 6월 항쟁과 87체제  


민추협 수석부의장은 안기부에서 동교동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추협 수석부의장은 안기부에서 동교동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전두환 정권에서 회유 같은 것은 없었나요. 

“나는 뭐 경량급이라 회유는 없었지만, 불편한 건 있었어요. 동교동 비서를 85년부터 88년까지 3년 했잖아요. 친구들한테서 가끔 연락이 와요.”

말을 이었다. 

“석현아. 나한테 전화 좀 하지 말아라.”
“왜?”
“내가 조그만 사업 하나 하는데 세무조사 나올 일이 없는데 너하고 통화 몇 번 했더니 세무조사가 나왔다.”

이런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 도청한 거네요.

“동교동 전화를 100% 도청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날도 있었다. 비서들끼리 돌아가면서 당직하던 때였다. “숙직실에 있으면 어떤 놈이 밤중에 돌을 던지지나 않을까, 총이나 안 쏠까 겁났어요. 자고 있는데 막 전화가 와요. 이상한 욕을 해대고 빨갱이 노래 틀어놓고 심리적인 불안감을 많이 줬어요. 그 짓들을 한 거죠.”

- 안기부에서 한 건가요. 

“그 자체가 탄압이었던 거예요.”

공작들이 많았다. 

- 민추협에서 직선제 개헌, 천만인 서명 운동 등을 전개했잖아요. 최대 목표가 직선제였나요.

“직선제 개헌 운동이 하나의 무기가 됐던 거예요. 말하자면 국민과 함께하는 투쟁을 하는데 직선제 개헌이라는 칼을 들고 휘둘러서 싸운 거죠.”

- 범대중적 운동하기에 좋았던 건가요. 

“국민한테는 가장 큰 공감대였어요. 세상에, 체육관에 5000명이 모여 구십몇 프로가 찬성해 뽑았잖아요. 북한과 비슷하죠. ”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10일까지 체육관 선거를 진행했다. “그런 시대를 살았으니 내 손으로 뽑자는 구호가 국민한테 잘 먹힌 거죠.” 

자연스럽게 6월 항쟁이 이야기됐다. “6월 항쟁이 성공하기까지 우리 학생들이 참 많이 죽고 다치고 희생했잖아요. 이때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범국민적 동참을 이끈 게 민추협이었어요.”

- 성공의 결정타로 보는 건가요. 

“정치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 무엇이 국민을 하나로 묶어내는가를 잘 알고 있었어요. 노동운동, 민주화,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외쳐 국민의 화답을 이끈 게 직선제 개헌이라는 구호였다고 봐요.”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과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민심은 들끓고 있었다. 이때 대중적 행동의 명분이 돼준 게 직선제 개헌 운동이었다. 민추협을 중심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민통련, 전대협,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이 하나의 전선을 구축했다. 시민 참여를 끌어당겼다. 

 

6월 항쟁 승리 평가가 1987년12월 26일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게재됐다. 신문은 동아일보 캡처ⓒnewslibrary
6월 항쟁 승리 평가가 1987년12월 26일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게재됐다. 신문은 동아일보 캡처ⓒnewslibrary

 

“4·13 호헌조치 등 정치 상황에 좌절과 배신감을 느꼈고 朴군 사건에서 분노했던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동조시위형태로 참여, 대규모 시위가 연일 되풀이됐다. 경찰은 통제력을 잃고 마비됐다. 이 과정에서 계엄령 등 비상조치를 펴리라는 소문도 나돌아 온 국민은 긴장과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나 위기에 쫓긴 여당은 뜨겁게 달아오른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6·29 민주화 선언이라는 비장의 카드가 제시되자 온 나라에 들끓었던 격렬한 시위는 일단 막을 내렸다. 6월 항쟁은 유신독재 이래 짓밝혀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었고 국민의힘이 공권력을 굴복시킨 또 하나의 시민혁명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AP통신은 87년 아시아 10대 뉴스 가운데 한국의 민주화 시위와 6·29 선언을 톱뉴스로 선정했다. 
-1987.12.26. <동아일보> 기사 중-

 

6. 민추협의 정신과 양 날개 


“87 체제가 만들어졌을 때 벅찼겠네요.”, “그렇죠.”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헌법 개정에 참여한 실무자로서 갖는 소회는 남다를 법했다. “87년 개헌 헌법 만들 때 동교동, 상도동에서도 실무자로 참여했거든요. 동교동은 내가, 상도동은 신현기 씨가 전문위원을 맡았어요. 어르신들을 도우며 헌법 자료 모으고 토의하고, 지금도 헌법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합니다(웃음).”

- 민추협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과제에 대해서는요. 

“글쎄요. 역사적 의미나 부여는 학자들에게 넘기겠습니다.”

담백한 답변이 돌아왔다. 마무리하면서는 민추협 정신에 관한 이야기가 강조됐다. “요즘은 나눠 먹기라는 말이 나쁜 말로 돼 있잖아요. 근데 나눠 먹기만 잘해도 정치가 괜찮아요.” 신선했다. “요즘은 나눠 먹기도 못해요. 독식하려고만 해요.”

- 민추협 때는 어땠나요. 

“서로가 경쟁자라는 걸 인식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협력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모든 일을 공정하게 하면서 철저히 50대 50지분을 지켰어요. 행사할 때도 김대중 의장-김영삼 의장을 부르면, 그다음은 김영삼 의장-김대중 의장이라고 소개했어요. 한 분만 먼저 거론되면 불공정하잖아요.” 공동의장부터 말단 실무진까지 50대 50지분을 지켰다는 얘기였다. 양 진영은 누구 하나 주도권 없이 팽팽한 수평관계를 유지했다.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은요.” 이런저런 아쉬움이 전해졌다. “나눠 먹기만 해도 훌륭한 정치입니다.” 배려와 절제,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래요. 동등하다는 원칙이 무너지면 안 되요. 새는 양 날개로 가는 거예요. 한쪽으로만 가려면 떨어져 버리고 말아요. 그 정신이 민추협 핵심이죠. 안 그러면 오래 못 가요.“ 

후배 정치인들도 귀담아들으면 좋을 법했다. 5월 10일이면 새정부가 출범한다. 김대중 국민의정부에서 일했던 박주선·김한길·김영환·장성민도 윤 당선인을 도왔다. 어떻게 봤을까. 

그는 김상현의 ‘무경 정신’에 빗대 긍정의 마음을 내비쳤다. ‘네 편, 내 편 가르지 않고 포용한다.’ '무경'은 시인 신경림이 김상현에게 지어준 호다.

“윤 당선인도 인재를 폭넓게 쓰고 정책도 폭넓게 다뤘으면 좋겠어요.” 진영을 넘나드는 포용의 정치를 말했다. “민추협 정신처럼요?”, “네 민주협 정신처럼요.”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윤 당선인이 민추협 활동을 했던 정치 선배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자리를 한 번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겁니다. 국민통합에 도움될 겁니다."

듣고 있자니 하나의 바람이 생겨났다. “대통령 취임식도 통합이 최우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겠지요.” “민추엽이 역할을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떻게요?”

“취임식 행사에 민추협 인사들이 초청되는 것만으로도 상징적 의미가 클 것 같습니다.” “지금은 예전 만큼의 정치적 위상을 갖고 있지는 못하죠.” 현실 정치에서 멀어져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말로 들렸다. “어쨌든 진영을 초월해 존재하는 게 민추협이니까.” 쓸쓸함을 떼어버리듯 조언을 덧붙붙였다.

“통합의 정신이 말로만 끝나지 않고 실천되려면 민추협 같이 역사를 바꾸는 데 기여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는 있겠죠.” 

P.S. 안양시 동안구에서 6선을 지냈다. 젊은 시절 결혼을 약속했던 여성과 잘 안되면서 혼자다. 71세란 나이가 무색하게 젊다. 19대 국회부의장 이후 힐러리(힐러·치유+이씨 성의 합성어)로 통한다. 필리버스터 대치 정국 기간 갈등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이미지다. 이날 인터뷰도 편안한 분위기를 주도해 준 점이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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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사 2022-04-25 15:49:57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하던 그때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