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는 타협 없던 후농 김상현…‘통합’ 자산 남겼다 [정치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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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는 타협 없던 후농 김상현…‘통합’ 자산 남겼다 [정치읽기]
  • 정세운 기자
  • 승인 2022.04.24 09: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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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농 4주기 추모식, 부침의 정치역정 돌아보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후농 김상현은 50여 년 정치를 해 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형, 동생'하는 사이였지만 명분이 없는 곳엔 따라기 않았다. ⓔ시사오늘 김유종
후농 김상현은 50여 년 정치를 해 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형, 동생'하는 사이였지만 명분이 없는 곳엔 따라가지 않았다. ⓒ시사오늘 김유종

후농(後農) 김상현.
김상현은 19살 때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만나 정치를 시작했다. 지금의 DJ가 있기까지는 후농이 큰 역할을 했다.
1970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외교구락부에서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참여를 선언했을 때, DJ는 머뭇거렸다.

후농은 이때 “지금 나서야 할 때”라며 설득해, DJ의 ‘40대 기수론’ 동참 결심을 받아낸 주인공이다. 그리고 마침내 70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역전 드라마를 만들며 DJ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다. 그를 차기 지도자로 우뚝 세웠다.

하지만 그는 권노갑·한화갑·김옥두와는 달리 DJ사람은 아니었다. 50여 년간 정치를 하는 동안 DJ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이는 후농식 정치의 ‘정당성’ 때문이었다.

1984년 미국에 있던 DJ로부터 “참여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는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해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대국민 항복인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1985년 2·12 선거 돌풍의 근간이 돼 준 신민당 창당도 DJ 반대에도 불구하고 앞장섰다. 이 때문에 “후농이 공천 장사를 하기 위해 신당을 만들었다”고 주위에서 비아냥거렸다. 개의치 않았다.

1987년 DJ가 통일민주당을 깨고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에 나서자, “분열의 편에 서지 않겠다”며 DJ를 따라가지 않았다. 이처럼 후농은 DJ와 ‘형, 동생’하며 동고동락하는 사이였지만 명분이 없는 곳엔 따라가지 않았다.

이후 1990년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이 군부독재 정권의 모체인 민주정의당, 공화당과 합당을 선언하자 이를 야합으로 규정,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살아생전 후농은 필자를 만나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야권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연만으로 DJ를 쫒아갈 수 있느냐, 군부독재 정권의 모체인 정당들과 합당을 하는데 내 안위를 위해 YS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느냐.”

 

동교동과 상도동 오가며 '통합과 포용' 정치


후농 고(故) 김상현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권한대행의 4주기 추모식이 18일 경기도 파주시 소재 종로 나사렛 천주교 묘역에서 열리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제공)
후농 고(故) 김상현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권한대행의 4주기 추모식이 18일 경기도 파주시 소재 종로 나사렛 천주교 묘역에서 열리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제공)

후농은 1935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 14살 때 부친이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한국전쟁 때 세상과 등졌다.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 된 후농은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급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피를 팔아본 적도 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그래도 서울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3년 1학기까지 학업을 마칠 정도로 끈기가 있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마당발로 통했던 후농은 아무리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서도 버텨낼 저력을 만들며 돌파했다. DJ로부터 “그림 속의 과일도 꺼내 먹을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난관을 헤치고 나아가는 힘이 있었다.

그 힘 안에는 언제나 명분이 있었다. 특히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을지언정 행동하지 않았다. 삼선개헌과 유신 반대투쟁,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독재정권으로부터 5년여의 옥고와 17년간의 공민권 박탈, 73차례의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불의에는 눈감지 않았다. 또 호남사람이었지만, DJ를 따라가지 않을 만큼 소신 있게 정치를 해왔다.

1980년 감옥에서 만난 고은 시인이 “인생 전반에는 고생이 많으니 후반엔 수확을 많이 하라”며 지어줬다는 그의 호(號) 후농. 그는 “그 흔한 사무총장 한 번 못 해봤으니 인생 후반기에도 수확을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사람 만나는 것과 말하기를 유독 좋아했던 후농은 필자와 만나서도 “재밌는 정치비화 얘기해 줄까”라며 정치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하지만 인생 말년에 입을 닫았다. ‘실어증을 앓는 것 같다’며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2022년 4월 18일은 후농이 작고한지 4년째 되는 날이다.

갈등의 시간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 ‘통합과 포용’이 시대정신일 수밖에 없다면 그의 정치적 자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분열과는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정치 반세기. ‘후농의 신념’, 살아서는 거두지 못했던 수확, 사후에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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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9단 2022-04-24 17:41:27
작금의 정치인들이 후농의 정신을 본 받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