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김대중, 여소야대 국면 어떻게 돌파했나 [옛날신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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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김대중, 여소야대 국면 어떻게 돌파했나 [옛날신문 보기]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2.04.26 1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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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민정당 125석·야3당 164석…김대중, DJP연합 122석·한나라당 163석
1990년 민정·민주(YS)·공화(JP) 3당 합당…1998년 ‘의원 빼오기’ 여소야대 돌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김자영 기자)

ⓒ 시사오늘 김유종
<시사오늘>은 과거 노태우·김대중 정권이 여소야대 국면을 돌파한 방법에 대해 살펴봤다. ⓒ 시사오늘 김유종

새 정부 출범이 보름도 남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하면 국회는 역대급 여소야대 구도로 재편될 예정이다. 지난 20일 기준 제21대 국회 300석 중 국민의힘 의석수는 113석(36.7%)에 불과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171석(57%)을 차지하고 있다. 국정 운영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원장도 지난 18일 “여소야대 상황에서 입법이 쉽지 않고 정책 수단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과거 노태우·김대중 정부도 같은 상황에서 출범했다. <시사오늘>은 과거 정권이 여소야대 국면을 돌파한 방법에 대해 살펴봤다. 이들은 각각 3당 합당·야당 의원 영입을 통한 정계개편으로 ‘여소야대’ 위기를 돌파했다. 

 

노태우 정부, 총리 임명·국회 법안 통과에 장애물
민정·민주(YS)·공화(JP) 3당 합당으로 여소야대 돌파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취임한 1988년 2월 25일 이후, 4월 26일에 치러졌다. 원래대로라면 국회의원 임기가 4년임에 따라 1989년 치러졌어야 하지만 6월 항쟁으로 1987년 헌법이 개정되며 조기 실시됐다. 

총선 결과,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전체 의석 299석 가운데 125석을 차지했다. 야당에서는 각각 김대중(DJ) 총재가 이끈 평화민주당이 70석, 김영삼(YS) 총재의 통일민주당이 59석, 김종필(JP)의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얻었다. 야3당 의석을 합하면 164석으로 과반이 넘는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됐다.

13대 국회는 여소야대로 인한 부침을 겪었다. 야권이 국회를 장악해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임명해도 부결시킬 수 있게 됐다. 실제로 노태우 대통령이 대법원장으로 내정한 정기승 대법원 판사에 의한 임명동의안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부결됐다. 반면 국정감사 및 조사법안과 증언감정법 개정안은 여당인 민정당이 반대했으나 통과됐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 얘기 좀 들어주세요.”
지난 해 정기국회 마지막날인 12월 17일, 민정당의 장경우 의원이 야당 측의 일방적인 국정감사보고서채택에 항의하면서 한 발언이다.

장 의원의 발언이 시작되자마자 야당의석에서 고함과 야유가 터져 나왔고 “소수의견을 존중해달라”는 여당의원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은 소란 속에 묻힌 채 여소야대의 위상만을 극명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4·26 총선 결과 탄생한 여소야대의 정국구도는 지난 1년간 우리 정치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의 물결을 몰고왔다. 

국회가 행정부의 시녀나 통법부라는 오명을 씻고 행정부의 독주와 전횡을 견제하는 본래의 권능을 회복했다. 특히 3야 공조체제가 강회되면서 소여를 무력화시켜 의정의 주도권이 여에서 야로, 정확히는 3金씨의 장중으로 넘어갔으며 힘의 중심이 원내로 모아졌다. 

여소야대의 위력은 개원국회에서부터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여당이 독차지했던 16개의 상임위원장 자리 중 절반이 넘는 9개가 야 3당에 할양됐고 국정감·조사권이 부활돼 날개를 달았다. 여기에 청문회제도가 도입되고 5공·광주 등 각종 특위를 구성, 소위 5공청산정국의 막을 활짝 열었다. 과거 같으면 요식절차에 불과했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의 부결은 야대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건이며 대행정부견제 1호를 기록했다.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행사했던 인사권마저 민의와 적법절차를 존중해야 함은 물론 야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야 3당이 주도해서 통과시킨 개원국회때의 국정감사법, 증언·감정법과 정기국회 때의 해직공직자 보상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라는 최수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1989년 2월 21일자 <경향신문> 6공 1년 빛과 그림자 (2) 표류하는 '여소야대' 중-


여소야대 국면에서 기존 집권 여당에서 독차지했던 국회부의장,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처음 만들어졌고 법률 및 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이 협상해야만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노 대통령과 민정당은 5공 비리 공개, 투기 열풍, 물가 상승 등 문제와 맞물려 입지가 불안정했다. 이에 청와대를 중심으로 정계 개편 움직임이 시작됐다. 

민정당과 공화당 합당이 먼저 논의됐다. 1989년 3월 김종필이 노태우와 3시간에 걸친 회담을 통해 합당을 제안했다. 그는 1988년 6월 6개국 대사 초청 오찬, 8월 미국 방문에서도 누차 보혁 구도의 보수대연합을 강조한 바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이 아닌 공화당과의 합당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제안으로 정계 개편 움직임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박철언 보좌관은 노 대통령에게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정당과 공화당의 양당 합당을 위한 논의가 비밀리에 시작됐다. (중략) 하지만 통합을 위한 작업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당시 공안 사건이 속출하기도 했지만 노 대통령이 최종 결단을 내리지 않은 채 시간을 끌면서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그 이유는 한참 시간이 흘러 합당이 성사되기 전에 알았다. 나의 합당 제안 사실을 들은 박철언 보좌관이 “이왕 야당하고 합당할 거면 민주당을 끌어들여 거대 여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노 대통령을 설득했다. 박철언은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이다. 처음엔 양당 통합만을 생각했던 노 대통령은 박철언 설득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대권 집념이 누구 못지않게 강한 김영삼 총재로서는 반길 만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나와 노 대통령이 합당에 뜻을 모은 지 한 달 쯤 뒤부터 박철언은 민주당과 합당 논의를 별도로 진행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내게 귀띔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짐작으로만 청와대 쪽 기류가 달라졌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51~153쪽.

1989년 6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과의 회담에서 정책 연합을 제안했다. 김영삼은 5공 청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정계개편을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김영삼은 “정책연합이 하니라 합당을 해야 한다”는 말로 제안을 거절했다. 노 대통령은 DJ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DJ는 “여당과 합친다면 내 입장이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시간이 흘러 1990년 1월 12일 노태우와 김영삼이 만나 다시 정계개편 문제를 논의했다. 1989년 12월 전두환의 국회 증언이 이루어지며 여야합의에 의한 5공청산이 일단락된 시점이었다.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원만한 정국운영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며 정책 연합을 다시 제의했다. 김영삼은 “5공 청산이 종결된 지금 국민의 불안을 없애려면 민정당의 간판을 내리고 전혀 새로운 신당으로 합당을 하는 방법 뿐”이라며 노태우에게 최종 결심이 서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이후 1월 22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아침 10시부터 9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담을 갖고 3당의 통합을 선언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로써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그 결과 여당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 국정 운영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다. 

정동성 총무는 11일 있은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평민당과 연정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으나 김 총재가 “나는 하고 싶으나 주변 때문에 곤란하다”는 거부 의사를 밝힘으로써 무산됐다고 당시 여권의 선택 가변성을 예시 … 평민당이 민정당의 연정 파트너에서 제외되자 민정·민주·공화 통합 움직임은 급진전하기 시작. 

1990년 1월 22일자 <경향신문> 「3金野大(김야대)」탄생부터 붕괴 조짐

헌정사상 처음으로 계엄령이나 강제력에 의하지 아니한 여야통합 신당이 민정·민주·공화 3당에 의해 창당된다.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22일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전격 회동, 3당 통합차원의 신당 창당추진에 합의하고 각 당 별 5인씩 15명으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 3당 통합 신당이 현재의 원내 의석 분포를 그대로 가진 채 진행된다면 신당은 총 221석(민정 127석·민주 59석·공화 35석)을 확보, 개헌선인 원내 3분의 2 의석 이상을 확보하게 된다. … 노 대통령은 이날 이른바 범보수연합의 3당 통합원칙에 합의함에 따라 오는 2월 말 또는 3월 초쯤 민주 공화당 인사들이 대거참여하는 내각개편을 단행할 것으로 보이며 금년 상반기에 실시될 지방의회선거도 일부 주장과는 달리 시한내에 실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 동아일보, 1990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 민정·민주·공화 통합 신당 선언 중-

 

김대중 정부, ‘야당 의원 빼오기’ 전략
한나라당→새정치국민회의, 총리서리 강행


1998년 5월 4일자 <매일경제> 여소야대 붕괴 이번주 고비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DJ는 DJP(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자민련 김종필) 연합을 이뤄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국민의정부가 출범했다. 재보궐선거를 거친 15대 국회는 한나라당이 163석,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 자유민주연합이 43석을 차지했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은 합쳐도 122석에 불과했다. 야당에 비해 40석 이상 모자라는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됐다. 

여소야대 국회 구성으로 국정운영이 어렵다며 DJ는 정개개편을 논의했다. 이를 위해 무소속과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끌어들이는 등 ‘의원 빼오기’ 전략을 폈다. 
 

이의익·이완구 의원의 탈당으로 ‘과반수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나라당이 추가 탈당 방지에 부심하고 있다. 반면 여권은 한나라당을 금주중 ‘과반 이하 정당’으로 끌어내리기로 하고 영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한나라당 소속 의원은 150명. 과반선인 146석까지는 단지 4석만을 남기고 있는 상태다. …

임시국회 회기 중 과반이 무너지게 되면 한나라당의 대여 투쟁 기조가 상당히 꺾이게 되며 차기 원구성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을 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정가에서는 한나라당 의원 4명이 추가 탈당할 경우 정국 구도가 일순간에 바뀌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여권은 한나라당 의원의 영입을 계속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회의의 한 고위 당직자는 “조만간 한나라당 의원 4~5명이 추가 입당할 것”이라며 “금주 중 과반수가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5월 4일자 <매일경제> 여소야대 붕괴 이번주 고비 중-

 

국민의정부 당시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된 JP는 국회 인준을 받는 데 약 6개월이 걸렸다.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임명안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헌법에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돼 총리 임명에 반드시 국회동의가 필요하지만 반대에 부딪친 김 전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서리’ 임명을 감행했다. 총리서리제는 헌법상 규정되지 않았지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까지 여러차례 답습된 관행이었다.
 

1998년 2월 26일자 <조선일보> “총리 서리 검토”에 야(野) “위헌”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br>
1998년 2월 26일자 <조선일보> “총리 서리 검토”에 야(野) “위헌”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한나라당의 불참으로 국회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동의안이 처리되지 못한 25일 저녁, 김대중 대통령과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 박태준 총재는 일단 2~3일을 더 기다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야당에 대해 비난이 집중되는 국민 여론을 지렛대로 삼아 야당을 좀 더 설득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권이 아무리 간곡히 협조를 당부한다고 해도 쉽게 응해줄 것 같지 않은 게 이날까지의 야당 분위기이다. 따라서 여권은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경우 일단 총리서리체제로 출범해, 장관도 총리서리의 제청을 받아 임명하는 방안을 깊이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2월 26일자 <조선일보> “총리 서리 검토”에 야(野) “위헌”

 

간략하게나마 ‘노태우-김대중 정부’는 여소야대 국면을 어떻게 돌파했는지에 대해 살펴봤다. 20대 대선을 통해 당선된 윤석열 정부는 0.73%라는 역대 초박빙 끝에 출범한다는 유례없는 기록을 갖게 됐다. 역대급 여소야대 국면 속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잃거나 협치에 실패 또는 여론전에서 밀리면 식물정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과거를 반추삼아 새 정부는 어떻게 여소야대 국면을 돌파해 나갈 수 있을까. 궁금한 가운데 박상병 인하대 교수는 25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여소야대 정국에서 민주당의 협조 없이 국정 운영 자체가 불가하다. 야당과 주고받는 식의 절충적 타협안을 찾아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했다. 일례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같은 경우에도 “민주당이 추진하는 의중을 무조건 반영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이냐에 대한 정치적 협상력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여론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정부 입장을 충분히 국민에게 설명하고 알려서 민주당한테 여론의 두려움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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