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전 대통령 양산으로…역대 대통령 퇴임 후 어땠나? [옛날신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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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전 대통령 양산으로…역대 대통령 퇴임 후 어땠나? [옛날신문보기]
  • 박지훈 기자
  • 승인 2022.06.08 2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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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하와이로…윤보선, 퇴임 후 정치계 다시 발들여
최규하, 국정자무회의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거쳐
전두환, 퇴임 후 노태우와 함께 구속, 무기징역 선고
김영삼, 정치 원로 복귀, 김대중, 30% 지지 받으며 퇴장
노무현, 소탈한 모습으로 인기, 이명박, 퇴임 후 옥살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박지훈 기자]

시사오늘
<시사오늘>은 역대 대통령의 퇴임 후 단면을 ‘옛날신문 보기를 통해 살펴봤다.ⓒ 시사오늘(그래픽 : 김유종 기자)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달 9일 임기를 마치고 경남 양산으로 내려갔다. 19대 대통령이던 그는 이제 '시민 문재인'이 됐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퇴임 후 모습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대통령은 12명 중 5명으로 절반이다. 퇴임 후가 좋지 못했던 대통령들도 적지 않다. <시사오늘>은 역대 대통령의 퇴임 후 단면을 살펴봤다.

 

이승만, 퇴임 후 하와이로 망명…타지에서 병사 후 국립현충원 안치
윤보선, 퇴임 후 정치계 다시 발들여…박정희에게 대통령 선거 패배


이승만 전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로 인해 일어난 4·19 혁명의 결과로 1960년 4월 28일, 대통령 직에서 내려왔다. 하야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외이로 망명을 갔다.

1960년 5월 29일자 조선일보 이승만 박사 하와이로 망명ⓒ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60년 5월 29일자 <조선일보> 이승만 박사 하와이로 망명ⓒ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29일 아침 극비에 출발. 김포공항 허수반 이 외무차관이 전송 정부서 여권과 전세기 알선. 4월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승만 박사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29일 58시 30분 극비리에 C80 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이날 이박사 부처는 새벽 6시 30분 조반도 잃고 이화장의 경비원들에게 "집들 잘 보고있어"라며, 김포공항으로 떠났다. 공항에는 정 국무위원과 이시영 외무차관만이 그를 전송했으며, 이박사부처는 정부측에서 특별전세로 마련한 C80기에 올라 그가 일제 때 망명생활을 한 하와이로 다시 돌아가게된 것이다. 

이박사가 이날 극비리에 떠나게 된 것은 허정 수석국무위원의 적극적인 알선으로 28일 하룻동안에 외교관 여권을 발급하고 체미비 등의 일체환불조치를 마쳤으며 미국대사관으로부터 1년 간의 효력을 갖는 비자를 얻어 이박사에게 수교한 것이라 한다. 주한미대사관 당국에 의하면 이번 이박사의 망명은 전적으로 한국정부의 주선에 의한 것이라며 동사증은 기한만료 후 다시 연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박사가 이날 떠나게끔 된 것은 수일전부터 허장관과 미대사 사이에 수차례 걸쳐 충분히 협의됐던 것이며, 27일 하오 30분 간에 걸친 양자비밀회담에서 모든 계획에 완전히 합의를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허장관은 이날 아침 그의 전송을 하고 돌아온 후 이박사의 도미는 망명이냐 휴양이냐는 기자의 "3개월 동안의 휴양으로 믿는다"고 말하고 그 밖의 질문에는 일절언급을 거절했다."

-1960년 5월 29일자 <조선일보> 중-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발소 갈 돈을 아끼면서 비행기 값을 모았으나, 주치의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생을 마쳤다. 이후 같은 달 27일, 그리워하던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됐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마지막 의원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퇴임 후 정치활동을 했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 대통령 궁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꿨다. 5·16 쿠데타가 발생한지 약 1년 후인 1962년 3월 24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사임 후에도 신민당을 규합한 뒤, 민정당을 창당해 정치활동을 이어나갔다. 1963년 5대 대선에 도전했지만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1967년 6대 대선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또다시 박정희에게 패배하고 만다.
 

"신민당 대통령후보로서 5·3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씨는 정계일선에서 후퇴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6일 알려졌다. 윤씨는 6일 오전 윤제술, 이재형, 조한백, 정해영, 김재광, 정운갑, 신태악, 김수한씨 등 신한계 측근들을 안국동 자택으로 불러 이와같은 뜻을 밝히면서,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도 후보로 나서지 않고 오는 9월에 있을 전당대회때도 당지도직을 맡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고 한 소식통이 정했다. 그러나 윤씨는 이날 오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만일 지역구 공천후보자가 나의 지원유설을 원한다면 전국에 걸쳐 유세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5·3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패배한 사람으로서 무어라고 말하고 싶지 않으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7일 지구당위원장회의에 서 논의될 것"이라며, "그러나 이번 선거가 정부-여당의 부정에 의한 것이라는 여러가지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윤보선씨는 이번 선거결과에 대해 앞으로 신민당이 선거소송 등 선거무효화 투쟁을 벌일 방안을 구상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지난 선거때 내가 제소한 은송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소송이 "비록 대통령의 당락에 현실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음 선거를 위해서는 필요한일"이라고 말했다.

윤씨는 이날밤 유진오 대표위원과 국회의원 선거대책기구 구성문제를 협의하면서도 유대표에게 계속 강력히 당지도를 맡아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알렸다."

-1967년 5월 7일 <조선일보> 윤보선씨 일선에서 후퇴


이렇듯 군부정권에 맞서는 행보를 보였지만, 제5공화국 들어 전두환에게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해 민주주의 진영에선 변절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윤보선 전 대통령은 1990년 7월 18일,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자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한 뒤, 영구적인 집권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부하였던 김재규가 쏜 총탄에 피격당해 약 16년의 집권을 끝마치게 됐다.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피살된 대통령이다.

 

최규하, 퇴임 후 국정자문회의 민족사바로찾기 거쳐
전두환, 퇴임 후 노태우와 함께 구속, 무기징역 선고 
노태우, 친구 전두환과 함께 구속…사면 뒤 칩거생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8개월이라는 가장 짧은 임기를 보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국무총리직을 맡던 중, 박정희의 서거 후 권한 대행으로 활동했다.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으나, 같은 해 신군부가 12·12사태를 일으키며 8개월 만에 사임했다. 이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을 지내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검소한 삶을 살다가 2006년 10월 22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전두환 씨는 12·12 군사정변과, 5·17 쿠데타 등 총 2번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의 독재는 1987년 6·10 민주항쟁에 부딪혀 종식됐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1995년 경찰에 구속된다.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정호영 무기징역."

"5일 오후 김상희 부장검사가 1시간여에 걸친 논고문 낭독에 이어 피고인별 구형을 마치자마자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의 한쪽에선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오후 공판이 시작되기 전 법정에 들어와 큰소리로 "전두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니…"라며 안타까워하던 아주머니를 포함해 광주에서 온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반응이었다."

1996년 8월 6일 <한겨레> “전두환 사형” 대법원 박수세례


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등 13가지 범죄사실을 바탕으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했다.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정부 막바지에 사면된 뒤, SBS와의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등 물의를 일으켰다. 2021년 11월 23일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뒤 그대로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24일 퇴임했다. 이후 문민정부가 내세웠던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1995년 11월 1일 경찰에 구속됐다. 1997년 대법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악 원을 선고했다.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노 전 대통령 역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다. 전두환과 함께 사면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칩거 생활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2021년 10월 26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과 마찰 후 정치 원로로 복귀해
김대중, 30%의 지지 받으며 퇴장…보수정권 비판일색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대통령으로 취임 후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등 현대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뒤 1998년 2월 24일 퇴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6년 한국일보 창간 특별회견에서 "매일매일 국정 수행에 몰입하다 보니 퇴임 후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며 "다만 질문이 나왔으니 대답하자면, 퇴임하면 늘 고마운 상도동의 이웃들과 함께 조용히 지낼 생각"

김영삼 전 대통령은 26일 김대중 대통령의 내각제 개헌 연기를 장기집권음모로 규정하고 "김대중씨의 정치적 임기 만료와 더불어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투쟁을 본격화하려 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서울 자택에서 퇴임 후 첫 공식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씨 자신이 올해 말까지만 대통령을 하겠다고 국민 앞에 다짐과 약속을 했다"며, "이 약속을 파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임기 말에 내각제 개헌을 하려는 것은, 임기는 임기대로 채우고 그 후는 내각제를 통한 장기집권을 꿈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는 최근 민주산악회 재건 등 정치적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이 정치복귀를 선언한 것으로, 그가 내년 총선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할 것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1999년 7월 27일 <조선일보> 김영삼씨 정치복귀 선언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김대중계와 마찰을 빚으며 퇴임 1년 만에 정치계 원로로 복귀해 활발히 활동을 이어나갔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엔 공개적으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2015년 11월 21일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증으로 서거했다.

1998년 정권을 잡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북 유화책인 햇볕정책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3년 2월 2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30%대의 준수한 지지율을 기록하며 퇴임했다.
 

권양숙 여사 위로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권양숙 여사 위로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8일 오전 11시께 서울역 앞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후퇴했다"고 현 정부를 비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서울역 분향소로 나와 노 전 대통령의 영전 앞에 헌화를 한 뒤 묵념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직접 분향소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전 대통령은 당초 봉하마을을 조문하려 했으나 먼 거리와 건강상 이유로 서울역을 찾았다."

2009년 5월 28일 <오마이뉴스> DJ "그의 치욕·좌절 생각하면, 나라도 결단했을 것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랬듯, 원로 정치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그의 장례식장에 찾아가 조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3개월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무현, 소탈한 모습으로 인기…피비린내 나는 전 대통령 잔혹사 시작
이명박, 퇴임 후 해외 돌며 개인사업 몰두…문재인 정권 들어와 구속 


노무현의 퇴임 이후, 잔혹사가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2월 24일, 임기를 마친 뒤 경남 김해시에 위치한 봉하마을로 돌아왔다. 서민적인 소탈한 삶은 도리어 국민들에게 긍정적으로 비쳐줘 수많은 관광객들이 봉하마을을 방문하곤 했다. 그러나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됐고, 수사의 그물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향했다. 수사가 진행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5월 23일 투신하여 삶을 마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24일 퇴임 후 개인 사무실을 마련한 뒤, 재단활동과 개인사업에 몰두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했으며, 박근혜 정부와 대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국정원 특활비 수수르 시작으로 각종 뇌물수수와 횡령이 들어나면서 3월 23일 구속됐다. 2020년 10월 29일 대법원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대통령에게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 원, 추징금 57억8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현재까지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안양교도소에 수감돼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가운데, 다시 정권은 보수정당에게 넘어갔다. 일각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잔혹사가 반복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정세운 정치 평론가는 대통령 잔혹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선 "진영논리와 내로남불을 멀리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중도정치를 실현해야한다"고 평했다.

담당업무 : 정경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확실하고 공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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