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고문관은 괴롭혀도 되는 사람인가’
스크롤 이동 상태바
[기자수첩] ‘고문관은 괴롭혀도 되는 사람인가’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2.05.13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M벡셀 직장 내 괴롭힘 의혹③〉고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 pixabay
ⓒ pixabay

군(軍)시절 얘기다. 함께 일한 병사 중에 존재감이 굉장히 남다른 선임이 있었다. 전화기를 거꾸로 들어 송화기에 귀를 대고 수화기에 말을 하기 일쑤였고, 근무지 특성상 배달음식을 시켜먹을 때가 많았는데 포장랩 위에 짜장과 탕수육 소스를 그대로 붓는 경우도 잦았다. 업무 실수 역시 상당했고, 훈련 시 잘 따라오지 못해 상급자로부터 태도가 불량하다는 지적도 수차례 받았다. 무엇보다 영악했다. 좀 모자라 보이는 외면을 적극 활용해 더 먹고, 덜 일하고, 많이 쉬고, 적게 움직였다. 그가 해야 할 일들이 나를 비롯한 같은 부대·근무지 선후임들에게 돌아갔다. 중대장은 그를 관심병사로 분류했다. 후임인 나에게 오히려 그를 돌봐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렇다. 그는 일명 '고문관'(업무 수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다른 병사들의 발목까지 잡는 사람)이었다. 다만, 실제 병영현장에서는 앞선 경우처럼 무능, 부적응으로 인해 고문관으로 인식되는 사례보다는 가혹행위를 일삼은 가해자가 스스로를 변호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고자 피해자에게 고문관 낙인을 찍는 경우가 대다수다.

2018년 정부가 직장 내 괴롭힘 근절 대책을 발표하고, 국회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긴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다뤘을 당시 산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아니라 '고문관 보호법'이라는 원성이 자자했다. 어느 조직이든 능력이 부족하거나 근무 태도가 불량하고 부서·동료간 업무에 비협조적이거나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제 그런 인원이 직장 내 괴롭힘을 내세워 법적 대응을 운운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는 이유에서다. 조직문화와 사무실 분위기를 흐리는 직원에게 상사가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고, 저성과자와 부적응자를 승진 명단에서 제외하거나 한직으로 발령을 보내기도 부담스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국민여론은 긍정적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일부 발생하더라도,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 우위를 이용해 노동자에게 피해를 주는 걸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보호장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것이다. 실제 노동현장에선 끊임없이 구성원간 경쟁이 이뤄지고, 승진과 수익 등 여러 이해관계가 존재하기에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를 부적응자로 몰아세우며 고문관 낙인을 찍는 사례가 상당하다는 측면도 2019년 법 본격 시행에 영향을 줬다.

SM벡셀 직장 내 괴롭힘 의혹을 두 차례에 걸쳐 다뤘다. 제보자, 사측, 그리고 여러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취재를 진행할 때마다 고민이 컸다. 가장 큰 고민은 '파장'이었다. 이 같은 일이 언론을 통해 기사로 다뤄지면 회사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명예가 실추될 수밖에 없고, 제보자 역시 앞으로 더 힘겨운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다음 고민은 '진실'이었다. 제보자는 자신이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고, 수년간 지속된 괴롭힘에 따른 스트레스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졌다고 호소했다. 반대로 사측은 직장 내 괴롭힘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제보자가 업무 지시를 불이행해 회사에 손실을 끼쳤고 동료간 공포감을 조성해 조직문화와 사무실을 흐렸다고 토로했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인지, 아니면 제도를 악용하려는 사람인지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가정을 해 봤다. 

사측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제보자는 회사에 금전적 피해를 입힐 정도로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직장 부적응자이자 주변 동료들의 업무 분위기에도 악영향을 주는 일종의 고문관이다. 여기에 객관성이 입증된 세 가지 자료를 가정의 상수로 적용했다. 2020년 10월 8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징계 판정, 2021년 10월 21일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업무상질병 인정, 그리고 제보자가 제시한 2020년 4월 10일 SM벡셀 서울사무소 대회의실 녹취록이다. 사측은 고문관인 제보자에게 무급 정직 3개월 징계 처분을 내렸는데, 관계당국은 이를 부당한 정직이라고 판단했다. 제도를 악용하려는 고문관인 제보자가 산업재해 요양급여를 신청했는데, 관계당국은 산재보험을 승인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이 있기 전인 2020년 4월 10일 사측(임원)은 제보자를 비롯한 전(全)직원이 모인 대회의실에서 고문관인 제보자의 이름을 거론하며 '안 좋은 레퍼런스'와 '자리 이동', '업무 중단', '인사 명령 예고' 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사측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이 같은 상수를 반영하면 △제보자는 비록 고문관이지만 그에게 내려진 징계는 부당했다 △제보자는 직장 내 괴롭힘 때문이 아니라 고문관이어서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아 적응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산재로 인정받았다 △모든 직원 앞에서 고문관인 제보자의 업무 수행 능력에 대해 발언한 건 사실이나 괴롭힘으로 여겨질 정도는 아니었다 등으로 정리된다. 아울러 사측 주장대로면 회사에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 한 가지 변수를 적용해야만 했다. △회사는 괴롭힘이라 판단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고문관인 제보자는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거명하며 지적한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게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는지 문제는 관계당국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입었다고 느낀 것 자체에 대해선 주관적 영역이기에 진실 여부를 따질 수 없다.

결국 이런 질문과 직면하게 됐다. '고문관은 괴롭혀도 되는 사람인가?' 제보자가 제도를 악용하는 고문관이라고 판단했다면 사측에선 괴롭힘 피해를 주장할 여지를 주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여지를 줬고 회사 입장에선 그게 실착이었다. 부당징계 판정, 산재 인정 등 객관성이 입증된 사실관계들도 사측 주장의 설득력을 떨어뜨렸다. 다른 한편으론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해 2월 노동법적으로 무척 의미가 있는 판례(2018다253680)가 나온 바 있다. △공정한 인사평가를 통한 저성과자 선정 △저성과자의 업무 능력 개선을 위한 사용자의 노력 △사용자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근로자의 성과가 개선되지 않은 사실 △이에 따라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사정 등이 있다면 저성과를 명분으로 한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대법원이 내린 것이다. 비록 지난한 일이 되겠지만 회사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이 같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해고 통보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다. 다시 '고문관은 괴롭혀도 되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으로 돌아갔고 필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였다. 고민을 마치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번 기자수첩을 끝으로 〈SM벡셀 직장 내 괴롭힘 의혹〉을 마친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 및 유통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