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계 ‘물가변동 배제특약’ 지적에…하청업체는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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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계 ‘물가변동 배제특약’ 지적에…하청업체는 ‘비웃는다’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2.05.2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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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코로나19 사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최근 원자재 가격이 치솟자 국내 건설업계가 정부에 '물가변동 배제 부당특약'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업계 밑바닥에선 대형·중견 건설사부터 먼저 시정하라는 반응이 나온다.

지난 25일 전국건설기업노동조합은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민간공사 불공정 계약 관행 개선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민간 발주공사는 대개 공사도급계약서에 물가 상승으로 인한 계약금액 조정 조항이 없거나, 심지어 배제하는 특약이 존재해 물가 인상에 대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며 "국토교통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건설자재 가격 폭등을 외면한 물가변동 배제특약이 포함된 민간공사 불공정 계약을 근절하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노조는 "수주산업인 건설업은 선(先)계약·후(後)시공으로 이뤄진다. 수주를 하기 위해 물가 인상을 반영해 계약할 수 없는 구조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공공공사의 경우 현행법에서 도급계약 이후 물가 상승을 반영한 계약 변경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공사 물량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민간공사는 그렇지 않다"며 "발주자가 갑인 상황에서 공사 수주를 위해 불공정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관행이 존재해 왔다. 건설업체들은 소비자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하기에 일상적 물가 상승을 감내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과도한 물가 상승을 견뎌낼 기업은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어느 건설사든 산업 전반에 퍼져있는 불합리한 관행을 깨겠다고 혼자 나선다면 앞으로 영업을 포기하는 행위가 될 것이기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며 "불법적이고 탈법적인 불공정 관행이 지속된 이유는 이를 알고도 묵인한 국토부와 공정위에게 책임이 있다. 법을 지키고 불법을 감시해야 하는 정부 관계부처들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잘못된 관행을 근절시키기 위해 그 역할을 다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들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경험하며 기업의 경영악화는 대주주·경영진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책임이 전가돼 온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또다시 책임 전가를 당하며 길거리에 나앉지 않기 위해 불법적 불공정 관행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며 "공정위는 기업들이 더 부실화되지 않도록 기존 민간공사 불공정 계약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대안을 마련하라. 국토부는 현재 건자재 가격 폭등 상황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라"고 덧붙였다.

노조의 말대로 물가변동 배제특약은 건설산업기본법에서 금지하는 부당특약이다. 동 법에선 '계약체결 이후 설계변경, 경제상황의 변동에 따라 발생하는 계약금액의 변경을 상당한 이유 없이 인정하지 않거나 그 부담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경우 그 부분에 한정해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단, 공공공사에서만 적용된다. 국토부는 해당 조항을 인용해 민간공사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물가변동 배제특약이 무효가 될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다만, 이에 대해 노조는 "실제 현장에서 소송을 통해 피해를 보상받으라는 책임회피식 행정"이라고 바판하고 있다. 발주사-건설사 간 갑을관계에서 개별 소송으로 해결하기 쉽지 않으니, 정부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주장이다.

전국건설기업노동조합은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민간공사 불공정 계약 관행 개선을 위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 전국건설기업노조
전국건설기업노동조합은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민간공사 불공정 계약 관행 개선을 위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 전국건설기업노조

이와 관련, 대형·중견 건설사들과 하도급계약을 맺고 있는 중소기업들 사이에선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 섞인 반응이 나온다. 협력사들에게 물가변동 배제 부당특약을 들이미는 건설업체 관계자들이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도급거래공정화에관한법률(하도급법) 제3조의 4에는 '원사업자는 수급사업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계약조건을 설정해선 안 된다'고 명시돼 있으며, 이에 따라 원청업체는 하청업체에게 물가나 노임 변동에 따른 하도급대금 조정을 제한하는 계약 조건을 달아선 안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부당특약은 업계 전반에 깊게 뿌리 내린 실정이다.

실제로 포스코건설은 성우이앤씨 등 협력업체 60곳에 대해 '계약 후 인건비·자재비 상승으로 인한 공사비에 대한 설계변경은 없으므로 이를 고려해 견적해야 한다', '물가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등 부당특약을 설정해 2021년 공정위로부터 과징금 1400만 원을 부과받았다. 같은 해 대명종합건설도 '단가는 공사완료 시까지의 물가·노임변동 사항을 고려해 을이 정한 것으로 준공시까지 계약단가에 대한 물가 변동으로 인한 Escalation은 없다'는 조건을 달은 사실이 공정위로부터 적발돼 물의를 빚었다. 이밖에도 대성물류건설, 유림건설, 동원건설산업, 금호건설, 금강건설, 동양건설산업 등도 부당특약 설정이라는 불공정하도급거래행위를 자행해 최근 3년 내 경고 처분을 받은 건설사들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형 건설사 협력사 대표는 "신문 기사를 보고 비웃음부터 나왔다. 물가 올라도 금액 변경은 안 된다고 갑질을 할 때는 언제고, 저런 주장을 펼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걸 보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협력업체 관계자도 "우리가 항변을 하면 법대로 하라, 공정위에 신고하라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이제 본인들이 어려우니까 민사로 풀지 않게 정부에서 나서달라고 한다.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광경"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에 대해선 업체들도 할 말이 있다는 입장이다. 한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용역을 받아서 수행하는 공사가 대부분인데, 발주처에서 증액을 안 해주면 협력업체에도 증액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런 얘기 같다. 아마도 건설사들이 직접 나서면 이런 반응들이 나올 게 당연하기 때문에 특정 노조에서 총대를 메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업계 내에선 대형·중견기업, 중소기업 모두 웃을 수 있는 동시에 불공정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선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건산법, 하도급법 등에 공공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부당특약 효력을 원천 무효화하는 내용을 담는 게 근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하도급법에서만 입법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부당특약 효력 무효화법 관련 논의를 전반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권력분립·사적자치 위배 등 부당특약 효력 무효화로 인한 문제보다 효력이 유효할 경우 발생하는 법적 문제와 사회적 부작용이 더 크다"고 했다.

한편, 윤석열 정부는 공식 출범에 앞서 부당특약 사법상 효력 무효화 법제화, 표준계약서·표준하도급계약서 마련·사용 의무화 등에 힘을 쏟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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