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정치, 성공하고 싶다면…‘YS-DJ, 공부해야’ [옛날신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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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정치, 성공하고 싶다면…‘YS-DJ, 공부해야’ [옛날신문 보기]
  • 박지훈 기자
  • 승인 2022.06.19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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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청년 정치인들이 대거 당선, 앞으로 활약상 ‘주목’
청년 김영삼-김대중으로 배우는 청년 정치가 나아가야할 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박지훈 기자]

시사오늘 김유종
<시사오늘>은 청년 정치인의 대표 사례와 오늘날 반추해볼 지점을 옛날신문보기를 통해 되짚어본다.ⓒ시사오늘 김유종

'청년'이라는 의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정계에서도 이들을 향한 러브콜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 8대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는 거대양당의 수장이 MZ세대를 대표했으며 당선된 지방의원 중 10%가 2030 청년이었다. 7대 지선 대비 170% 늘어난 것만 봐도 청년들의 정치진입로가 그만큼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만들어갈 활약상이 궁금한 가운데 <시사오늘>은 청년 정치인의 대표 사례와 오늘날 반추해볼 지점을 옛날신문보기를 통해 되짚어본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두 거인, 양김 YS와 DJ 역시 청년정치인이었다


청년 정치인을 논할 때 YS와 DJ를 빼놓을 수 없다.

YS, 3선 개입 반발, 행동 나서 

YS는 1927년 거제시에서 태어났다. 1948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최종 2위에 안착했다. 이날 대회 현장에 있었던 장택상과 인연을 트게 됐다. 1954년 YS는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26세에 대한민국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김영삼은 소신을 가진 청년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3선 제한 철폐를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자 불의를 참지 못하고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 자유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의원 임기가 끝난 뒤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에서 출마했으나, 아쉽게도 낙선했다. 하지만 4·19 혁명 이후 5대 총선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20일 밤 10시 5분경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7의 4번지 집앞길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 승용차 서울 자2 2347호에 괴한 3명이 달려들어 차를 세우게한 후 김의원이 탄 뒷좌석 문을 열다 실패, 초산이든 사이다병을 던지고 도주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전형사진을 현장에 보내 범인들의 수색에 나서는 한편 범인들이 버리고간 문제의 초산병을 회수, 감정의뢰했다.

경찰은 승요차 문고리에서 범인들의 지문 3개를 채취하고 감정의뢰했다.

-1969년 6월 21일 <매일경제> 김영삼 의원 피습 20일 밤

1969년 6월 21일 <매일경제> ‘김영삼 의원 피습 20일 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69년 6월 21일 <매일경제> ‘김영삼 의원 피습 20일 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그가 30대던 무렵, 박정희 군부 세력이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를 제압한 군부는 민주공화당 창당을 계획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이 YS를 포섭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김종필은 당시 YS의 굳은 신념에 감탄했다고 본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YS는 야권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어나갔다. 군정 연장에 반대하며 시위에 나선 것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63년 풀려난 YS는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민정당을 참여할 때, 참여했다가 민중당을 거쳐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1969년 신민당의 원내대표로 활동하던 중,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테러 의혹으로 의심됐던 가운데 위기를 모면한 YS는 두려워 움츠러들기보다 더 강하게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는 용맹함을 보였다. 

DJ, 국내 최초 필리버스터 정치인

DJ 또한 청년기에 정치에 입문했다. 1924년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난 그는 8·15 광복 이후, 목포에서 상선 합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던 중, 여운형의 사상에 감화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부원으로서, 목포 신민당 지부에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추종세력과 갈등을 빚으며 그들과 결별하게 된다.

1947년, 목포해운공사를 설립한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에게 자본가라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뻔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계속 도전한 결과, 1961년 재보궐선거에 당선되지만 이틀 뒤 5·16 쿠데타로 인해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목포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의정 활동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3공화국 탄생 이후 처음으로 국회에 제출된 정부의 국회의원 구속동의요청서는 20일의 국회본회의에서 표결을 강행하려는 공화당과 이를 막으려는 야당이 맞붙어 개원 이래 최대의 여야격돌을 빚어낸 끝에 끝을 내지 못한 채 21일로 미뤄졌다. 정부는 헌법 제41조에 따라 1억3000만 달러 일본자금사전수수설을 발설한 김준연 민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요청서를 지난 18일자로 국회에 제출했던 것인데, 민정당과 삼경회는 구속하려는 것은 '정치적인 다른 저의가 있다'고 단정, 의원총회를 계속하는 등 지연작전으로 공화당의 표결방침을 봉쇄하고 나섰으며 이로 말미암아 본회의는 이례적으로 여섯번이나 연장돼 하오 7시까지 야당측이 낸 의사일정 변경동의에 대한 김대중 의원의 제안설명을 듣고 산회하고 말았다.

-1964년 4월 21일 <조선일보> 개원후 최대의 격돌

1964년 4월 21일 <조선일보> ‘개원후 최대의 격돌’ 기사ⓒ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64년 4월 21일 <조선일보> ‘개원후 최대의 격돌’ 기사ⓒ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DJ는 임기 시작부터 군정에서 추진한 한일기본조약을 마주하게 된다. 1964년 자유민주당 소속 김준연 의원은 민주공화당이 한일기본협약 협상 과정에서 받은 1억 달러가 넘는 돈을 정치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민주공화당은 즉각 반발,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상정했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DJ가 나서게 된다. 그는 국내 최초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벌였다. 원고도 없이 즉석에서 5시간 19분 동안 발언하며 구속 동의안을 저지시켰다.

시간 끌기를 위한 발언이 아닌 한일기본조약의 잘못된 점을 짚는 것으로 시작해서 김준연 의원 구속은 왜 부당한 것인지에 대해 하나하나 세세히 파헤쳤다. 김대중은 필리버스터를 계기로, 초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당내에서도 중진이었던 유진오의 인정을 받아 어렵지 않게 당내 입지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후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가 직접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등 적극적인 방해 유세를 벌였지만, 이를 이기고 선출된다. 추후 YS의 40대 기수론에 동참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했다.

YS와 DJ는 청년 시절 불의에 저항하며 끊임없이 도전을 반복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을 알면서도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현대 청년 정치인, 나아가 모든 청년들이 배워야할 모습이라는 평가다. 

 

청년 정치인으로 대거 등용됐던 586, 또 다른 명암


청년 정치인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또 다른 명암이 드리워지기도 했다. DJ 젊은층 수혈론으로 김민석 등 당시 386이 대거 정계 입문해 현재 대한민국 정치권 주류세대인 586이 됐다. 오늘날 이들 세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1996년 4월 12일 경향신문 ‘최연소 영광 영등포을 김민석씨 5공 운동권 스타…재수 끝 여의도행 실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96년 4월 12일 <경향신문> ‘최연소 영광 영등포을 김민석씨 5공 운동권 스타…재수 끝 여의도행 실현’ 기사ⓒ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5공시절의 '운동권 스타'가 15대 총선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금배지를 낚았다.

서울 영등포을의 국민회의소속 김민석씨(31). 그는 299명의 당선자 가운데 최연소자다.

지난 14대 총선 때 최연소 후보로 나서 당시 나웅대 후보(재경원부총리)에게 불과 260표 차이로 떨어졌던 김씨는 한차례 재수끝에 대망의 여의도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있는 국회의원이 돼 지역주민의 지지에 보답하겠습니다"

김 당선자는 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전국학생연합(전학련) 의장 등을 맡아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2년 8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88년 출감 뒤 민주당에 입당해 14대 출마 후 차세대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줬다.

이후 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특별보좌역, 지난해 6.27지방선거에서는 조순 서울시장후보 선거본부대변인을 맡아 정치역량을 키워왔다.

-1996년 4월 12일 경향신문 최연소 영광 영등포을 김민석씨 5공 운동권 스타…재수 끝 여의도행 실현

김민석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DJ에게 발탁돼 정치권에 들어왔다. 시작은 순탄했다. 1992년 서울 영등포구에 공천돼 출마한 그는 민주자유당 소속 나웅배 후보에게 260표차의 근소한 차이로 석패했다. 상대가 3선 중진이었으며, 경제부총리와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었음을 고려한다면 고작 27살밖에 안된 정치 신인의 260표차 낙선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1995년 조순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실장과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만 31세의 나이로 국회에 입성했다.

1997년에는 한보그룹 청문회에서 활약하며, 청문회 스타로 등극했다.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대변인으로서 창당에 적극 참여하고, 1999년에는 영국의 주간지인 '아시아위크'에서 아시아의 새천년 젊은 지도자 2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 항해는 순항하는듯했다.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새천년 NHK 논란'에 휘말리면서다. 2000년 5·18 기념을 위해 광주를 방문한 386(現 586세대)세대 정치인들이 '새천년 NHK'라는 유흥주점에서 여성 종업원을 대동해 술을 마셔 도덕성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당내 입지가 견고해,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2위까지 오르는 등 그를 향한 스포트라이트 열기는 높았다. 그러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했다가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에 패하면서 대선주자로서의 기대도 주춤하게 된다. 

정치인 삶이 휘청인 결정타는 대선 캠프 이적이었다. 16대 대통령 선거가 코앞까지 다가온 시점에서 김민석은 민주당에서 탈당하고 정몽준 캠프로 이적했다. 이는 민주당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민석이 탈탕하며, 점차 표심이 노무현에게 쏠리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게 됐다. 훗날 김민석은 2016년,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후보단일화가 필요했다"며 대의를 위한 행보였음을 설명한 바 있다. 

대선이 끝난 뒤 김민석 앞은 그야말로 낭떠러지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했지만, 출마하는 선거마다 고배를 마셔야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17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후보로 경선에 나섰지만 낙선,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선대위에서 영수증을 잘못 발급하는 바람에 컷오프됐다. 설상가상으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위해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선언했으나, 경선에서 떨어지고 만다. 이렇게 김민석은 돌고 돌아 21대 총선에서 겨우 여의도로 재입성할 수 있었다.

오늘날 유명한 청년 정치인으로 이준석과 박지현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미래조차 불투명한 실정이다. 이준석은 끊임없이 도마에 오르고 있으며, 박지현은 지선 패배의 책임론에 휩싸여 공동비대위원장 자리에서 쫓겨나듯 물러나야만 했다.

과거 사례를 통해 청년 정치와 정신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게 된다. 흔히들 청년 하면 '열정', '도전', '패기', '끈기', '근성', '야망', '정의', '용기' 등이 떠오른다. 정리하자면 '새로움을 시도하며, 그것을 이끌어갈 의지'다. 청년 정치와 정신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YS와 DJ는 청년 하면 떠오르는 요소들에서 빛이 났던 경우다. 올바른 길을 추구하는 청년이 정도를 걷고자 노력하고, 그 소신을 잃지 않은 모습은 지금도 귀감으로 남아있다. 양김이 보여줬던 청년 시절의 저력에서 오늘날 2030 정치인들의 행보에도 답이 있지 않을까?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17일 통화에서 "청년 정치인들은 인기영합이 아닌, 정치력을 갖춰야한다"며 "과거 YS와 DJ가 정치력을 발휘해 합당을 성공시키고, 경합을 통해 대선주자로 발돋움한 것처럼 청년 정치인들도 이들을 본받아 실력을 쌓아야한다"고 평했다.

담당업무 : 정경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확실하고 공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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