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속죄는 대속으로 시작되지만 자속으로 완성된다”
<함석헌과 한국교회> “속죄는 대속으로 시작되지만 자속으로 완성된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8.3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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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속에서 자속으로-4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죄는 우리의 죄, 인간의 죄, 전체의 죄다’

함석헌의 말대로 죄는 내 죄가 따로 있고 네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땅위에서는 따로따로인 것으로 보이지마는 땅속으로 들어가 보면 내 죄, 네 죄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죄는 우리의 죄, 인간의 죄, 전체의 죄다. 모든 죄가 나와 관련되어 있다. 모든 죄는 다 공범이다. 천하 죄인 다 잡고도 나 하나 그냥 두면 죄는 그대로 살아있다. 죄는 횡적으로 전체의 죄가 나의 죄일 뿐만 아니라 종적으로 역사상의 모든 죄가 다 내가 참여한 죄다. 함석헌의 말을 더 들어보자.

“오늘 나라 하는 이 인격은 지금 나온 것이 아니다. 과거에 몇 천백 번 사람으로 나와 사람을 잡아먹고 도둑질하고 간음·강간 다했던 마음이 또 태어나온 것이다. 나야말로 상습범이다.

이 세상이 살기 어려운 것은 모두 상습범의 천지기 때문이다. 전에 도둑질해본 일이 없다면 어떻게 도둑을 도둑으로 알아보며, 전에 강간해본 일이 없다면 어떻게 강간을 알아볼 수 있을까? … 죄는 마을 복판의 천년 묵은 느티나무 같은 것이요, 돌담 속에 5백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것이다. 역사 붙은 죄다. 아니다, 역사가 바로 죄다.”

이 뿌리 깊은 죄를, 나쁜 놈을 열심히 찾아 공정한 처벌을 하자는 혁명으로 없앨 수 없다면 다른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함석헌은 국민적 회개가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의 마음이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라 감동이 되어 새 결심을 하게 돼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혁명군)가 5천년 묵은 죄를 내 몸에서 회개하여 눈물을 흘린다면 민중은 자연 감동할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마음은 감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함석헌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혁명의 원리는 죽어서 삶이다. 죄의 전 책임을 내게 지워 그 나를 죽여 버리면 전체가 살아난다. 죽인다는 것은 나의 이 작은 나를 나 아니라 부정함이다. 그렇게 해서만 내가 전체 나에 이를 수 있고, 그 전체 나가 스스로 제 죄를 담당함으로써만 새 나로 혁신될 수 있다. …그보다는 현행범도 벌주지 않고, 억울한 몰아침을 하는 정죄자(定罪者) 앞에서 변명도 하나 아니하고 십자가를 진 예수는 말할 수 없이 약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세계를 변경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함석헌은 “민중을 회개시키는 방법은 죄 짐을 내가 지고 민중에 앞서는 일이다. … 책임을 내가 지고 내가 나를 죄인으로 규정하면 저쪽의 죽은 양심을 깨워 일으켜서 죄는 정말로 없어지게 된다”고 말한다. 대속은 없다던 그가 이제는 대속이 있다고 말한다. 다만 민중의 죄를 내가 지고 나서면 “저쪽의 죽은 양심을 깨워 일으킨다”고 속죄의 과정을 설명하는 점이 기성교회의 대속론과 다를 뿐이다. 속죄는 대속으로 시작되지만 자속으로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 다닐 때 류영모 교장한테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가 미국 유학 중에 고학을 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리고 일본 유학 중에는 우치무라한테서 직접 그 일화를 들었다. 그가 학비를 벌기 위하여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이라는 곳에 있는 정신박약아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고 있던 때의 일이다. 이 학교는 전체를 두 학급으로 나누어 상태가 좀 나은 학생들은 워싱턴 반에, 보다 못한 학생들은 링컨 반에 수용하고 있었는데 우치무라는 워싱턴 반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자주 말썽을 부리던 그 반의 ‘대니’라는 아이가 어느 주일날 또 말썽을 부렸다.

그 아이들은 저능아들이라 감독이 퍽 어려웠고, 어떤 책망이나 처벌을 해도 소용이 없었지만, 저녁을 먹이지 않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래서 우치무라는 화를 내어 “이 자식, 너 오늘 저녁 못 먹는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굶은 사람은 대니가 아니고 우치무라 선생이었다.

아직 성장기에 있는 그 아이를 굶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인인 자신이 대신 굶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반 아이들이 저녁을 굶고 있는 우치무라의 방 앞에 몰려와서, 앞으로는 모두 그러한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선생님’이 저녁 먹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그 아이의 잘못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워싱턴 반 아이들은 반회를 열고, 대니 때문에 자기들 선생이 저녁을 굶었으니 그도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를 워싱턴 반에서 링컨 반으로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우치무라도 하는 수 없이 대니를 불러 잘 타일러서 링컨 반으로 보냈다. 
 
그런데 우치무라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 후에 어떤 일본인이 미국에 갔다가 그 학교를 방문했더니 그때까지도 그곳에 있던 대니가 그가 일본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우치무라를 아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잘 안다고 했더니 그는 곧 “He is a great man"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치무라가 대니 대신 저녁을 굶었다는 대목에서도 감동을 받았지만, 정신박약아인 대니가 “He is a great man”이라고 했다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우치무라가 대니 대신 저녁을 굶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객관적으로는 대니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니가 그 사건 때문에 우치무라의 인격에 감동을 받지 않았다면 적어도 대니 자신에게는 우치무라가 은인일 수 없다. 우치무라가 자기 대신 저녁을 굶은 행위에 대니가 감동하여 새 사람이 됨으로써, 그는 우치무라를 은인으로 알게 되었고, 마침내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스승의 은혜에 감복한 제자는 다시는 말썽꾸러기로 살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이 전에 살던 대로 사는 말썽꾸러기를 만나면 스승이 자신에게 했던 대로 그를 위하여 대신 벌을 받았을 것이다.

3대 애창 찬송가의 하나인 305장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는 1779년에 존 뉴턴 목사가 가사를 지었다. 그는 원래 노예상인이었는데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매는 시련을 겪은 후에 은혜를 받아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흉악한 죄인의 신분에서 건져내어 복음을 선포하는 목사로 만들어준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이 찬송시를 지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마침내 그는 지난날의 흉악한 죄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된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만약 그가 노예상인 노릇을 그대로 하면서 예수를 믿는 척했다면 이 감동적인 찬송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그가 노예상인을 그대로 하면서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속죄함을 받았노라고 노래했다면 우리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가 흉악한 노예상인 노릇을 깨끗이 청산하고 목사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이처럼 감동적인 찬송시를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심정을 깨달으면, 영은 서로 감응하는 법이라, 성령이 나의 영에 감동을 불러 일으켜서, 내가 예수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가 생전에 한 말씀을 나에게 되살려 예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속죄의 감격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대속이 성립되느냐의 여부는 ‘대속’이라는 단어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 대속을 통하여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느냐의 여부에 달렸다. 예수와의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진 경지에 갔으면 그것을 예수의 대속이라 하건 나의 자속이라 하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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