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②>정통 보수 세력의 희망, 이회창은 아직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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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②>정통 보수 세력의 희망, 이회창은 아직 죽지 않았다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2.09.04 0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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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대권도전 ´학습효과´ 얻고 올해도 대선 출마?
비껴간 시대 바로 잡을까…3전 4기 가능성 ´주목´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이 있다. 한 때 유력 대선주자들로 통했지만 대통령 운이 닿지는 못한 이들을 말한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는 신익희, 조병옥, 유진산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민주화 된 다음에는 이인제, 박찬종, 이회창, 정몽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나름의 애석한 이유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비껴간 시간의 단면을 돌이켜 봤다. <편집자 주>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는 1997년 대선에서도 대세였고, 2002년에도 대세였다. 그런데도 그는 대권을 잡지 못했다.

이회창 대세론이 최절정이었던 1997년은 이 전 총재의 첫 번째 대권 도전의 해였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 대선 후보였던 이 전 총재는 15대 대선에서 야권 후보였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대표에게 39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석패했다.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우파 정권이 대권을 잡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이 전 총재가 1997년 대선에서 JP(김종필)와의 연대에 성공했다면? 혹은 당내 맞수였던 이인제 후보를 포용했다면? 그랬다면 이 전 총재는 대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 보수우파주의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이 같은 가정을 해보기도 한다.

ⓒ뉴시스.
대쪽 이미지로 얻은 것과 잃은 것

"대쪽 정신"이야말로 이 전 총재의 한계였다는 지적도 있다. 법관 시절 이 전 총재는 박정희·전두환 군사 정권의 요청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면모를 보여줬다. 소신과 원칙을 지닌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쪽 판사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대쪽 이회창은 김영삼 전 대통령(YS) 눈에 들었다. YS는 문민정부를 출범시킬 당시 이 전 총재를 영입, 감사원장직에 임명했다. 그 뒤 국무총리, 대선 후보 등 이 전 총리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대쪽 이회창이 주는 강직함과 청렴한 이미지가 국민 신망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대쪽 이미지가 좋은 결과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이 전 총재의 대쪽 정신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포용력 부족으로 연결됐다. 달리 말하면, 소신과 원칙을 보여줘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분간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박찬종 말만 들었어도…?

이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 박찬종 변호사의 충고를 외면한 모습이다. 15대 대선 때 당내 대선 후보 경쟁자였던 박찬종 변호사는 조직력은 약했으나 대중적 인기는 상당한 인물이었다.

박 변호사는 당시 이 전 총재에게 조건부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가 내세운 조건에는 불공정 경선에 대한 대국민 사과, 경선불복을 선언한 이인제 후보를 이 전 총재가 포용해 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 전 총재는 박 변호사의 요구에 불응했고, 이 일로 박 변호사는 신한국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인제 후보를 지원하게 된다.

ⓒ뉴시스.
귀족적 이미지로 별다른 좌절 없이 살아온 이력은 물론 경기고-서울대(KS맨)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엘리트 의식도 단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이런 면모 역시 그의 대쪽 이미지가 갖는 한계로 평가됐다.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는 굴곡 없는 인생을 살았기에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데 서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YS 지지층을 화나게 한 사연?

혹자는 이 전 총재의 실패 이유로 "대세론"을 꼽는다. 대세론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얘기다.

최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세를 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전 총재의 한창때와 비교하면 별거 아니라는 평가가 들려올 정도로 이 전 총재의 대세론은 한층 강했다.

대세론에 취하다 보면 산 정상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이미 정상에 올랐다는 착각을 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비롯된 오만함이 보수 분열의 실마리가 돼 김종필과의 연대 실패, 이인제와의 통합 실패로 연결됐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이 전 총재가 YS를 배척한 것이 결정적 실수였다고 꼬집는다. YS는 이 전 총재를 정치계에 입문시킨 장본인이다. 이 전 총재는 1997년 15대 대선 레이스에서 임기 막바지를 달리는 현직 대통령과의 과감한 선 긋기에 나선다. 급기야는 대구 유세 현장에서 YS 인형을 화형에 처한 일까지 벌어졌고, 이 사건은 YS를 지지했던 이들을 등 돌리게 한 원인이 됐다.

박근혜에게 지지 호소했지만…문전박대

이 전 총재의 낙선 배경에는 두 아들에 대한 병역 비리 의혹도 한몫했다. 1997년 터진 병역미필 논란은 민심을 잃는 요인이 된 가운데 이 문제는 2002년 대선에서도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이 전 총재의 발목을 잡았다.

이후 그는 2007년 이명박 후보의 중도 개혁 성향과 도덕성을 비판하며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대권 도전에 나섰다.

이 전 총재는 이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의 독주를 막고자 3차례나 박근혜 전 대표의 집 앞에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지만, 문전박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이 전 총재는 예전만큼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 채 득표율 15.1%(355만 표)를 얻는데 그쳤다.

ⓒ뉴시스.
이회창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3전 4기 희망 거나…

지금까지 3차례의 대권 도전기에 나섰던 이회창 전 총재. 그가 만약 이번 대선에 출마한다면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마찬가지로 4번째 도전하는 셈이 된다. DJ는 3전 4기만에 대권을 잡았다.

그렇다면 이 전 총재는? 그의 나이로 볼 때 이번 대선이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점에서, 마지막 희망을 걸고, 대선 출마 쪽으로 가닥을 잡았을 수도 있다는 게 보수우파 측의 관측이다.

특히 출마를 바라는 쪽은 이 전 총재 본인보다는 정통 보수우파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인 듯 보인다.

최근 동향을 보면, 보수층은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표가 경제 민주화 등 좌 클릭 경향을 보임에 따라, 보수 우파를 대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또 박 전 대표가 과거에 김정일 관련 호의적인 평가를 한 것 등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이회창 전 총재는 그간 국가 안보와 법질서 확립 정책의 중요성을 피력해왔고, 그런 점에서 이들 보수층은 정통 보수우파를 대변할 적임자로 이 전 총재에게 희망을 건다는 것.

물론 이 전 총재의 대선 경쟁력은 상당히 낮은 상황이다. 또한, 그가 대선에 나설지도 미지수다. 그럼에도 시대를 비껴간 대통령으로 단정 짓기에는 그의 대선 행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가망성이 높다.

이 전 총재는 그간 세 번의 대선 패배를 통해 뼈아픈 학습효과를 얻었다. 이런 그가 이번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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