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대속의 문제는 속죄표를 파는 교회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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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대속의 문제는 속죄표를 파는 교회 때문”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9.0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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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속에서 자속으로-5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사람은 남을 도울 수 있고 도움을 받아야 존재한다

함석헌은 <말씀> 제3호에 실린 ‘속죄에 대하여’(9-335)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대속론에 대한 의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내가 속죄론을 많이 하지 않는 이유는, 나는 아무래도 자주적인 인격관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나만 아니라 현대인인 다음엔 누구나 완전히 해결했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래도 중세적인 신앙은 아니 가진다. 생명에 역행은 없다. 현대인이 이미 추어 올라온 자유의 봉우리를 다시 내려갈 수는 도저히 없다. 우리에게 인격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인격의 본질은 자유다. 자유 없이 인격을 생각할 수는 없다. … 적어도 자아의식을 가지는 인격적인 주체로서의 인간 저 자신의 실감으로는, ‘나는 나다.’ 어디까지나 나다. 나를 위한 나의 나다.

내재하는 자유감을 만족시켜서만 삶이 있지, 그것이 무시된다면 나란 것도, 너란 것도, 종교와 도덕도 없다. 그러면 이 자유의 요구와 십자가에 의한 대속이란 사상과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가? … 인격관이 새로이 전개되든지, 속죄관이 다시 새로운 표시로 나오든지, 어떻게 되기 전은 거기 아무래도 불안이 없을 수 없다.”

인간의 자유와 십자가의 대속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속죄가 되느냐 하는 이유를 밝힐 수 있느냐”고 묻는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노예제도가 있어서 시장에서 사람도 사고팔고 했으므로 예수가 남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지마는, 현대인은 모두 자유를 갖고 있으므로 A라는 사람의 죄를 B라는 사람이 대신 짊어진다고 하는 이론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마음으로는 내가 내 인격을 예수께 드리려 해도 드릴 수 없고, 또 예수께서 받으려 해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대신함을 은혜로 알았으나 이제는, 설혹 죽음이라도, 내 할 것을 남이 해주면 모욕으로 알 만큼 인격관념은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현대인에게는 대속이 이해되지 않을까? 함석헌은 현대인은 ‘나는 나다’ 하는 실감으로 사는 존재라고 말한다. 맞다. 현대인은 자유의지를 가진, ‘나는 나다’ 하는 존재다.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이 “나는 나다” 하는 것과 창조주인 하나님이 “나는 나다” 하는 것은 그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정말로 “나는 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나는 나다” 하는 것은, 그러한 자세가 필요하기도 하지마는, 그러나 현실로 보면 허세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아무리 “나는 나다” 해도 사실은 홀로 설 수 없다. 실존할 수 없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다.

서로 돕지 않으면 인간사회는 존립할 수 없다. 함석헌이 인간은 “나는 나다” 하는 존재라고 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면 역사의 필연적인 연쇄의 한 고리인지도 모르고 유전과 환경의 종인지도 모르나” 하는 단서를 다는 것이 벌써 인간은 “나는 나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 아니겠는가? 객관적으로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 아니라가 아니고 바로 그것이 문제다. 아무리 저 자신의 실감으로는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는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하고 그 자유를 향유하는 것만으로 홀로 설 수도 없다.

사람은 남을 도울 수 있고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정신박약아 대니에게도 학칙을 어기고 말썽을 부릴 자유가 있지마는 선생 우치무라의 도움이 있어야 진정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가 있기 때문에 “내 할 것을 남이 해주면 모욕으로 알 만큼 인격관념이 올라왔다”는 논리는 인간의 실상을 사실 이상으로 과대평가한 면이 있다.

그런데도 함석헌이 인간의 자유를 내걸고 예수의 대속을 문제 삼는 것은 속죄의 이유는 묻지 않은 채 속죄표(贖罪票)를 대량으로 팔아 ‘믿는 척하는’ 신자만 양산하는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의 속죄론이 진리라면 판 박아놓은 진리지만, 그것을 판으로 박아 선전을 하면 수락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그것을 판으로 박아 선전을 하면 수락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판은 심장의 육비(肉碑)에 박을 판이지 교리의 제도에 박을 판이 아니다. 심장에 박은 판은 심장이 자람을 따라 그 판도 자라는 고로 문제가 없으나, 자라지 못하는 제도에 박은 판은 영영 굳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 결과로는 속죄표를 파는 데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 이유를 물을 것 없이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라!’ 하는 것은 속죄표의 공매지 무엇인가? 이유를 묻는 것은 생명이 겉에 있지 않고 속에 있기 때문이다. 행사에 있지 않고 맘에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일 밑에 있는 내적 관련을 찾는 것이다. … 그러기 때문에 현대인이 속죄의 이유를 묻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 결코 불신이 아니다.”

본래 속죄는 다른 모든 영적 진리와 같이 말로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죄란 것이 만일 양심의 깊은 속의 문제라면 그것을 처분하는 속죄의 사실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맘의 지성소(至聖所) 안의 일일 것이다.”

체험이 문제지 이론이 문제가 아닌 경지다. 그러나 체험이 있으면 이를 남에게 전달하는 데 말로 표현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부득불 말로 표현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를 표현하는 말은 쓰기는 쓰되 이것은 부분만을 나타내거나 표면만을 나타내는 불완전한 수단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수단인 속죄교리를 이유를 물을 것 없이, 체험 여부를 묻지 않고, 믿으라는 교회의 설교를 함석헌은 판에 박아 대량생산해 내는 속죄표라고 부른다.

여기쯤에서 ‘해석의 순환’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속죄교리의 이유를 묻지 말고 믿으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성경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난 후에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면, 누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함석헌이 <생활철학>(12-22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이 반론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살림의 근본은 믿음인데, 믿음은 언제나 성운(星雲) 같은 것입니다. 어릿합니다. 그러나 믿으면 알게 됩니다. 알고야 믿겠다는 것이 보통 하는 말이지만, 반대입니다. 믿어서 아는 지경에 갑니다. 거기 믿음의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러기 때문에 또 믿음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힘이라 하지만, 작은 힘은 지식에서 나오지만 정말 큰 힘은 모르고 믿는 데서 나옵니다.

그러나 믿으라는 말은 영 끝까지 이유를 묻지도 말고 알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을 때는 이유 없이 뭔지 모르게 믿었어도 믿음이 생긴 다음엔 그 이유를 캐어 설명하도록 돼야 합니다. 믿으면서도 이유도 설명 못 하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그러나 또 꼭 이유를 안 다음에야 믿겠다는 사람은 영원히 믿을 수 없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자니 나는 그가 세계의 앞날이 암담하다는 말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저 암담하다더라 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기성의 모든 종교에서는 ‘……하다더라’ 하는 신조란 것을 강조하고, 앵무새처럼 교리문답을 외면 천당에 간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리 천당이라 하더라도 ‘하다더라’의 천당은 아니 가렵니다. 암담하다면 암담한 이유를 내가 찾아내야지. 그러면 그 암담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함석헌의 말은 루돌프 불트만이 말하는 ‘해석의 순환’을 연상케 한다.

“이해하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아니고 영적으로 안다는 의미다. 예수를 이론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이다. 예수와의 인격적 교류를 체험한다는 말이다.
 
이 해석의 순환을 폴 리쾨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의 표지 밑에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탄생한다. 그런데 그 해석학 관계는 쌍방향으로 되어 있다. 인간 실존이 십자가와 부활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되듯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역시 인간 실존의 해석을 거쳐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와 인간 실존 사이에 해석의 순환이 있다. 서로 상대방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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