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진 “민추정신 실종, 창립정신 필요한 때” [민추협 되짚기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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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진 “민추정신 실종, 창립정신 필요한 때” [민추협 되짚기⑪]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2.07.2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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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
​​​​​​​“83년 6·15 ‘양김 공동성명서’가 또 하나의 민추 발화점”
“78일간 DJ 가택연금-YS 시위로 번지며 6·10 항쟁으로”
“독재 정권 심판하고 군정 종식 마련이 민추 최대 업적”
“민추 정신, 여야 없어, 재창립된 민추 통해 바로 세워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민추협에서 전문위원과 민주통신에서 편집부국장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민추협에서 전문위원과 민주통신에서 편집부국장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수월재수(掬水月在手)’ 
물을 두 손으로 뜨니 그 속에 달이 있더라. 


우량사(于良史)의 춘산야월(春山夜月)에 나오는 시구다. 

옳거니. 무릎을 쳤다. ‘수(水)가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구나. 민추협을 손(국민)에 쥐면 달(부강)처럼 나라가 부강해지겠구나.’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해오던 동교동계 남궁진 전 장관(8대 문화관광부)은 만나기로 한 날(6월 29일) 하루 전까지 망설임을 멈추지 못했다. 다른 더 훌륭한 분들이 많지 않냐며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위 한시를 읽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민추협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국민을 살리는 길이라면 뭐라도 보태자.’ 

국회 헌정회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체구가 크지 않았다. 여든이 목전이지만, 목소리가 짱짱하리만큼 힘이 넘쳤다. 민추협 창립 멤버이자 DJ 복심이다. 가신 중에서 브레인으로 통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 수립 과정에 핵심적으로 참여했다. 한반도 정책부터 학문적 조예가 깊다.

남 전 장관(이하 남궁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작심한 듯 민추협 전후의 역사적 물줄기를 개인 경험에 녹여내 풀어내기 시작했다. 굽이굽이 쉬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시냇물이 강을 거쳐 바다로 가듯 서사가 수려했다. 한 장면, 한 장면 기승전결로 담아내기 좋은 파노라마 같았다.
 

# 서울 시내 3·15 부정선거
7개 사립고 회장단 대표 된 남궁진


1959년 서울 시내 7대 사립고등학교(보성, 중앙, 배제, 휘문, 양정, 경신, 중동) 학생 회장단이 구성됐다. 중앙고 학생회장이던 남궁진(1942년 충남에서 태어나 서울 상경)이 7대 사립고 회장단 대표로 선임됐다.

이듬해 3·15 부정 선거가 터졌다. 20일 회의를 소집했다. 서울 시내 고등학교 학생회장들이 인사동 경동고의 정중선 군 집으로 모여들었다. 정 군 어머니가 장소도 제공해주고 밥도 해 먹였다. 경동고 대표로는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보성고 대표로 서진영(고대 명예교수)이 왔다. 내일 나가냐. 모레 나가냐. 시위를 앞두고 대책을 논의했다. 

“4·19가 실질적으로 성공한 데에는 남녀 중고등학생이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에요. 감당할 길이 없는 거라.”

 

# 전국, 4·19
거리로 나온 남녀 중고등학생들


중앙고 학생들만 30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종로, 을지로, 청와대로 행진했다. 총알이 날아왔다. 학생 네 명의 복부와 다리가 관통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4·19 유공자로 한 명도 안 됐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과 유공자 자격 받는 사람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야.” 씁쓸한 일이었다.

4·19를 주도한 남궁진은 경찰의 수배 대상이었다. 마장동 김문원(11·13대 국회의원) 집에서 일주일간 숨어지냈다.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제 괜찮겠구나.’ 밖으로 나온 남궁진은 4·19 수습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부위원장은 남궁진이 하고 위원장은 설송웅(국회의원)이 맡았다. 그다음 날부터 빗자루 들고 거리로 나갔다. 종로, 을지로 거쳐 곳곳을 청소했다. 
 

 

유신의 침범


남궁진 전 장관은 4·19 세대와 6·3 세대를 거쳐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담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남궁진 전 장관은 4·19 세대와 6·3 세대를 거쳐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담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하나만 물어볼게요.”
찬찬히 듣던 중 질문을 던졌다. 

- 그때는 고등학생들이 그 정도 의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이기붕 안 된다, 자유당 정권 안 된다고 각성한 학생들이 많았어요.”

-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운동을 한 거잖아요. 집에서 반대는 없었나요.

“부모님이 계셨지만, 너무 가난했어요. 내가 육남매 장남으로 고등학교 때도 가정교사 월급 받아 생활에 보태고 할 때니까요.”

알아서 하는 맏이라 특별히 반대에 부닥칠 일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중앙중고서부터 농촌계몽 모임을 조직해 봄방학 여름방학 때 농활을 가기도 했어요. <서울신문> 1면에 나기도 했지요(웃음).”
 

# 고려대, 6·3 항쟁 
육일회 동기와 한일협정 반대


4·19 넉 달 후인 1960년 8월 19일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혼란한 시기를 호시탐탐 노리던 박정희 일당이 말이요….” 톤이 높아졌다. “8개월 20일 만에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거요. 재개발 5개년 계획을 박정희가 만든 듯 찬송하는데 장면 정부에서 만든 것을 일부 수정했을 뿐이에요.” 혀를 찼다. 

“한일 청구권 협정도 말이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36년간 식민지배한 것에 대한 사죄 없이 5억 불에 (권리를) 팔아넘긴 거예요. 엄격히 역사가 기술해야 할 문제에요. 5·16 군사쿠데타 세력의 자기방어 작업이었던 겁니다.” 당시 남궁진은 고려대 학생이었다. 6·3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 가담했다. 
 


- 4·19세대이자, 6·3세대인 거네요. 

“그렇죠. 최장집도, 서진영도 고대 들어오고, 천신일이라고 <옛돌문화재단> 이사장도 있어요. 이명박은 우리 그룹은 아니었지만 딴 데서 연계해 같이 활동했지요. 육일회(고대 61학번 모임) 만들어 수십 년을 함께 해왔어요.”

3선 개헌으로 넘어왔다. “9년 동안 했으면 물러나야죠. 3선 개헌을 했잖습니까. 1971년 대선에서 자기들이 원사이드하게 이길 줄 알았는데 김대중 후보(신민당)가 나와 바람을 일으켰어요.” DJ는 YS와 함께 40대 기수론의 바람을 타고 있었다. 당내 경선서 YS에 역전승해 본선에 올랐다. 비록 졌지만, 박정희 정권에 위협적 각인을 남겼다. 장기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이듬해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 당시 부정 선거는 없었나요. |

“살벌했어요. 고무신 나눠주고 물품 나눠주고….” 

- 실질적으로 표를 바꿨다던가요. 

“그것도 있었겠지.”

옆에 배석하던 조찬옥 사무총장(민추협)이 끼어들었다. “전라북도 진안에서는 107% 투표율이 나온 거예요. 투표한 사람은 1명인데 11명이 했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 장관께서는 71년 대선에는 참여를 안 했나요.

“대학 졸업 후 공군 장교에 들어갔어요.” 군 생활 마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직업 전선에 쭉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민추협에 가입하게 된 거지요.”

 

민추협의 태동  


남궁진 전 장관은 학생운동 후 군 생활을 마치고 가족을 부양했다. 이후 민추협을 통해 정치를 하게 됐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남궁진 전 장관은 학생운동 후 군 생활을 마치고 가족을 부양했다. 이후 민추협을 통해 정치를 하게 됐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추협이 정치의 시작점인 셈이네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적으로는 DJ 동경 납치 사건, YH무역 사건, YS 제명, 부마항쟁, 12·12쿠데타 등 격동의 역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학생운동의 ‘왕초’로 활약했던 그다. 저항 한 번 않고 생활인으로만 살기란 심적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12·12만 안 일어났어도 민주화가 빨리 이뤄지는 건데….”

말끝을 흐렸다. 동조하면서도 이 질문으로 환기해 봤다. 

- 박정희가 군인 집단을 만들고 양성화했잖아요. 그들에게 집권 기회가 왔는데 물러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어쨌든 저들이 나온 건 죄악이에요.”

- 그러면 요즘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YS의 하나회 숙청을 두고 정치 보복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는 오히려 언론이 잘못했다고 봐요. 그런 사람을 왜 데려다 TV 통해 얼굴 보여주고 목소리를 내게 하느냐 말이오.”

박 전 원장은 TV조선 <강적들>에서 윤석열 정부를 겨냥해 정치 보복 프레임을 씌우며 YS 얘기도 꺼냈다. 자기 진영마저 읍참마속 한 YS까지 무리하게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좌우지간 사심을 갖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예컨대 신군부 국보위 출신 김종인을 문재인이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시키지 않았습니까. 넋 빠진 사람들이 한국 정치를 요리하는 게 문제에요.”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국보위야말로 5·18 광주시민을 참혹하게 학살한 독재세력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 “김대중 대통령(남궁진은 인터뷰 하면서 DJ를 가리켜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선생을 번갈아 썼다. YS에 대해서는 김영삼 총재, 김영삼 대통령이라고 했다)을 어떻게 했습니까. 내란음모 수괴로 몰아 사형을 시키려 했습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DJ를 살려야 한다고 해, 우방국의 도움으로 망명을 떠날 수 있었던 거잖아요.” 안 그랬으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는 얘기였다. 
 

YS 단식을 계기로 민주주의 세력은 단결했고 민추협이 발족됐다. 사진은 김덕룡, 박용만, 박희수 등이 단식 중인 YS를 지켜보고 있다.ⓒ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민추협) 제공
YS 단식을 계기로 민주주의 세력은 단결했고 민추협이 발족됐다. 사진은 김덕룡, 박용만, 박희수 등이 단식 중인 YS를 지켜보고 있다.ⓒ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민추협) 제공

 

# 대한민국과 미국, 민추의 발화점 
단식 투쟁 YS, 망명 중 지지 보낸 DJ


1983년 YS의 단식 투쟁 때로 흘러갔다. 민추협 태동의 발화점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5·18 3주년 되던 해에 김영삼 대통령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잖아요. 23일간 단식했는데 실제로는 무기한 단식 농성이었어요.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에서 ‘김영삼 살리자’고 거리에서 시위했어요. 민추협을 만들게 된 불씨가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요.” 
“김영삼 대통령의 단식, 김대중의 김영삼 구출하라는 시위. 이것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가 있다”는 평가였다. 
 

 

남궁진 전 장관은 민추협 발화 시점이 83년 8·15 기념식에서의 김영삼·김대중 공동성명서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남궁진 전 장관은 민추협 발화 시점이 83년 8·15 기념식에서의 김영삼·김대중 공동성명서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추협을 만들게 된 또 하나의 결정타가 있었어요.” 

- 뭔가요. 

“1983년 8·15 기념식에서의 ‘김대중·김영삼 공동성명서’에요.” 

성명서에는 ‘정치범, 양심범 석방하고 재적 학생 복교, 해임 교수 복직하라. 해직언론 복직 및 언론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 활동 금지 해체하라’ 등이 촉구됐다. “이런 것들이 핵심이 돼 민추협이 마침내 뜨게 된 겁니다.”

당시 남궁진은 DJ-YS의 민주화 투쟁 선언 발표를 준비하는 소위원회 간사였다. 동교동계 사무를 맡고 회의를 준비하며 상도동을 오갔다.


- 누가 누가 참여했나요.

“김록영….” 

한 사람 한 사람 동교동계 이름부터 열거됐다. “박성철(DJ 경호실장)은 내가 말만 해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 울컥 하고 목소리가 떨려왔다. “박종률은 고등학교 선배인데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김상현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독보적 존재잖아요. 상도동계에서는 이민우-최형우-윤혁표-김명윤-김동영, 이랬어요. 최형우하고는 나중에 국회 외교통일위와 국정감사도 같이 다니곤 했었지.” 

모두가 민추협 창립 멤버들이다. 1984년 5월 18일 외교구락부에서 모인 양김 세력은 범정치결사체 민추협을 결성했다. “16개국 32개 부처에 부장 19명 운영위원 452명을 뒀어요. 최형우가 사무총장이었고, 나는 그때 전문위원 겸 <민주통신> 편집부국장을 맡았어요.” 상도동이 국장이면 동교동은 부국장 순이었다.
 

# 서울 시청 앞 사무실
경찰 쫓기는 남궁진과 최형우


<중앙일보> 사옥 건너편이 민추협 사무실이었다. 하루는 간부들을 전부 연행하기 위해 경찰 정보과가 들이닥친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남궁진은 최형우와 5층 되는 빌딩을 뛰어내렸다. 시청역 앞 대로변을 사정없이 달렸다. 더는 뛰기 어려워 다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나쁜 놈들.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며 결의를 모았지(웃음).” 나중에는 황명수(4선 역임)가 바통을 이어받아 사무총장을 했다. 다시 경찰을 피해 간부들이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황명수는 시청 앞으로 도주하는 판인데 최형우는 학생 때 육상 선수였어요.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쏜살같이 뛰어 달려가고 나는 뒤에서 컥컥대고…. 껄껄껄.” 웃음이 터졌다. 
 

 

민주통신 


<민주통신> 에피소드도 생각이 난 듯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표지 사진을 김대중 선생이 잘 나온 거로 쓰냐, 김영삼 총재가 잘 나온 거로 쓰냐. 김도현(문체부 차관 역임, 당시 <민주통신> 주간)과 내가 옥신각신했어요.” 

발행하고 난 뒤에는 강제구인을 피하고자 잠복부터 하는 게 일이었다. “피차 어디 숨었는지 몰라도 어떻게 연락이 돼 만났어요. ‘야, 도현아 인마. 표지를 이걸로 하면 되냐. 이걸로 바꿔야지.’” 재판을 다시 찍기도 했다. “양김 공동의장 행보, 김상현 권한대행의 동향, 그다음 우리나라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소식, 식자들의 비판 원고 등을 받아 게재하고는 했지요.”

- 그 자료는 지금 못 구하나요. 

“다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없어졌어요.” 

경찰에 걸리면 안 되니 보관하기도 어려웠다. 
 

# 여의도 근처 포차 
소주로 달래는 <민주통신> 동지들


운영위원으로 있던 이석현(국회부의장)과 남궁진, 평민당 조직국장을 하던 황준규 등은 사무실을 나오면 으레 포장마차를 갔다. <중앙일보> 사옥을 지나 여의도 가는 길에 있었다. 밤 11시, 12시까지 서서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고 떡볶이 하나로 배를 채웠다. “몇 병을 까고서는 어디로 가냐면 황준규의 집으로 가요.” 영등포에서 오락실을 했다. “지하로 내려가 뭉쳐서 자다시피 하다가도 새벽이 되면 <민주통신>을 곳곳에 배포하러 다녔어요. ‘반독재’ ‘전두환 물러가라’ 고무풍선을 띄우기도 했지요.”
 

거의 집에도 못 들어갔다. “우리 처(유영숙)가 배화여고 교사였으니 그나마 버티고 살 수 있었어요. 신군부 세력이 학교에다 사표 쓰게끔 압력을 넣기도 했지요. 참아가며 어렵게 월급 받아 아이들을 먹여 살린 거예요.” 

- 생활비를 전혀 못 준 거네요. 

“돈이 어디 있어요.”

나올 데가 없었다. “우리한테 누가 돈 줬다는 게 알려지면 (경찰에) 박살 나니까…. 참 기가 막혔죠.” 
 

# 명동 뒷골목
국수로 점심 때우는 민추인

점심시간이 되면 명동 뒷골목으로 향했다. 열차칸 같은 곳이 있었는데 100원을 주면 국수 한 대접을 먹을 수 있었다. 양재기에다가 면 넣고 고춧가루 한 스푼에 육수를 부어주면 끝이었다. 미행하는 경찰 중에서는 가까워진 이도 있었다. 담당 형사한테 소주 한 잔 먹고 싶다고 하면, 시청 옆 청진동으로 데려가 술값을 내줬다.

 

1985년 DJ 귀국 당시ⓒ노승환 회고록
1985년 DJ 귀국 당시ⓒ노승환 회고록

 

# 김포공항 DJ 귀국
양김 회의 책상 닦는 남궁진


1984년 12월 20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창당됐다. 발표문, 성명서 작성은 남궁진 등 민추의 실무진들이 담당했다. 외신 기자들은 동교동 안에서는 남궁진이 주로 상대했다. 12대 선거 나흘 전인 85년 2월 8일 DJ가 귀국했다. 김포공항서부터 동교동 자택까지, 그리고 광화문, 여의도 일대로 백만 인파가 몰려왔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목도되는 순간이었다. 

창당 한두 달도 안 된 신민당은 69석을 얻어 대승을 거뒀다. “전두환이 코가 납작해진 거예요. 홍사덕-박관용-서석재 이 사람들도 큰 역할을 다 한 사람들이에요. 민한당에 있던 이들이 신민당으로 넘어오면서 민주화의 불꽃이 튄 거예요.” 당시 남궁진은 DJ 비서로 있었다. “양 의장(DJ와 YS)이 회의를 할 때면 책상 테이블은 내가 닦았어요. 김대중-김영삼 두 어른이 앉는 자리인데 그걸 누가 닦아. 남궁진이 닦아야지.” 
 

 

민주화의 여명


김장곤 전 의원은 1985년 9월 일어난 고대 앞 사건에 민추협 간부로서 연루됐던 상황에 대해 당시 신문 스크랩해둔 것을 가지고 왔다. 자료는 동아일보 당시 기사다ⓒ시사오늘(자료 : 김장곤 전 의원 제공)
1985년 9월 일어난 고대 앞 사건 신문 보도. 자료는 동아일보 당시 기사다ⓒ시사오늘(자료 : 김장곤 전 의원 제공)

12대 총선 승리로 민주화를 향한 엔진에 힘이 붙고 있었다. 민추협은 천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전국적으로 직선제 개헌 열망이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건국대-고대 시위가 일어났다. 한광옥, 박찬종, 조순형 등이 지원에 나섰다. 

“민추협 안에서의 우리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 거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자신만만했어요.”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는 말로 남궁진은 ‘이민우의 내각제 파동’을 꺼냈다. “홍사덕이 머리가 좋아요. 이민우 총재를 부추겨 삼양동에서 의원내각제를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이라는 걸 발표한 거예요.” 

일각서 사쿠라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김영배 당기위원장이 이민우를 제명하려 하자 어마어마한 깡패들이 신민당을 에워쌌다. “이놈들” 안에 있던 김방림(16대 의원) 등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이민우는 제명됐고 신민당은 자동 해체됐다. 그길로 양김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 가택연금 된 DJ
지붕 위 항의, 외신 통해 세계로


이야기는 남궁진이 꼽은 ‘민추협의 하이라이트’로 향해가고 있었다. 1987년 4월 3일(호헌 조치)부터 6월까지 78일간 DJ가 가택 연금됐다. 83년 YS 단식 투쟁 때 DJ가 해외에서 지원 성명을 냈듯 YS 또한 민추협 회원과 함께 2000명의 경찰이 에워싼 동교동 집으로 향했다. “가택연금을 해제하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신군부를 꾸짖었다. 남궁진은 김옥두(16대 국회의원)와 매일같이 아침 먹으면 지붕 위로 올라갔다. 

DJ 자택의 이불 호청을 뜯어 ‘김대중 선생 불법 감금을 해제하라’는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이를 번쩍 들고 시위하는데, 건물 건너편의 큰 빌딩 옥상에서 AP통신 기자가 망원 렌즈로 그 모습을 찍어 세계에 타전했다.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돼가고 있는 것이 해외에 알려졌다.

그 기간 박종철 서울대생 고문치사 사건, 연세대 정문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사건이 일어났다. 전 국민과 학생이 들고 일어났다. “소위 6·10항쟁이 일어나게 된 거예요. 전두환과 노태우의 6·29 선언이 나온 결정적 계기가 됐고 군정 종식의 전기가 마련이 된 거였죠.”
“13대 대선을 남겨놓고…” 다시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양김 두 분이 합심해 빠른 시일 안에 쿠테타 정권을 종식시켰어야 했는데 그걸 이루지 못했잖아요. 이것이 바로 민추협이 사실상 해체된 사건이 아니오.” 한숨이 이어졌다. 
 

 

민추의 한계 


남궁진 전 장관은 민추의 한계는 87 대선 양김 분열로 군정 종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남궁진 전 장관은 민추의 한계는 87 대선 양김 분열로 군정 종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해 대선은 4자(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가 나왔고 노태우의 승리로 돌아갔다. “군정 종식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우리가 놓쳤어요.” 회한이 역력했다. “김상현 의장이 단일화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지만 잘 안 됐지. 그분은 김대중 대통령 사람이니까 먼저 양보하기를 권유했던 거 같아.” 하지만 동교동계 다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슨 소리냐.” 펄쩍 뛰었다. 그 일로 김상현은 평화민주당을 따라가지 않고 YS 곁에 남는다.

- 경선을 한번 해봤으면 어땠을까요.

“그건 안 돼요. 이미 당(통일민주당) 조직은 지구당 수가 상도동계가 더 많았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망명을 갔다 와서 조직력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김영삼-김상현 의장대행이 꾸려온 거라 한계가 있었지요.”

- YS가 단일화 협상 막판에는 동교동계가 원하는 거 다 양보하고 경선하자고 했잖아요. (YS는 미창당 지구당수 23곳을 달라고 하는 동교동계 안을 전격 수용했다.)

“그래도 안 된다니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상도동계가 통일민주당을 주도했기 때문에 YS가 들어줬다 하더라도 세력적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이었어요.”

- 학자나 혹자 중에서는 이런 말도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영남, 기업인, 공직자, 군부 즉 4대 세력이 DJ를 비토했기 때문에 어차피 어려웠을 거라고요.

“…”

- 김도현 차관은 양김 단일화 실패 요인을 가산주의에서 찾습니다만.

“(끄덕이며) 문제는 두 김 씨의 욕심이었지.” 

어쨌든 “그 일로 독재 정권의 연장을 합리화시켜주게 됐다”고 남궁진은 읊조렸다. 민추협도 “양김 분열로 소멸”하게 됐고 말이다. 

“더 불행한 일은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3당 합당을 한 거예요. 민추협이 독재 정권과 동거하는 형국을 창조한 비극을 안게 된 거요. 그럼에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승리하게 된 원심력은 바로 민추 정신이였어요. 이로써 최초의 민주 진영의 대통령이 탄생 됐던 것이오.”

- DJ도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당선됐잖습니까. 

“그건 좀 달라요. 김종필 세력이 보수적 견해를 가져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단 한 건도 있을 수 없었으니까. 원만히 화해한 것이지, 민추협 정신에 어긋날만한 조금의 흠결도 없었어요.”

- 글쎄요. 동의하기가 좀 힘들어요. 

“암튼 김대중 정부야말로 민추협 정신을 이어받은 유일한 정부라 이 말이오.”

갈무리하듯 단언했다. 

남궁진의 이야기에 상도동은 동의하기 어려울 듯싶다. YS의 측근 김덕룡 전 정무장관은 본지에 YS가 3당 합당을 하기에 이른 것은 DJ가 약속을 깨고 또 깼기 때문이라고 한 바 있다. 동교동계가 87 단일화 협상을 결렬시킨 데 이어 88년 총선을 앞두고서도 소선거구제만 받고 서교호텔 협상을 파토 내 야권 통합이 물 건너가고 말았다는 설명이었다. 이후 YS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며 3당 합당해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열었다. 김덕룡은 관련해 “DJ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것도 3당 합당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최선의 길이었다”고 술회했다. 

 

민추의 정신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고 이 점을 물었다. 

- 군사 세력과의 연합으로 국민의힘 안에는 민추협 정신이 없어졌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지금의 더불어민주당 안에는 남아 있는 건가요? 

“노무현 정부 때 열린우리당으로 분당해 나갔잖소. 민추협 정신은 민주당(새천년민주당)까지만 있는 거예요. 사실은.”

-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둘 다 그럼 민추협 정신을 잇는 정당이 없는 거네요.

“아까 얘기했잖소. 실종되고 해체됐다고.”

- 장관께서 말하는 민추협 정신은 뭔가요.

“반독재 민주화 정신.”

이어 “지금도 말만 민주주의지, 내부 행태 돌아가는 거 보면 민주정당의 행태가 아니에요.” 여야를 가리켰다. 

화제를 돌렸다. 

- 민추협 의의는 뭔가요.

“반민주 군사 독재에 정면으로 저항해 심판한 것이 민추협의 최대 업적이에요.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해 민주화의 초석을 놓았잖소. 동교동 상도동 양대 민주정치 세력이 연합해 큰 물줄기를 이뤄낸 것도 역사적인 일이죠. 민주화 운동의 중심 역할 한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을 거예요.”

- 그런데 586 운동권 출신들이 대신 조명을 받고 있잖아요. 

“내가 언제도 얘기했지만, 지게 지고 벌어놓으면 갓 쓰고 먹는 사람들이 나오는 법이지.”

- 민추협의 계승발전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점은요. (16대 대선 전 다시 양김 세력이 뜻을 모아 법인체로 재창립됐다.)

“환골탈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봐요. 지난 역사를 잘 정립해야 해요. 쇄신과 변화를 위해 몇 가지 소견을 피력하자면 이렇소.”

미리 준비해둔 말을 읊어나갔다. “첫째 민추협 회원과 민추정신에 동조하는 젊은 세력과 연대 조직해야 한다. 두 번째는 반독재민주화 정신인 창립 정신을 고양해야 한다.”

 

햇볕 정책으로 


인터뷰 후반부.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달라고 했다. 남궁진이 14대 비례대표로 원내 진입에 이어 15대 국회의원일 때다.
 

남궁진 전 장관 의원 시절ⓒ연합뉴스
남궁진 전 장관 의원 시절ⓒ연합뉴스

 

# 청와대, 국민의정부
정무수석 발탁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옷 로비 사건으로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자 남궁진을 불렀다. “청와대 들어와서 나를 좀 도와주게.” 당시 남궁진 별명은 황소였다. DJ가 임무를 주면 뭐든 결판을 잘 내기로 유명했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 가겠습니까.” 가뜩이나 동교동계 가신들은 DJ가 집권해도 일체 임명직을 맡지 않고 헌신하겠다고 선언한 뒤였다. “아, 이 사람아. 한광옥 의원하고 자네하고 둘이 정국을 수습해야 할 상황이네.” “한 의원은 그 당시에 선언한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만,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누가 될 텐데요.” “이 사람아. 어려운 문제를 해소하고 그러는 것이 국민에 대한 봉사다, 나중에 왜 약속을 못 지켰는지를 잘 해명하면 되지.”

‘오죽하면 이러실까.’ “좋습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의원직에서 사퇴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그때 맡아서 잘 해결했죠.” 

마무리하면서는 현안으로 넘어왔다. 서해공무원 피격 사건,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을 둘러싸고, 국가의 존재 이유와 남북관계의 문제가 수면 위로 불거지고 있었다. 

- DJ 햇볕 정책이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같습니까. 

“그 얘기 좀 할게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85년 김대중 선생 귀국 후부터 석 달에 한 번씩 우리가 한반도평화포럼을 열었어요. 학자 한 20명을 불러놓고 햇볕 정책을 논의한 거야.”

간사를 맡은 남궁진도 베스트 멤버로 참여했다. 95년 아태재단의 핵심적 역할을 맡길 만큼 이 분야 관련 그에 대한 DJ의 신임은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대통령의 햇볕 정책은 말이오. 우선은 튼튼한 안보예요. 한미일 공조 속에서 대화, 교류, 협력을 통해 통일로 나아간다. 이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포용 정책이야. 그리고 북한과 대등하게 가는 거예요. 근데 이 정부는(문재인 정부)….”

‘월북몰이’ 등 굴종 외교를 꼬집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잘라 말했다. 인터뷰 내내 막힘이 없었지만 30분 넘게 햇볕 정책의 핵심을 쏟아내는 대목에서는 한 편의 강연과 다를 바 없었다. 훗날 햇볕 정책 이야기만큼은 따로 다시 만나 재조명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아쉽지만 여지를 남긴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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