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역사 인식… ‘대통합’에 ‘진정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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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역사 인식… ‘대통합’에 ‘진정성’ 없다?
  • 신상인 기자
  • 승인 2012.09.11 2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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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의 실체를 안다면 대통합 방법은 바꿔져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신상인 기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10일 5ㆍ16과 유신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 같은 역사 인식은 그의 대통합 행보에 논란을 빚게 될 공산이 커졌다. 논란의 요지는 박 후보가 ‘과거사’에 대한 인식변화 없이 진행하고 있는 대통합 행보에는 진정성이 없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박 후보 측 캠프의 한 관계자도 “박 후보의 지지율이 견고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역부족”이라며 “과거에 대한 ‘역사의 판단’ 운운은 일부 문제에선 여전히 상황인식이 안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박 후보의 발언에 대한 반응과 보도 방향에 공보 실무진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 최근 5ㆍ16과 유신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발언으로 ‘과거사’에 대한 인식변화 없이 진행하고 있는 대통합 행보에 진정성이 없어보인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뉴시스
박 후보는 같은날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같이 밝히며, 그동안 논란이 된 5ㆍ16, 유신 관련 역사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다만 “현대사는 압축적인 과정에서 굴절도 있었고, 그림자도 있었다”며 유신에 대해서 “많은 평가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고 밝혔다.

손 교수가 “보수진영의 한 학자가 박근혜 후보가 5ㆍ16은 옹호해도 유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언급하면서 유신의 불가피성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에 박 후보는 즉답을 피하며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피해를 입으신 분들, 고초 겪으신 분들은 딸로서 제가 사과를 드리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제가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진행자가 똑 부러진 입장을 요구하자, 박 후보는 “5ㆍ16 같은 경우도 그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내가 만약 그때 지도자였다면… 역사가 객관적인 판단을 해 나가야 하는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 후보는 또 ‘유신의 그림자’로 일컬어지는 인혁당 사건도 “앞으로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지난 2005년 박 후보는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ㆍ과장됐다는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 발표가 나오자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인혁당 사건은 2007년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 판결이 났다. 하지만 사건 희생자 8명은 1975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된 뒤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나라 안팎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유신헌법의 실체를 알면서도...?

이 모든 역사적 사실 앞과 뒤에는 유신헌법이 있다는 분석이 다수다. 유신헌법은 그 자체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헌법이었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이라면 박 후보와 같은 역사인식에 당연하게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5000명에 가까운 통일주체국민회(유신헌법 제35조에 의거해 설치되었던 헌법기관)의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하도록 했다. 대의원들의 성향은 물어보나마나였다. 1972년 당시 전체 대의원 2359명 중 2357표를 얻어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됐다. 1978년에도 기권 5표를 제외한 2583명중 2577표로 당선됐다.

이를 통해 경찰과 군에 대한 장악은 기본,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라는 기구를 이용한 권력 남용은 비일비재했다. 장준하 선생 사망사건도 이들에 의한 의문사로 의혹이 제기되는 건 당연하다.

입법부 또한 가관이었다. 국회의원 중 1/3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도록 하고, 지역선거구 국회의원은 의원정족수의 2/3만을 선출하되 중선거구제를 택하여 각 지역구마다 2인의 의원을 선출하도록 했다. 여당이 국회의원 의석수 2/3를 차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 때문에 1979년에 있었던 김영삼 신민당총재 제명사태도 가능했던 일이었다.

대법원장 이하 일선 법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통령이 임명하게 해 사법부를 완전히 무력화 했고, 수많은 시국사건에서 검찰의 구형을 그대로 판결로 선고하여 ‘정찰제판결’이라는 비난을 듣게 만들었다.

이렇듯 민주주의가 삼권분립의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행정, 입법, 사법을 모두 장악한 후에 언론 또한 보도지침에 따라 철저히 통제했다. 이에 저항하는 언론인들은 모두 쫓겨났다.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정부시책과 유신헌법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청년ㆍ학생ㆍ지식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했다.

이 같은 사실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우리 역사에는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적 사실 중에 하나가 됐다. 일본제국주의의 대한제국 침탈, 일제강점기, 한반도 분단과 6ㆍ25 전쟁, IMF를 통한 경제적 위기까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역사의 교훈들이다.

그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바로 유신독재이다. 박 후보는 이 문제로 인한 과거사를 먼저 풀어야 대통합의 물꼬를 열 수 있다.

비록 박정희 정권 당시 아버지의 선택이 불가피했음을 우회적으로 피력하더라도 그 해석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박 후보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에 대한 역사인식에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국민 대통합 행보만 고집한다면 그건 일방적인 ‘손 내밀기’일 뿐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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