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재 이덕형과 정운찬의 동반성장 [역사로 보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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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재 이덕형과 정운찬의 동반성장 [역사로 보는 정치]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2.08.04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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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음이 필요한 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이덕형의 가치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빛났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이덕형의 가치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빛났다. 이덕형의 묘와 신도비 사진출처: 문화재청

천재는 하늘이 낸다. 천재는 나라를 구한다. 그는 시대를 만든다.

“임진년 난리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중국 사람이나 왜인들도 모두 그의 성명(聲名)에 복종하였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을 좋아하지 않아, 외구(外舅)인 이산해(李山海)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하였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주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

조선의 천재 한음 이덕형에 대한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10월 9일 기사다.

실록에 따르면 이덕형은 일찍부터 공보(公輔)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문학과 덕기(德器)는 이항복과 대등했으나, 덕형이 관직에서는 가장 앞서 나이 38세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사실 조선의 석학이라면 누구나 탐낼 대제학을 30세 나이에 올랐으니 학식의 경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요즘으로 말하면 30의 나이에 서울대총장이 된 것이다.

선조는 한음의 뛰어난 재능을 아꼈다. 무능의 대명사 선조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나 보다. 한음은 조선 공직자의 롤모델이었다. 부수찬, 부교리, 이조좌랑, 동부승지, 대사성, 예조참판,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 화려한 경력이 이를 증명한다.

이덕형의 가치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빛났다. 7년 조일전쟁과 전후복구, 광해군 즉위 등 격동기 조선은 항상 이덕형을 필요로 했다. 외교관이자 군사전략가로서 맹활약했다. 왜군과의 교섭과 조명연합군과의 협상은 항상 한음의 몫이었다.

한음은 조일전쟁 초기인 1592년 왜군 선봉장 고니시가 충주 회동을 제안하자 기꺼이 수용하고 목숨을 걸고 단기필마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불발됐다. 또 다시 기회가 왔다. 선조가 평양까지 도망갔을 때 왜군은 이미 대동강에 도달해 화의를 요청했다. 한음은 기꺼이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침략의 부당함을 당당히 따졌다. 

불행히도 화의가 불발되자 한음은 명군 파병의 중책을 맡아 이를 성사시켰다. 명군 사령관 이여송의 전담 마크맨이 돼 조명연합군을 함께 이끌었다. 선조는 한음의 맹활약에 병조판서에 이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게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터졌다. 이번엔 명나라 어사 양호를 설득해 수도 한양 방어 강화에 주력했다. 수도 함락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그의 단호한 의지에 양호는 그의 뜻을 따랐다. 또 한 번의 몽진을 고려하던 비겁한 군주 선조도 굴복했다.

한음은 조명연합군을 이끌고 울산까지 동행하며 끝까지 독려해 왜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만약 한음이 아니었다면 타국의 전쟁에 발을 빼려던 명군은 공세를 주저했을 것이다. 사실상 명군은 한음의 수중에 있었다. 한음은 조선 전장을 가리지 않고 누볐다. 명나라 제독 유정과 함께 순천으로 이동,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했다. 

전후복구도 한음의 몫이 됐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주력했다. 한음은 군사전략가 기질도 발휘했다. 왜군의 재침을 막고자 대마도정벌을 건의했다. 전후 권력투쟁에 나선 권세가들은 이를 원치 않았다. 안보보다 자신들의 권력이 더 중요했다. 결국 그의 주장은 묵살됐지만 영의정에 올랐다. 

한음은 권력욕이 부족했다. 1604년 절친 이항복이 이덕형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정적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했다. 광해군이 즉위했다. 조일전쟁 중 전쟁을 총지휘했던 광해군은 그를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파견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중용했다.

한음의 지조는 그의 말년을 괴롭혔다. 광해군은 왕위쟁탈전 승자였지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반격이 두려웠다. 1613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의 사사와 폐모론을 제기하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했다.

한음의 지조에 오히려 광해군은 침착했으나 정적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목숨을 노렸다. 삼사가 움직였다. 일제히 이덕형을 역적 프레임으로 몰아 사형을 주청했다. 한음을 아낀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하는데 그쳤다. 결국 한음은 자신의 시대를 마감하고 낙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운찬 교수의 동반성장에 관심을 가져보길 권해본다. 사진출처: 동반성장연구소
윤석열 대통령은 정운찬 교수의 동반성장에 관심을 가져보길 권해본다. 사진출처: 동반성장연구소

윤석열 정부가 매우 불안하다. 고물가를 비롯한 3고 경제 위기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 야식 치킨은 사치품이 됐다. 교육부장관은 뜬금없이 학제개편을 들고 나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은 정권 말기에서나 볼 수 있는 수치다. 

집권당 대표는 식물정치인이 됐지만 관종의 덫에 갖힌 탓에 누구 말대로 여전히 내부총질에 여념이 없다. 윤핵관은 당권 장악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한 마디로 국정 대혼란이다.

윤석열 정부 인재풀이 막혀있다. 사시 합격자 검사들은 수사는 천재이지만 국정은 글쎄다. 어쩌면 인문학 낭인일 수 있다.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만이 국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자유가 평등을 제압하면 사회적 약자는 설 땅이 없다. 

대한민국의 한음이 필요하다. 대제학과 영의정을 거친 천재는 흔치 않다. 우리 헌정사에도 이현재, 이수성, 정운찬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국무총리와 서울대 총장은 행정능력과 고도의 학식을 갖췄다. 

정운찬 전 총리는 ‘동반성장’ 전도사다. 동반성장은 더불어 성장하고 공정하게 나눠서 모두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사회철학이다. 자유와 평등의 조화가 필요한 때다. 매사 지나침은 독약이다. 자유 독점은 사회적 약자 파괴다. 동반성장이 치유제가 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1세기 한음을 찾아보길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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