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죽음의 진실①>장호권 ˝장준하, 대한민국 미래 위해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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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죽음의 진실①>장호권 ˝장준하, 대한민국 미래 위해 나타나˝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2.09.11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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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대한민국 총독…친일·독재 역사 이 번엔 정리해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종희 기자)

대통령 선거가 있는 2012년 고(故)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37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면서 타살 의혹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장 선생 유족들은 그 동안 장 선생의 무덤을 열어 유골을 조사해보자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막상 무덤을 열었지만 이미 유골이 진토가 되어 있을 경우 난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묻혀지는가 했던 의문사 사건이 폭우로 무덤이 스스로 열리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것도 망치에 맞은 듯한 둥그런 구멍이 뚫린 두개골과 함께였다. 이런 유골을 눈으로 직접 본 유족들의 마음은 쉽게 짐작이 간다. 타살에 대한 심증이 굳어지면서 사인을 정확히 밝히고 싶을 게 분명하다.

누군가가 대선 정국에서 이용하기 위해 장 선생 무덤을 파헤쳤다면 '또다시 과거사 파헤치기를 하는구나'라며 짜증을 일으켰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다르다.

장 선생과 '천적' 관계였던 故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 가운데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드러난 유골로 전율을 느끼던 터에 장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씨를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장 씨의 얘기를 들으면서 마치 장준하 선생이 얘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 탄압을 겪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의심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2012년 9월 6일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용환은 목격자가 아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일어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 씨가 궁금합니다.

"먼저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진상조사위를 거치면서 목격자가 아니라 동행인으로 바뀝니다. 김 씨가 마치 목격자인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저 사건 당시 장 선생의 동행인이었고 이후 사건에 대한 진술인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김 씨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도 정확히 못 찾습니다. 진술도 일관되지 못하고 그때 그때 바뀌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유일한 목격자라며 그의 말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게 말이 됩니까."

-장 선생이 떨어지기 직전에 잡았다는 소나무를 놓고도 의구심이 많습니다.

"사고가 발생했다는 곳은 굉장한 벼랑인데 김 씨는 자신이 쳐다보니 장 선생이 소나무를 잡았고 그 소나무가 휘면서 떨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이 얘기를 들어보면 마치 김 씨가 절벽 아래에서 쳐다본 것을 묘사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자기가 앞서 가는데 뒤에서 '휙'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떨어졌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소나무 잡는 것을 봤다는 것도 납득이 안 됩니다. 김 씨는 소나무를 놓고도 말이 일관되지 못했습니다.

또, 장 선생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곧바로 쫓아내려왔다고 하는데 그 절벽을 어떻게 내려옵니까. 유약하다는 김 씨가 그렇게 내려올 수 있었다면 광복군으로 미국 OSS 특수훈련까지 받은 장 선생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떨어졌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장 선생이 만약 소나무를 잡았다면 손에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발견됐나요."

1993년 월간조선 5월 호에 따르면 김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갈수록 계곡이 험해져 그때부터는 젊은 사람이 앞장서야 할 것 같아 앞장서긴 했는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되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고 위험해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있다. 그때가 그랬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는데 뒤에서 뭔가 '휙'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보니 장(張)선생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장 선생의 추락을 본 김 씨가 절벽 아래로 급하게 내려갔다는 것을 두고 절벽 경사가 심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절벽 오른 편으로 돌아서 내려올 수 있다는 반론이 있는데요.

"그 장소를 전문 산악인들이 여러번 확인한 결과 불가능하다고 해요. 그리고 그렇게 돌아서 내려왔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겠습니까. 하지만 김 씨는 곧바로 내려왔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나요."

-산행 중 군인을 만났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처음 등산 일행이 낮 12시가 채 안 된 시간에 점심을 먹을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준비했었으니까 아직 12시가 안 됐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 때 김 씨가 좀 늦게 도착해서는 '어, 장 선생님 어디 가셨는가'하고 물었더니 '혼자서 산에 가셨다'는 답이 나왔대요. 그래서 김 씨가 쫓아 갔더니 장 선생이 군인 둘이랑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김 씨는 군인 얘기와 관련해서도 말을 바꿨습니다."

-사고를 알리는 전화가 장 선생의 부인인 김희숙 여사에게 걸려온 것을 놓고도 의구심이 있습니다.

"사고가 오후 1시~1시 30분 사이에 났다고 하는데, 저희가 밥도 안 먹고 계속 올라가도 사고 지점까지 그 시간에 도착하는게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망우리에 있는 어머니가 '장 선생이 산에 떨어져서 다쳤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사고 장소에서 이동 파출소까지 뛰어 가는데도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립니다. 그렇다면 빨리 신고를 했다고 해도 3시 정도인데, 어떻게 2시경에 전화가 올 수 있나요. 이런 시간적 차이에 비춰, 돌아가신 장소는 따로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1시 30분이나 2시가 아니라 산행 중간에 이미 사건이 벌어졌고, (작전조가) 무전기를 통해서 작전 끝났다고 알리니까 본부에서 도경에 알렸고 도경은 파출소에 알렸다는 게 다 나와있습니다."

이와 관련, 지난달 21일 김희숙(86) 여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오후 1시쯤 누군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장 선생이 크게 다쳤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네?' 하고 물으니까 '산에서 다쳤습니다' 해요. 어딘지 모르니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요. 겨우 포천의 이동파출소에 도착하니 오후 4시에요. 상황을 모르고 있던 순경과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추측되는 곳에 내려 부랴부랴 산을 올라가 보니 남편이 큰 바위 평평한 곳에 누워 계셨어요. 산에서 떨어진 분 같지 않았어요. 귀 뒤쪽에서만 피가 나왔고 모습이 너무도 멀쩡했어요. 타살이라는 직감과 함께, 올 것이 왔구나 싶었어요."

장호권 씨와 김희숙 여사가 전화 받은 시간에 대해 약간 다르게 기억하고 있지만 사고를 알리는 전화가 일찍 온 것에선 일치한다.

"장 선생을 시해한 사람은 따로 있다"

장 씨는 이날 장 선생을 시해한 사람도 김 씨가 아니라고 말했다.

"사건 현장에 김용환 씨 외에 김용덕(호림산악회 회장), 김희로, 김용봉 씨(김용덕 씨의 동생)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서로 다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각자의 각본을 외워서 한 것이죠. 장 선생을 시해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요. 그런데 아무리 얘기를 외워도 현장을 보지 않으면 기억을 잘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혼선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김희숙 여사는 김용환 씨와 김용덕 씨가 그날 장 선생의 산행을 강권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두 김 씨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김용환, 중정 프락치였다는 증언 있어"

-김용환 씨가 방송에 나온 모습을 보면 매우 떳떳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거짓말 하는 모습이 아닌데요.

"김용환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방패막이가 든든하게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들이 이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김 씨가 장 선생을 아버지로 부르고 장 선생은 김 씨를 아들로 불렀다고 하는데 진짜 아들인 저도 모르는 아들이 있을 수 있나요. 아버지와 친했던 분들에 따르면 김 씨가 처음 장 선생을 찾아왔을 때(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 이상하다 싶어서 장 선생 비서 등이 쫓아갔다고 해요. 공작정치가 엄청났던 시절이다보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따라가보니 청량리 홍릉에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는데 들어가보니 행정 전화기가 있었다고 해요. 그 당시엔 전화기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 전화기를 쳐다보니 김 씨가 신문지로 가리더래요. 지난번 2차 진상규명위에서 조사했을 때 중정요원이 김용환이 중정의 프락치였다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확률 1%와 99% 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하나" 

-월간조선 기사를 보면 김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겁지겁 내려왔을 때까지 선생님은 의식만 잃었을 뿐 돌아가시지는 않았었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하다가 일행들에게 알리러 갔다."  보통 인공호흡은 숨이 멈춘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분에 대해 인공호흡을 했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숨도 남아있는데 인공호흡을 왜 합니까. 앞뒤가 안 맞습니다. 법의학자들이 얘기하는 걸 보면, 추락을 해서 그렇게 두개골에 둥근 구멍이 생기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 확율이 아주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데는 안 다치고 귀 뒷부분에 둥그런 구멍이 났는데, 귀를 정확히 피해서 딱 그만한 동그란 돌에 정통으로 부딪히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절벽 아래에는 견치석들, 그러니까 바윗돌이 깨져서 된 돌들이 많았습니다.

모래밭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자갈밭인데 그 반경이 1m에서 2m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떨어지면서 여기저기 부딪혀 튕겨지기 때문에 멀리 떨어지지 (자갈밭으로) 떨어지기 어렵습니다. 장 선생 옷도 깨끗했고 안경도 안 깨졌고 충격에 굉장히 약한 보온병도 멀쩡했습니다. 정말 바람이 불고 해서 그 자리에 딱 떨어질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확률에서 하나는 1%, 다른 하나는 99%일 때 사람들이 어느 쪽을 믿을까요."

인공호흡과 관련, 1993년 월간조선 5월호 기사에 따르면 김용환 씨는 "허겁지겁 내려왔을 때까지 선생님은 의식만 잃었을 뿐 돌아가시지는 않았었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하다가 일행들에게 알리러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한 달이 지난 6월 호에 실린 김 씨의 수기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허겁지겁 선생님이 떨어진 쪽을 향해 내려갔다. 선생님은 그곳에 누워 계셨다. 의식은 없었으나 호흡을 몰아쉬고 계셨다. 선생님을 반듯이 눕히고 손을 대고 인공호흡을 하면서 '선생님, 선생님 정신차리세요. 선생님 정신차리세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선생님의 호흡은 점점 약해져갔다. 호흡이 멎는 순간이 왔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계속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호흡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놓고도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서 머리에 큼지막한 구멍이 날 정도인 사람에게, 그러니까 거의 즉사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사람에게 손을 대고 인공호흡을 하고 '정신차리세요'라고 외쳤다는게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큰 주사 바늘 자국, 독극물 감식 조사 할 것"

-장 선생 몸에 난 주사 바늘 자국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집으로 장 선생을 모셔왔을 때 외과의사 두 분과 내과의사 한 분을 문상객으로 가장해서 모셔왔는데 귀 뒤를 만져보니까 함몰됐다고 해요. 그 때 주사자국을 봤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극약을 투여했구나, 의심했지요. 주사로 일시에 많은 양을 투입하면 몸에 난 주사바늘 구멍이 크다고 해요. 극약을 투입해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확인 사살을 하고 던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국 법의학자들도 두개골을 보더니 추락사 치고는 이례적 상처라고 했는데 유골이 잘만 보존됐다면 독극물 채취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죄송하지만 이 번에는 그것도 할 생각입니다."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는 장 선생 사건을 놓고 실족사가 분명한데 타살로 우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저는 그 사람이 논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지적 유희'를 하고 돌아다닌다고 봅니다. 망상가입니다. 그런데 어느 사회나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적 책임이 있는 언론인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얕은 지식을 가지고 왜곡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 전 대표가 장 선생 사건과 관련해 유족들을 찾은 적이 있나요.

"조갑제 씨가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 사람 생긴 것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닐까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기득권 독버섯 세력 반발 때문에 과거사 규명 한계"

-당시 사건과 관련한 자료가 국정원과 기무사에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김영삼(YS) 김대중(DJ) 노무현 전 대통령 등 민주 정부 시절의 대통령들이 그 자료를 보지 않았을까요.

"그 분들이 최고 권력자이긴 한데 대통령으로 할 수 있는게 10개라면 7개도 제대로 못한 것 같습니다. 친일세력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와 그의 충견인 전두환으로 정권이 이어지면서 그 긴 세월동안 그들이 심어 놓은 독버섯들, 독버섯이 생명력이 강한데, 이 기득권 세력들이 영향을 미치다보니 다른 최고 권력자가 나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독버섯들의 최고 약점이 바로 의문사 사건입니다. 그냥 독재를 하고 부정으로 부를 축적하는 수준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것을 건드리려고 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막습니다. 그걸 내주면 끝장인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금 추진하고 있는 장준하 의문사 범국민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요.

"아버지의 사인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타살일 경우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단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 젊은이들을 휴전선에서 간첩이라면서 쏴죽이고 화장해서 보낸 경우도 많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남산 1호 터널을 지을 때 그 안에 놓고 죽인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걸 다 밝히자는 것입니다. 올해 대선이 있는데 박근혜가 문제가 아니라, 과거에 나쁜 짓 했던 자들이 박근혜를 내세우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박근혜가 자신의 정치를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 나쁜 세력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하니 장 선생이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과거 그냥 묻으면 현재가 또 다시 그 과오 답습"

-장 선생이 서른 일곱 번 체포되고 아홉 번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장호권 씨도 장 선생의 사인을 조사하다가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박정희 정권의 잔인성이 드러난 것인데 사람들은 장 선생의 사인에만 관심이 있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갑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래서 저희가 지금 하려는 게 우선적으로는 아버지의 사인을 규명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범국민 차원에서 과거에 잘못된 것을 전체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봅니다. 독재 시절에 존재했고 아직까지 수면 밑에서 권력을 향유하는 세력들이 이번 대선에서 친일·유신의 원조인 박정희의 딸을 내세워 수면 위로 올라와서 과거의 영광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과거가 묻히고 똑같은 잘못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박근혜는 과거는 묻고 미래를 보자고 하는데, 그냥 역사를 과거에 묻어 놓고 가면 현재가 그걸 다시 답습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미래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막말로 일본이 좋은 조건으로 우리나라 먹겠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막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하겠다는 겁니다."

"박정희 지지율, 세뇌된 결과"

-최근 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1~2위를 차지합니다. 이에 대한 심경이 궁금합니다.

"여론조사에도 문제가 있지만 박정희 잔당들이 그 많은 세월 동안 기득권을 누리고 협잡질을 했는데 이런 자들에 의해 세뇌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일부 언론에서도 그 세력들을 옹호하면서 세뇌가 더욱 된 것입니다. 좀 안다는 사람들도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야당이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거기다가 가진 것도 없으니 포기합니다. 대신, 못된 짓은 해도 가진 게 많은 쪽에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기득권 세력들이 출세주의를 심어 놨고, 그 바람에 가진 놈에게 붙어야 뭐가 될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산업화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데요.

"박정희가 산업화를 하고 보릿고개를 넘겼다는데 사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준하 선생이 한 것입니다. 물론, 혼자서 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국토개발본부장을 하면서 다 한 것입니다. 장 선생이 2천여 명의 공채 1기 젊은이들을 뽑아 놨는데 박정희가 그대로 물려받아서 재건본부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박정희가 그걸 이용해서 했는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습니까. 그들의 고혈로 소위 말하는 1% 기득권층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 나라가 그들 1%의 나라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지금의 경제성과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자동차 못 타고 다닙니까. 조금 늦더라고 정통성있게 나아갔다면 훨씬 더 탄력을 받아서 더욱 발전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정통성이 없이 하다보니까 밑바닥이 없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장 선생이 이번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외세에 흔들리겠다고 생각해서 묘를 헤치고 나온 것 같습니다."

"박근혜, 위안부 및 독도 문제 얘기한 적 있나"

장 씨는 이 대목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금 솔직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를 일본 극우세력들이 얼마나 지지하는 지 모릅니다. 박근혜가 요즘 말고 과거에 위안부 및 독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나요. 일본 건드리는 얘기는 안 해요. 박정희가 죽었을 때 아사히 신문이 '우리의 충성스런 마지막 황군이 죽었다'고 대서특필했어요. 대한민국이 제대로 됐다면 '우리 대통령을 감히 황군이라고 하느냐'면서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나요. 더 이상 이렇게 가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정리를 해야 합니다."

-얼마 전 장 선생님 37주기 추도식에 새누리당 의원들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것이 새누리당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패거리 정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장 선생은 광복군이니 그 추모식은 국가적 차원으로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건 새누리당의 현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지요."

-범국민진상규명위원회에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참여했는데요.

"제가 범국민운동을 해야겠다고 시작했는데,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유신과 싸웠던게 동교동(DJ)과 상도동(YS)인데 참여를 부탁하려고 찾아뵈었더니 흔쾌히 받아들이셨습니다. YS도 대통령을 했으니 그런 독버섯 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알 겁니다. 하나회를 척결했지만 그 밑에 더 끈끈한게 있다는 걸 알 겁니다.

YS가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다하겠다면서 제게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용기밖에 없습니다. 일주일 뒤에 동교동을 찾으니 이희호 여사가 '왜 나한테 먼저 안 왔느냐'고 해요. YS의 '용기'와 이 여사의 '왜 먼저 안 왔느냐' 이 두 말에서 그 분들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추협에 가서 얘기하니 동교동 상도동 주축이었던 분들 많은 분들이 무조건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박정희 망령 나타날 때 장준하 선생이 동교동과 상도동을 다시 뭉치게 해"

-1987년 대선에서 분열됐던 민주화 세력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버지 지인들께서 '옛날에 장 선생이 신한당과 민주당의 통합을 일궈내 단일후보를 냈는데 수십 년이 지나 박정희 망령이 다시 나타날 때 장 선생이 나타나서 소원한 동교동과 상도동 관계를 뭉쳐놨다. 어마어마한 일을 해놨다'고 해요."

-장 선생과 박 전 대통령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장 선생은 박정희의 정적이 아닙니다. 박정희의 정적은 YS와 DJ였습니다. 박정희 시절 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박정희와 장준하는 정적이 아닌 천적 관계'라고 했답니다. 한쪽은 광복군 장교이였고 다른 쪽은 일본군 장교였습니다. 광복이 되어서는 한쪽은 민족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다른 쪽은 남로당 문제로 사형을 당할 뻔하다가 배신하고 숨었습니다.

장 선생은 언론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며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했고 그러다가 4·19혁명을 거쳐 정말 제대로 해보려는 순간 박정희가 총칼을 들고 홀라당 나라를 말아먹었습니다.

장 선생이 이렇게 말했어요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한 놈은 안 되는데 그게 바로 박정희다. 내 민족적 자존심이 허락 안 한다.' 광복절이 되면 장 선생은 독립군가와 '희망의 나라' 같은 것을 불렀는데 박정희는 술 먹으면 '엔까'하고 일본 군가를 불렀습니다. 장 선생이 민족적 차원에서 박정희는 안 된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준하, 자기 때리려는 정보원 팔을 잡아채고 주먹으로…"

이와 관련, 장 씨는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수사기관 사람들이 장 선생을 모 호텔에 잡아다 놓고 때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는 무조건 때렸습니다. 그 놈들이 장 선생을 때리려고 하니 장 선생이 그 놈 팔을 딱 잡고 주먹을 들었습니다. 노인네가 자기를 치려고 하니까 놀라면서 움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영감탱이가 덤벼드는데 어떻게 할까요'하고 위에 보고를 했어요. 위에서는 '왜 그렇게 했는지 물어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 장 선생이 '나는 광복군 대위 출신인데 일본군 중위 똘마니에게 맞을 수 있느냐. 어디다 손을 감히 데느냐'라고 말했대요. 나중에 별 하나 짜리가 '말은 맞는 말이네'라고 했데요. 그 놈들도 맞는 말이라고 하는 마당이니 박정희로서는 죽을 지경이었을 겁니다."

"장준하와 박정희는 천적 관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서는 장준하 선생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는 것을 장 씨가 이런 식으로 강조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조선 총독'에 비유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총칼을 들고 정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60년대에 한일협정을 맺었는데, 다시 대한민국을 접수했다고 천황께 보고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통치자금을 내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소위 총독인 것입니다. 물론 비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일협정을 하면서 정상적으로 했다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근로자, 징병, 위안부 문제 및 우리 국보 훔쳐간 것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데 하나도 안 했잖아요."

이날 장 씨는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운동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상당히 경계했다. 자신이 연말 대선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장 선생 문제와 별도라는 전제로 연말 대선에 대해 물어봤다.

-장 선생과 무관한 개인으로서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면 합니까.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저는 과거의 모든 문제를 정리해주는 선구자적인 일회성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분이 정치경륜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국가에 대한 철학과 민족관이 확실한 분이 대통령이 되어 과거사를 확실히 정리하고 그리고 나서 그렇게 깨끗하게 된 나라에서 바른 정치를 하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만 하면 되고 나머지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 동안에는 정권을 잡으면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 직장을 마련해줘야 했는데, 그래서 문제가 많았지 않습니까.

지금 야당에서는 당장 대통령 하고 싶어서 질게 뻔한데도 마구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야당 쪽에서는 박근혜와 게임이 안 됩니다. 그 쪽은 워낙 튼튼한 세력입니다. 그러니 야당에서 대통령 생각을 버리고 잘못된 역사를 쳐낼 수 있는 지도자를 만들어 놓고 정치를 제대로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안 돼도 차기와 차차기가 있지 않습니까."

"월남전 참전 당시, 미아 신세"

그는 인터뷰 말미에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미아가 된 신세를 털어놨다.

"제가 해군이었는데 월남에 내려놓고는 그냥 갔어요. 혼자서 대한민국 군 부대를 1년 동안 찾아 다녔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나중에 '장호권을 죽이려고 그렇게 했다'는 얘기가 돌았다고 하더라고요."

-김희숙 여사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엄청난 탄압 속에서 힘들게 가정을 꾸리셨는데도 TV 화면에 비치는 모습은 언제나 온화합니다.

"어머니께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가족을 지켜줬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후회하는 게 있습니다. 아버지 유골을 어머니께 보여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걸 보여드렸어요. 어머니가 그 유골을 보고는 10년이나 더 늙은 것 같아요. 구멍난 유골을 보고는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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